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집 범우문고 46
서정주 지음 / 범우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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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증. 시나 좀 못 쓰든지. 어찌 이런 절창을 세상에 떨구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서정주가 1915년생. 그의 나이 서른일 때 조선은 식민지에서 벗어난다. 조금만 더 참지 그걸 바로 눈앞에 둔 채 변절을 하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제가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1940년대, 황순원은 평양에서 교사를 하다가 고향인 빙장리로 돌아와 은둔한 채 남몰래 조선어로 소설을 썼고, 서정주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던 김동리도 절필을 선언하고 사천의 양곡배급소에 들어가 일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만 나이로 스물일곱 살의 미당은 일본어로, 황군에 입대해 영미 귀축 타도하기 위해 조선 젊은이의 한 목숨 깨끗하게 산화시키자고 노래를 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그를 변호하지 못하겠다. 미당의 시는 국보급이다. 하지만 국보급 시를 더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앞에서 말했듯, 시나 좀 우습게 쓰던지 하지 이리 피 끓는 절창을 세상에 부려놓고 이젠 돌아오지 않으니 이걸 어찌하리.
  미당은 특별한 시각을 지녔음이 분명하다. 그의 초기 시 꽃뱀, <花蛇>에서는 ‘아름다운 배암’이 사향 박하麝香 薄荷의 뒤안길에 나타난다. 화려한 무늬의 뱀을 본 미당은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라고 영탄하고 결국은 뭇사람들의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麝香 芳草ㅅ길 /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 石油 먹은듯… 石油 먹은듯… 가쁜 숨결이야” 한 번 에로티시즘을 자극하고는 결국 “우리 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 같은 고흔 입설… 슴여라! 배암.” 한 여인의 입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본다. 가수 송창식이 불러 더 유명해진 <푸르른 날>에서도 단풍은 그냥 드는 것이 아니라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하필이면 가을꽃이 필 자리에서 그만 초록이 지쳐, 초록이 이젠 지쳐서 단풍이 든단다.
  이 양반 생전에 공덕동이던가 대흥동이던가 또는 염리동인가에서 살았는데, 친구 집에 놀러가려면 댁의 낮고 긴 담을 따라가다 담을 지나치자마자 언덕빼기로 올라가야 했다. 그래 담 넘어 미당(으로 짐작되는 노인)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홍수환이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던 그날인가 싶은데 확실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미당 부부가 그리도 금슬이 좋았단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등지자 깊은 시름을 하다 곧이어 자신도 뒤를 따라 갔다는 기사를 읽고 감회에 젖었던 일이 엊그제 같다. 그게 무려 20년 전 일이다. 그는 <내 아내>라는 시를 지어 시 속에서 아내를 이렇게 그렸다.



  나 바람 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섬천 사발의 냉숫물.


  내 襤褸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전문) * 첫 연 세 번째 줄 ‘섬천’은 ‘삼천’의 오식 같다.


  셋째 연에 등장하는 ‘피리’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피리인 것이 시집을 다 읽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모든 파란을 잠재울 수 있는 피리. 아내가 먼저 죽으면, 숨결을 달라고 해서 피리에 담겠다. 그러고 나면 피리를 불 때마다 자신의 모든 시름을 이길 수 있는 소리가 될 거라는 의미. 내가 먼저 죽으면 내 숨결이 아내의 빈 사발에 담겨 있어 냉수 한 사발을 마실 때마다 항상 냉수 냄새로 아내의 옆에 있을 수 있다니 미당은 참 운 좋은 한 세상 살다 갔다.
  나는 부모 얘기해가며 청승떠는 걸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런데 미당의 시 <어머니> 끝 구절엔 두 손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은
  永遠과, 그리고는 어머니뿐이다.


  아니 그런가. 어머니가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이라니. 세상에 어떤 빌어먹을 시인 나부랭이가 있어서 이리 마음 저리는 한 줄 싯귀를 만들어놓고 갔는지. 이런 것들 말고도 편편이 절창이고 명시들이다. 그래 서정주가 더 미운 거다. 읽을 수도, 읽지 않을 수도 없는 시인. 그리하여 말 그대로 애증의 시인. 어쩔 수 없다. 책장 저 속에 숨겨놓고, 겉으로는 절대 서정주를 읽지 않는다고 거짓 주장을 하며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훔쳐볼 수밖에. 어떻게 이런 시를 읽지 않고 한 세월을 살 수 있겠는가 말이지.


  歸 蜀 途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신이나 삼어줄ㅅ걸 슲은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머리털 엮어 드릴ㅅ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을로 가신 님아.  (전문)


 * 옥날메투리는, 신 중에서는 으뜸인 메투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신발이였느니라. 귀촉도는, 행용 우리들이 두견이라고도 하고 솟작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 귀촉도… 그런 發音으로 우는 것이라고 地下에 도라간 우리들의 祖上 때부터 들어 온 데서 생긴 말슴이니라. (시인의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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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3-20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는* 참 잘 써요... 정말. 중고등학교 때 이 사람 시 읽고 느낀 센세이션이란!
정말 애증의 시인입니다. ㅎㅎ 오랜만에 봐도 또 좋군요.

Falstaff 2020-03-20 15:34   좋아요 1 | URL
맞아요. 차라리 그러지나 말지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