말린체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조구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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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우라 아스키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번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작가. 전작에서는 자신이 평생 결혼도 하지 못하고 부모님 뒷바라지나 하다가 늙을 팔자인 것을 알고는 엄마 배속에서 나올 때부터 슬퍼서 앵앵 울며 끝까지 나오지 않으려 했던 한 부엌데기가 음식을 매개로 자신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소위 붐 문학, 라틴 아메리카 표 환상문학의 하나였다. 작가가 1950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난 멕시코 사람. 피부색을 보면 유색인, 그러니까 인디오의 피가 조금 섞인 듯한데, 그렇지 않은 멕시코 인이 있기나 하나. 스스로를 에스파냐에서 온 백인의 후손이라고 으스대는 족속들도 알고 보면 자신 속에 검은 피부 무어인의 DNA가 섞여 있을 것이다.

 

 

라우라 아스키벨


  지금의 멕시코가 아니라 16세기 이전의 멕시코에서는 이야기를 후손에게 전할 때 ‘코덱스’라는 이름의 그림을 그려 일종의 책으로 만들어 왔는데, 이것이 지금 시대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학적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예로부터도 마찬가지라 이 코덱스를 만드는 또는 작성하는 작가들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간주했으며, 코덱스 작성을 성스러운 행위로 인식해서 세금까지 면제해주었다고 한다는데, 책에서는 이 주장의 근거를 밝히지는 않는다. 하여간 그런가 보다.
  고대 멕시코와 아즈데카 문명을 합해 그냥 멕시코라고 부르고 이들이 만든 문명을 아즈데카 문명이라고들 한다. 조금 구분을 해야 하지만 여차 잘못 아느니 차라리 나도 그대로 쓰겠다. 레이날도 아레나스가 쓴 <현란한 세상>을 보면, 1765년에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태어난 풍운의 수도사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가 1531년에 멕시코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멕시코 수호성인 과달루페의 성모는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아직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정복하지 못했을 때인데 어떻게 기독교의 성모가 출현할 수 있느냐고 했다가 평생을 감옥생활과 탈옥을 반복해야 하는 촌극을 재미있게 그렸는데, 이 책에서는 과달루페의 성모가 어렴풋하게나마 1531년 부근에 등장할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백인 또는 유럽인의 눈으로 과달루페의 성모를 보는 건 어림도 없고 오직 인디오 고유문화에서 나오는 어머니 신인 ‘토난친’을 이해할 수 있는 인디오의 시선에서만 모습을 허락했을 것이라 시사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로마 가톨릭은 우리나라 불교와 비슷하게 토속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다고 들었는데, 전문가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심스럽긴 하다.
  주인공은 말리날리. 멕시코의 마지막 황제 목테수마가 인신공양을 벌인 날 밤, 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우레와 같은 폭발음이 들리며 은색 뱀(번개)이 하늘에 나타나던 날, 난산 끝에 탯줄이 입술 사이에 물려 있어 할머니가 탯줄을 잘라내 세상에 나오게 된 아기. 말리날리는 이렇게 ‘파이날라’라는 작은 나라의 왕 틀라토아니의 딸로 세상 구경을 한다. 말리날리가 나중에 숨을 거둘 때까지 이이의 한 평생을 그린 소설. 그렇다고 전기적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말리날리의 생몰연대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지만 이이가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스의 통역사로, 때론 정략적으로 도움을 주며 코르테스의 멕시코 정복에 한 힘을 보탰다는 게 정설인 모양이다. 그래서 당연히 멕시코 인들에게 오랜 세월 미움을 받았던 모양인데 라우라 에스키벨이 문학적 상상력으로 색다르게 해석을 한 듯.
  말리날리가 어려서 아버지는 목테수마 혹은 그의 부하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고, 어머니는 재혼을 하는 바람에 현명한 할머니,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지만 시력상실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현명해지는 전형적 ‘인디오 어머니의 신의 현명함’으로 손녀를 양육하며 특히 언어 구사에 관한 교훈을 전해준다. 할머니는 말한다. “만약 말이 다른 사람에게 물(좋은 영향)을 주고, 그럼으로써 신들의 기억을 꽃피우게 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면, 말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된단다.” 할머니에 의하여 만들어진 더없이 보석 같은 유년시절이 마감될 다섯 살 즈음, 할머니는 땅으로 돌아가고, 어머니는 새 남편과 살기 위하여 염소 한 마리 값도 받지 못했음에도 기꺼이 말리날리를 노예로 팔아버린다.
  1504년에 처음으로 아메리카의 라 에스파뇰라(도미니카와 아이티가 있는 섬)에 첫발을 디딘 에르난 코르테스는 외아들로 자라서 그런지 자신이 원하면 뭐든지 갖고야 말겠다는 성취욕이 누구보다도 강한 집착증세를 보인다. 그러나 최고로 빠른 출셋길이었던 군대에 입대하기에는 키가 너무 작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는 ① 궁정시동, ② 사제, ③ 공부밖에 없어, 에이 씨, 나 그딴 거 안 해, 라며 배타고 아메리카로 향한다. 그곳에서 누구보다 더 큰 땅의 정복자이자 영주이자 지배자, 누구보다 더 위대한 남자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상관인 쿠바 총독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그저 관찰 업무에 불과했던 멕시코 탐험을 끝내 원정과 정복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데, 처음부터 잔혹한 살인마였던 것은 아니어서 대화와 타협을 최고의 정책으로 삼아 어려서부터 노예로 생활해 에스파냐어와 현지 언어를 두루 사용할 줄 아는 말리날리를 자신의 ‘혀’로 부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한 명을 더 보태자면, 멕시코의 마지막 황제 목테수마. 그는 멕시코 전역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피라미드 위에서 인신공양의 축제를 벌이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 자신들의 신 케찰코아틀이 돌아오면 자신에게 멕시코 평정 동안 벌어진 살육과 인신공양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 확실하다는 쓸데없는 고민에 갇힌 사내이기도 했다. 딱 이런 찰나에 등장하는 키 작은 사나이 에르난 코르테스. 키가 작다고 해도 인디오의 키에 비하면 결코 작은 키도 아니었고, 거기다가 하늘같은 말을 타고 있었던 거다. 또 수염이 난데다가 머리카락이 옥수수수염처럼 황금빛을 띠고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가장 상서러운 표식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의 신 같은 두 화산 포포카테페를과 이스탁시아우틀 사이를 신에게 공양할 아이들과 걷는 꿈을 꾼 후, 아이들의 두개골을 자신의 물잔으로 사용하겠다고 생각하던 목테수마는 갑작스러운 바람과 햇빛을 보고 아연 공포에 싸여, 에스파냐 사람들의 도래를 케찰코아틀이 귀환하는 것으로 확신하게 된다. 이런 바보 멍청이 같은 황제라니. 신의 징벌에 관한 공포 때문에 군대의 총지휘자 목테수마는 엄청난 전투능력을 마비시켜버렸던 거였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그깟 한 줌의 에스파냐 군대 정도는 단 하루 만에 격퇴시킬 수 있었을 것을.
  이렇게 세 명이 벌인 역사적 사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책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인디오 문명과 문화, 아름다움, 독특하고 현명하고 자연 친화적인 것들이 어떻게 천박한 에스파냐의 배금주의에 의하여 무너져갔는지,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말리날리가 정말 동족을 배신하기나 한 것인지, 대지를 닮은 한 여성으로서의 비폭력과 작물의 연속적 생산 등등, 심지어 (작품해설에 의하면) 여성주의적 시각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디오들의 다양한 신과 자연에 동화하는 방식이었다. 이 책의 결론도 그리하여 여신의 출현으로 귀결이 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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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크 사려고 줄 서보신 분? 나는 줄 안 섰다. 일단 난, 비록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동, 바로 옆 래인lane에 확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염자가 아니어서 굳이 KF-94인지 뭔지 하는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날 아는 분께서는 의아하시겠지만 피부가 워낙 약해 마스크만 썼다 하면 주둥이 근처에 트러블이 생겨서 여간해선 마스크, 안 쓴다.

  코로나 생기기 전에 올 봄에도 황사 또는 미세먼지가 처들어올 거라고 아내가 30장 들이 두 박스, 50장 짜리 중국산 한 박스를 사두었고, 사태가 터지니까 아들 내외가 또 한 90매 가량 KF-94가 아닌 그냥 마스크를 가져와 우리 부부가 올 가을까지 쓸 건 다 챙겨놨다. 그래 코로나 터져서 이웃한테 물론 중국산으로 한 스무 장 기증하기도 했다.

  내가 요즘 학자로 드물게 존경하는, 통섭의 학문, 최재천 선생이 건강한 사람은 마스크 쓸 필요가 없다고 설파를 했으나, 불행하게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출근 자체를 하지 못해, 감염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루 열 시간 이상은 마스크로 얼굴을 뒤덮고 하루 종일 근질근질, 숨쉬기도 기분나쁘고, 피부에 뭣도 나고 막 그렇다.

  지금 마스크는 일종의 에티켓. 나 같은 미 감염자도 마스크를 쓰는 이유는 내 주위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하지 않게 해주는 효과 때문이다. 그러니 건강한 사람은 요일에 맞춰, 아니면 토요일에 약국 앞에 줄 설 이유가 없다. 그냥 아무거나 주둥이 근처를 덮어서 다른 사람한테, 나도 마스크 했다, 당신들한테 내 침 또는 비말, 또는 DNA를 살포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려주면 되는 일.

  근데 희한한 건, 거의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쓰는 불쾌한 일을 하면서 거의 아무도 마스크 착용에 따른 불쾌함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거. 이거? 시민의식? 좋아. 시민의식일 수 있다. 그래도 뭔가 좀 이상하다. 어째 한 명도 마스크 착용에 따른 갑갑함을 토로하지 않는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내 마스크 한 번 보시라.

 

 

  이게 하루 쓴 거다. 난 얄짤 없이 하루 쓰면 버린다. 어찌 내 몸의 모든 미생물이 묻은 마스크를 다음날 또 쓰겠는가. 근데 왼쪽 위에 무슨 말 보이시지?


  MERDE


  이거 보고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 묻지도 않는다. 영어 단어인줄 알고 괜히 그것도 모른다 고백할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밥 먹고 사는 회사가 더군다나 다국적기업이니까.

  그러나 이건 불어다. 일찍이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원수의 휘하 가운데 한 명이 프랑스 군에 항복을 권유하자 나폴레옹 아래 한 장군이, 애석하게 그이의 이름을 잊었다, 스탕달이 쓴 <파르마 수도원>에서 나온다, 크게 외치기를, "네 대답에는 다섯 철자면 충분하다, 하고 부르짖던 알파벳이 M.E.R.D.E. 프랑스 말로 "똥"이란 뜻이고, 당시 워털루 전투에서는 "엿 먹어라!" 정도로 해석하면 98점이다.


  난, 건강한 내가 쓸데없이 마스크를 쓰고 하루 온 종일 답답하게 호흡하고, 주둥이 근처가 끈적거리며, 피부 트러블까지 일으키는 것이 너무 싫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특히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일해야 하는 직장인일 경우에. 근데 왜 모두 조용하지?

  그리하여 조그만 목소리라도 난 세상에 외치기 시작했다. 마스크 쓰기 싫다고, 불편하다고.


  MERDE !


  부모자식 간에는 머뭇거림이 없다. 작은 아이가 마스크를 보더니, 아빠(새끼가 스물여덟 살인데 아직도 아빠라고 한다. 내가 다 쪽팔린다. 얌마, 아버지 또는 아버님이라고 불러!) 이게 뭔 뜻이야?

  그래서 일러주었다.

  이게 프랑스 말인데 원래 뜻은 "똥"이고, 지금 상황에서 제일 어울리는 번역은 이래.

  "씨발!"


 


* 이 글은 쐬주에 맥주 마시고 취중에 쓴 겁니다. 내일 아침에 정신차린 다음에 읽어보고 지울 수 있습니다. 없으시겠지만 댓글 달아주시는 분께선, 갑자기 본문이 지워져도 그런가보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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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3-23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귀가 아프더라고요.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도 안 쓰면 회사 사람들 눈치 보이고, 전철에선 더 그렇고. ㅎㅎ 그래서 씁니다. 아마 다들 그렇겠지요. 암튼 어서 이 마스크를 벗을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이 댓글은 지워져도 상관 없습니다. ㅎㅎ

Falstaff 2020-03-23 21:57   좋아요 1 | URL
ㅋㅋㅋ 역시 잠자냥님!
근데 안 지워도 될 거 같아요. 이렇게 얘기하는 인간도 하나 쯤 있어야 좋을 거 같아서요. (흑흑... 제가 이래서 출세를 못했답니다. 왜 이런 이야기 하는 인간이 하필이면 나야!)

케이 2020-03-24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남편도 사방팔방에 아무도 없을 때도 마스크를 끼라고 해서 소소하게 싸우곤 하는데요. 분명 코로나19는 공기 전염이 아닌데 사람들이 공기 전염마냥 구는 게 너무 이상하고, 또... 사실 코로나19가 건강한 사람이 걸린다고 해서 무조건 죽는 병이 아닌데도 안 걸리려고 노력하는 걸 보며, 보통 사람들의 건강 의지(?) 가 이렇게 강하구나 싶어서 가끔 놀란답니다. 하여튼 귀도 아프고 넘 답답하고 싫어요 정말.

Falstaff 2020-03-24 09:52   좋아요 1 | URL
그럴 때 욕 한 번 콱 해버리세요. ㅋㅋㅋ
캔 주스 손잡이를 뒤통수 대고 거기다 마스크 끈을 걸면 편하다고 해 정말 해봤거든요. 진짜 조금 편하더라고요. 근데 그건 어째 좀 쑥쓰럽더라고요.
저도 사람들의 건강의지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제가 삶의 의지가 별로 없는 건지 좀 헷갈리고 있습니다. ㅡ.ㅡ

qhrl4 2020-04-0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도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일상의 이야기인것 같기도 하고 책 이야기 인것도 같고...
읽다보니 재미있어서 댓글 남깁니다.
좀 색다르다고 해야하나요? 보통과는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새로운 지식을 알게되고 제가 몰라던 분야도 알게되고..쉽게 책을 설명해주셔서
몰랐던 것들도 자세하게 재미있게 읽게 되었어요...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어요.....
이렇게 글 쓰시는 분은 처음이라서 여기저기 구경하게 되네요...
잘 보고 갑니다.^^

Falstaff 2020-04-02 19:04   좋아요 0 | URL
웃, 말씀 고맙습니다.
저야 뭐 완전 아마추어 독자인 걸요. ^^
 
모든 행복한 가족들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경주.김정하 옮김 / 뿔(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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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동안 읽은 푸엔테스가, <아우라>, <의지와 운명>, 그리고 “미국은 섹스를 한다.”라고 우리말 제목을 뽑았던 <다이아나, 혹은 외로운 사냥꾼>. 네 번째 푸엔테스로 옴니버스 소설 <모든 행복한 가족들>을 골랐다. 푸엔테스는, 눈에 띄면 읽는다. 파나마시티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살며 라틴 아메리카 작가가 늘 그렇듯이 중남미 아메리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기 작품의 무대로 삼는데 당연히 8할이 넘게 멕시코를 배경으로 글을 썼다. 내가 읽은 한도에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 왜 내가 웹 서핑하다 푸엔테스만 발견하면 장바구니로 건져 올리느냐고? 당연히 재미있어서이다. <다이아나, 혹은 외로운 사냥꾼>의 작품해설을 보면,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푸엔테스 스스로가 엄청난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이 카를로스 푸엔테스이며 일인칭 시점으로 쓴 소설이기도 하다. 옴니버스 소설 <모든 행복한 가족들>의 몇 작품에서도 이름은 카를로스가 아니지만 여러 명의 푸엔테스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다 작가의 체험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 생각으로 말하자면, 작가 스스로가 가족 또는 가정생활에 그리 바람직하지 못할 정도의 바람둥이라서 오히려 그런 외도 성향이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정도.
  소설을 읽는 재미. 이것의 상당부분은 당연히 문장에서 나온다. 세 번째 작품이 <매력 없는 사촌>인데, 아내의 사촌 언니 중에 나이 마흔이 넘겼고, 너무 못생겨서 여태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는 더 결혼할 가망이 없는 좀 불쌍한 여자 발렌티나다. 이 여인에게 한 눈에 넘어가는 미남자이자 ‘아내’의 남편이 드디어 발렌티나의 방에 들어 침대에 눕히고 키스를 퍼부으며 하는 말을 잠깐, 아니, 조금 길더라도 인용해보자. 어차피 책이 절판이니 당신이 이 글을 기억하고 있을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우선 내게 1분만 줘. 더 이상은 안 바라. 그런 다음 내게 선물로 한 시간만 줘. 그런 다음 너와 함께 밤을 보내게 해줘. 말하고 또 생각하면서 발렌티나 너의 쏘는 듯한 쓰디쓴 냄새는 나를 미치게 해. 뱀들의 밀림 같은 너의 풀어 헤친 머리 너의 경직된 얼굴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네 수녀 복장 뒤에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그렇게 완전하고 그렇게 동그란 네 벗은 몸의 아름다움, 너는 몸을 숨기기 위한 얼굴을 가졌어. 몸은 가면을 쓸 수 없어. 가면은 몸을 눈부시게 폭로해 버려. 발렌티나, 넌 그걸 알아. 얼굴을 가리지 마. 몸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얼굴, 그것이 너의 비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 감히 너의 옷을 벗기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널 상상했겠어? 네게 나를 데려온 사람은 발렌티나 네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지금부터 온 사람은 나야. 너를 발견하고 너로부터 더 이상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너의 마법에 걸린 나 헤수스 아니발,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기다리며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조용히 그렇게 인내한 너를 발견한 것 때문에. 발렌티나, 이거 알아? 진실은 나를 죽이고 있었고, 너와 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기만이라면 그땐 거짓이 내게 삶을 주는 나의 삶이야. 나의 사랑 나의 여인 초조해하며 기다려 왔던 발렌티나 소로야, 네가 날 떨리게 하는 것을 알고 있니, 날 미치게 하는 것을, 사촌 발렌티나 널 갖게 될 때 내 안에 생기는 부드러운 야수성을? 너와 나 사이에 일어나 이것 때문에 넌 나를 미워할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날 싫어하면 할수록 난 널 더욱더 사랑할 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아무것도 해명하려 들지 마. 그냥 받아들이면 돼. 너라는 자체로 나를 사로잡았어. 너는 내가 알지 못했던 기쁨이야 네 시간이 회전할 때마다 텅 비어 있던 내 영혼의 모래시계가 채워져, 발렌티나. 우리 두 사람 서로 떨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워, 나의 사랑. 날 함부로 대해 봐. 그러면 네가 나에게 아무리 상처를 줘도 너는 네가 내게 주는 행복을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네 모두를 키스하고, 발부터 머리까지 키스하면서 너를 순례할 거야. 네 인생의 처음도 마지막도 되고 싶지 않아. 유일하고 싶어. 사촌 발렌티나,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고질적인 사랑이야. 너의 폭로는 나를 고집쟁이 헤수스로 만들어버려. 네가 날 버린다면 난 평안 없는 날들만 맞이하겠지. 넌 내 평화이고 나의 자유, 나의 배꼽, 나의 손톱, 나의 영양분, 나의 꿈. 발렌티나, 너는 나를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양심, 의무, 신의, 습관의 짐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줘. (헥헥... 이제 문단의 한 사분의 일 썼다. 더는 못 쓰겠다.)”


  제목 그대로 행복한 가족들에 관한 열여섯 개의 스케치, 또는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을 넘기면 “행복한 가족들은 모두 서로 비슷하게 닮아 있다. 그러나 불행한 가족들은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 적혀 있다. 그러나 우리의 푸엔테스는 위에 내가 길게 인용한 사랑의 속삭임을 처사촌 언니에게 퍼부은 가족의 장남이자 회계사인 헤수스 아니발처럼 ‘가족’의 구분이 대단히 애매모호해서, 작가가 계속해서 “행복한 가족들”이라고 주장하는 가족의 구성원들이 매우 색다른 조합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행복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서로 행복하기 위해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는” 모습을 보인다.
  52세에 회사로부터 명예퇴직을 당한 가장 파스토르 파간 씨에게는 대학 다니다가 도무지 학문에 뜻을 세우지 못해 중도작파하고 하필이면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 취업해 잠깐 잘 나가다가 거렁뱅이가 된 후 다시 돌아와 부모의 육아낭으로 쏙 들어온 아들 아벨 캥거루와 국내선 스튜어디스를 비롯해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역시 부모네 집 꼭대기 좁은 다락방에 박혀버린 딸 알마 캥거루와 함께 살게 된다. 파간 씨의 아내 엘비라는 젊은 시절 꽤 유망한 볼레로 가수였는데 파간 씨를 만나는 바람에 꿈을 접고 육아와 가사에 전념했으며 이제 다시 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먼 먼 시절을 되돌려보면서 열심히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푸엔테스는 첫 번째 작품으로 이 가족을 소개하며 행복한, 어쨌든 안정되고 행복한 가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에 길게 인용한 시사촌 언니 꼬드겨 애인으로 삼는 것이 네 번째 작품이고, 심지어 동거 40년 만에 둘 사이에 새로운 남자가 비집고 들어오는 남성 동성애 커플도 있는데, 새로운 젊은 남자에서 상대방의 젊은 모습을 발견했다고 하니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옴니버스 소설은 읽기엔 재미있다. 그런데 일관된 뚜렷한 발자국이 없어서 정작 다 읽은 다음에는 또 별로 남는 게 없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은 그러나 열여섯 작품이 모두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심지어 장군이 국가에 반역을 한 장남과 장남이 숨어 있는 현장을 고발한 차남 이야기 같은 것까지, 원래 출판사 [뿔>이 숱한 문학작품을 절판시키기는 했지만, 이 책의 출간 포기를 아쉽게 생각하게 만든다.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 당연히 아니면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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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집 범우문고 46
서정주 지음 / 범우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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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애증. 시나 좀 못 쓰든지. 어찌 이런 절창을 세상에 떨구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서정주가 1915년생. 그의 나이 서른일 때 조선은 식민지에서 벗어난다. 조금만 더 참지 그걸 바로 눈앞에 둔 채 변절을 하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제가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1940년대, 황순원은 평양에서 교사를 하다가 고향인 빙장리로 돌아와 은둔한 채 남몰래 조선어로 소설을 썼고, 서정주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던 김동리도 절필을 선언하고 사천의 양곡배급소에 들어가 일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만 나이로 스물일곱 살의 미당은 일본어로, 황군에 입대해 영미 귀축 타도하기 위해 조선 젊은이의 한 목숨 깨끗하게 산화시키자고 노래를 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그를 변호하지 못하겠다. 미당의 시는 국보급이다. 하지만 국보급 시를 더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앞에서 말했듯, 시나 좀 우습게 쓰던지 하지 이리 피 끓는 절창을 세상에 부려놓고 이젠 돌아오지 않으니 이걸 어찌하리.
  미당은 특별한 시각을 지녔음이 분명하다. 그의 초기 시 꽃뱀, <花蛇>에서는 ‘아름다운 배암’이 사향 박하麝香 薄荷의 뒤안길에 나타난다. 화려한 무늬의 뱀을 본 미당은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라고 영탄하고 결국은 뭇사람들의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麝香 芳草ㅅ길 /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 石油 먹은듯… 石油 먹은듯… 가쁜 숨결이야” 한 번 에로티시즘을 자극하고는 결국 “우리 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 같은 고흔 입설… 슴여라! 배암.” 한 여인의 입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본다. 가수 송창식이 불러 더 유명해진 <푸르른 날>에서도 단풍은 그냥 드는 것이 아니라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하필이면 가을꽃이 필 자리에서 그만 초록이 지쳐, 초록이 이젠 지쳐서 단풍이 든단다.
  이 양반 생전에 공덕동이던가 대흥동이던가 또는 염리동인가에서 살았는데, 친구 집에 놀러가려면 댁의 낮고 긴 담을 따라가다 담을 지나치자마자 언덕빼기로 올라가야 했다. 그래 담 넘어 미당(으로 짐작되는 노인)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홍수환이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던 그날인가 싶은데 확실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미당 부부가 그리도 금슬이 좋았단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등지자 깊은 시름을 하다 곧이어 자신도 뒤를 따라 갔다는 기사를 읽고 감회에 젖었던 일이 엊그제 같다. 그게 무려 20년 전 일이다. 그는 <내 아내>라는 시를 지어 시 속에서 아내를 이렇게 그렸다.



  나 바람 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섬천 사발의 냉숫물.


  내 襤褸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전문) * 첫 연 세 번째 줄 ‘섬천’은 ‘삼천’의 오식 같다.


  셋째 연에 등장하는 ‘피리’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피리인 것이 시집을 다 읽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모든 파란을 잠재울 수 있는 피리. 아내가 먼저 죽으면, 숨결을 달라고 해서 피리에 담겠다. 그러고 나면 피리를 불 때마다 자신의 모든 시름을 이길 수 있는 소리가 될 거라는 의미. 내가 먼저 죽으면 내 숨결이 아내의 빈 사발에 담겨 있어 냉수 한 사발을 마실 때마다 항상 냉수 냄새로 아내의 옆에 있을 수 있다니 미당은 참 운 좋은 한 세상 살다 갔다.
  나는 부모 얘기해가며 청승떠는 걸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런데 미당의 시 <어머니> 끝 구절엔 두 손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은
  永遠과, 그리고는 어머니뿐이다.


  아니 그런가. 어머니가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이라니. 세상에 어떤 빌어먹을 시인 나부랭이가 있어서 이리 마음 저리는 한 줄 싯귀를 만들어놓고 갔는지. 이런 것들 말고도 편편이 절창이고 명시들이다. 그래 서정주가 더 미운 거다. 읽을 수도, 읽지 않을 수도 없는 시인. 그리하여 말 그대로 애증의 시인. 어쩔 수 없다. 책장 저 속에 숨겨놓고, 겉으로는 절대 서정주를 읽지 않는다고 거짓 주장을 하며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훔쳐볼 수밖에. 어떻게 이런 시를 읽지 않고 한 세월을 살 수 있겠는가 말이지.


  歸 蜀 途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신이나 삼어줄ㅅ걸 슲은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머리털 엮어 드릴ㅅ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을로 가신 님아.  (전문)


 * 옥날메투리는, 신 중에서는 으뜸인 메투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신발이였느니라. 귀촉도는, 행용 우리들이 두견이라고도 하고 솟작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 귀촉도… 그런 發音으로 우는 것이라고 地下에 도라간 우리들의 祖上 때부터 들어 온 데서 생긴 말슴이니라. (시인의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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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3-20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는* 참 잘 써요... 정말. 중고등학교 때 이 사람 시 읽고 느낀 센세이션이란!
정말 애증의 시인입니다. ㅎㅎ 오랜만에 봐도 또 좋군요.

Falstaff 2020-03-20 15:34   좋아요 1 | URL
맞아요. 차라리 그러지나 말지 말입니다. ^^;;
 
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지음, 박계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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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켈만의 <에프F>를 재미있게 읽어 그의 다른 작품을 하나 더 읽어보고 싶어 고른 책. <에프>는 일란성 쌍둥이를 등장시켜 인물들은 전혀 모르는 채로 상호간 소통불능의 상태를 재미있게 서술했다. <세계를 재다>에서는 완벽하게 다른 성격을 지닌 독일의 두 천재 알렉산더 폰 훔볼트 남작과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박사를 캐스팅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물을 잰다, 즉 측정하고자 한다는 것. 이를 위해 젊은 시절의 훔볼트 남작은 프랑스 남자 봉플랑과 함께 멕시코와 아마존 일대를 탐험하며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 강을 누비기도 하고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졌던 침보라소 산을 등반해 18세기 사람으로 가장 높은 고도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었다.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활화산의 분화구로 들어가 지구의 속은 펄펄 끓는 용암으로 되어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하고. 반면 가우스 박사는 태어나자마자 천재라는 특별한 족속으로 구별되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학습능력과 문제를 읽는 시선을 가졌으나, 다른 학문은 조금 멍청한 사람들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쉽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학문, 이젠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존재인지를 과시하기 위한 학문이 된(이 내용은 김용운 한양대 수학과 명예교수가 방송에 나와서 한 얘기다.) 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을 한다. 이어서 물리학, 천문학, 심지어 측지학까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학문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달하는 진정한 천재였다. 과거형을 사용하는 건, 아쉽게도 어떤 천재든지 천재라는 타이틀에는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 속의 늙은 가우스는 젊은 시절에 5분이면 다 이해하고 정리까지 마쳤을 논문을 이젠 하루 종일 집중을 해야 겨우 이해가 된다는 이야기를 몇 번 하기도 한다.
  <세계를 재다>는 이렇게 유통기한이 지난 한 명의 천재와 또 한 명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이자 기상학자이자 해양학자를 등장시켜 이들의 과거를 회상하고, 활동무대가 완벽하게 상이했으나 결국 그들이 공통적으로 찾고자, 알고자 했던 건 같았다는 (특히 훔볼트의) 자각으로 결론을 맺는다.
  책은 1928년 9월, 괴팅겐에 있던 가우스에게 독일 자연과학자 회의에 참석해달라고 그토록 유명한 귀족 훔볼트가 특별한 초청장을 보내, 실로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괴팅겐을 떠나 베를린 행 마차를 타는 난리법석으로 시작한다. 가우스는 정말로 여행을 싫어해 그냥 괴팅겐의 천문대에 박혀 있고 싶지만 그래도 훔볼트 남작은 한 번 보고 싶어 두 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 오이겐과 함께 길을 나선다. 가우스의 첫 번째 아내 요하나가 어떤 여자인가 하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니며, 평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가우스 앞에서 그가 가우스인지도 모른 채 말해버린 여자다. 천재의 눈으로 봐서는 그냥 덜 멍청한 수준이고, 내 수준으론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똑똑한 여자다. 가우스가 날 봤다면? 뭐 사람으로 뵈지도 않았겠지. 근데 둘째 아들 오이겐이 가우스의 눈으로 보기에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은 수준. 우리 눈으로는 보통, 또는 보통보다 조금 높은, 그냥 서울대 합격했을 정도. 가우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다만 오이겐 한 명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이겐의 생각이다. 이건 책의 거의 마지막에 나온다. 거 보시라. 천재라고 행복할 거 같아? 돈 많다고 행복할 거 같아? 천만의 말씀. 사는 건 다 그게 그거다.
  흠. 또 이야기가 삼천포 시로 빠졌는데, 가우스가 얼마나 천재였느냐 하면, 나 대학 다닐 때 김X호 선생이 수업을 하다 학생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자신의 (실력은 모르겠고) 교수법이 도무지 해독불가일 정도로 개판인 건 조금도 생각 안한 채, 뻑하면 가우스는 열다섯 살 때 <산술에 관한 논고>를 썼느니 안 썼느니 했을 정도다. ‘니나’라는 이름의 러시아 출신 단골 창녀를 찾아가서도, 요하나와의 결혼 첫날밤에 그녀의 위에서 일을 치르던 중에도 목성의 위성이 목성을 도는 괘도에 관한 오류에 대한 방정식이 번쩍 생각이 나 얼른 몸을 일으켜 기어이 떠오른 공식을 종이에 적어놓은 다음에 후반전을 시작했다는 거 아닌가. 확실히 인간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와중에 어떻게 타원을 도는 오차誤差에 관해 궁리를 할 수가 있었는지. 하버드 의과대 다니는 인간들은 연인의 몸을 만지면서도 서로 상대방 피부 속 뼈의 라틴어 이름과 개수를 센다며? 그건 진짜로 뼈의 외곽을 만지니까 그럴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목성의 위성이 어쩌구저쩌구... 1부터 n까지의 수를 더하기 한 합계가 n(n+1)/2 인 것을 밝혀낸 인간이 가우스인데, 그때 나이가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이었다.
  훔볼트로 말하자면 남작의 아들로, 위로 형이 한 놈 있어서 나중에 국가의 고위 공무원이 된 후에 훔볼트 대학을 짓는다. 그러니까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은 이 책의 주인공 훔볼트의 형이, 동생 알렉산더, 알렉시의 눈부신 업적을 보고 질투가 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질투는 지극히 생산적이고 모범적이고 발전적인 질투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질투는 질투니까, 동생보다 더 오래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기 바라는 형이 만든 학교다. 하여간 이 형제들의 바람직한 양육을 위해 어머니가 괴테를 찾아가 아들 키우는 법에 관해 컨설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괴테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니, 아들 형제를 키우는 분들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읽어보시라.


  -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의 다양함을 뚜렷이 보여주는 형제
  - 즉 행위와 향유의 풍부한 가능성들을 가장 모범적인 현실로 만드는 형제
  - 그들의 감성을 희망으로, 정신을 여러 가지 생각으로 충족시키는 하나의 극작품과도 같은 형제.

  로 키우라고 했단다. 근데 문제는 아무도 괴테의 위와 같은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고. 만일 괴테의 이 편지를 가우스에게 보여주었으면 아마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말았을 걸?
  어쨌든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알렉시 훔볼트는, 소년시절에 재능에 있어 자신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형의 악의에 찬 장난으로 죽을 위기를 몇 번 넘긴 다음, 드디어 정확한 세상의 사이즈와 무수한 선들(위도, 경도, 자오선 기타 등등)을 위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드넓은 강과 밀림으로 들어가 진짜로 죽을 고생을 하며 여러 가지 광물과 식물, 심지어 인간 시체의 표본들을 박스에 담아 (스페인 여권으로 떠났으니) 일부는 스페인으로, 일부는 형에게 보내기에 이른다. 훔볼트가 인류학적으로도 흥미가 있었는지, 그는 완전한 나신에 몸에다 갖가지 그림만 그리고 다니는 아마존 여인의 머릿속에 머릿니가 몇 마리 들었는지 세보기도 하고, 화살촉에 발라 이웃한 종족을 쏴 죽인 다음 그 고기를 먹는 식인종에게 독을 얻어 직접 꿀꺽 삼키고는 애매한 몽환 속을 헤매보기도 하고, 날아다니는 새의 똥을 찍어먹어 보기도 하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다닌다. 그것이 괴테의 양육법이 낳은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엽기발랄한 행위를 하고도 끝내 식인종의 만찬 식탁엔 오르지 않고 다시 유럽으로 귀환해 이름이 만방에 떨치니 어찌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괴팅겐을 포격하지 않았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가우스일지언정 그의 초대를 뿌리칠 수 있었으랴.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진짜 재미는 작가 다니엘 켈만이 요소마다 숨겨놓은 유머 코드를 발견하고 함께 낄낄거리는 거라는데,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두 마에스트로를 좇아 서양식 유머를 ‘모두’ 발견하기는 극동의 아시아 사람에겐 조금 무리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는 할지라도 도무지 추천은 하지 못하겠다. 대신 켈만의 다른 소설 <에프>는 한 번 읽어보셔도 무난할 듯하니, 그저 참고만 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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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3-1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닌 이럴 수가...

저도 며칠 전부터 이 책 읽고
있었거든요 놀라워라 ~

다만 <거장과 마르가리타> 읽
느라 미처 못 읽는 사이에 까비...

Falstaff 2020-03-19 10: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 책, 아이디어가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장하고 함께 읽는 건 무리지요. 거장이 워낙 사람을 확 빨아들이는 작품이라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