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지음, 박계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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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켈만의 <에프F>를 재미있게 읽어 그의 다른 작품을 하나 더 읽어보고 싶어 고른 책. <에프>는 일란성 쌍둥이를 등장시켜 인물들은 전혀 모르는 채로 상호간 소통불능의 상태를 재미있게 서술했다. <세계를 재다>에서는 완벽하게 다른 성격을 지닌 독일의 두 천재 알렉산더 폰 훔볼트 남작과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박사를 캐스팅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물을 잰다, 즉 측정하고자 한다는 것. 이를 위해 젊은 시절의 훔볼트 남작은 프랑스 남자 봉플랑과 함께 멕시코와 아마존 일대를 탐험하며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 강을 누비기도 하고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졌던 침보라소 산을 등반해 18세기 사람으로 가장 높은 고도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었다.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활화산의 분화구로 들어가 지구의 속은 펄펄 끓는 용암으로 되어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하고. 반면 가우스 박사는 태어나자마자 천재라는 특별한 족속으로 구별되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학습능력과 문제를 읽는 시선을 가졌으나, 다른 학문은 조금 멍청한 사람들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쉽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학문, 이젠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존재인지를 과시하기 위한 학문이 된(이 내용은 김용운 한양대 수학과 명예교수가 방송에 나와서 한 얘기다.) 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을 한다. 이어서 물리학, 천문학, 심지어 측지학까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학문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달하는 진정한 천재였다. 과거형을 사용하는 건, 아쉽게도 어떤 천재든지 천재라는 타이틀에는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 속의 늙은 가우스는 젊은 시절에 5분이면 다 이해하고 정리까지 마쳤을 논문을 이젠 하루 종일 집중을 해야 겨우 이해가 된다는 이야기를 몇 번 하기도 한다.
  <세계를 재다>는 이렇게 유통기한이 지난 한 명의 천재와 또 한 명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이자 기상학자이자 해양학자를 등장시켜 이들의 과거를 회상하고, 활동무대가 완벽하게 상이했으나 결국 그들이 공통적으로 찾고자, 알고자 했던 건 같았다는 (특히 훔볼트의) 자각으로 결론을 맺는다.
  책은 1928년 9월, 괴팅겐에 있던 가우스에게 독일 자연과학자 회의에 참석해달라고 그토록 유명한 귀족 훔볼트가 특별한 초청장을 보내, 실로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괴팅겐을 떠나 베를린 행 마차를 타는 난리법석으로 시작한다. 가우스는 정말로 여행을 싫어해 그냥 괴팅겐의 천문대에 박혀 있고 싶지만 그래도 훔볼트 남작은 한 번 보고 싶어 두 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 오이겐과 함께 길을 나선다. 가우스의 첫 번째 아내 요하나가 어떤 여자인가 하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니며, 평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가우스 앞에서 그가 가우스인지도 모른 채 말해버린 여자다. 천재의 눈으로 봐서는 그냥 덜 멍청한 수준이고, 내 수준으론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똑똑한 여자다. 가우스가 날 봤다면? 뭐 사람으로 뵈지도 않았겠지. 근데 둘째 아들 오이겐이 가우스의 눈으로 보기에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은 수준. 우리 눈으로는 보통, 또는 보통보다 조금 높은, 그냥 서울대 합격했을 정도. 가우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다만 오이겐 한 명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이겐의 생각이다. 이건 책의 거의 마지막에 나온다. 거 보시라. 천재라고 행복할 거 같아? 돈 많다고 행복할 거 같아? 천만의 말씀. 사는 건 다 그게 그거다.
  흠. 또 이야기가 삼천포 시로 빠졌는데, 가우스가 얼마나 천재였느냐 하면, 나 대학 다닐 때 김X호 선생이 수업을 하다 학생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자신의 (실력은 모르겠고) 교수법이 도무지 해독불가일 정도로 개판인 건 조금도 생각 안한 채, 뻑하면 가우스는 열다섯 살 때 <산술에 관한 논고>를 썼느니 안 썼느니 했을 정도다. ‘니나’라는 이름의 러시아 출신 단골 창녀를 찾아가서도, 요하나와의 결혼 첫날밤에 그녀의 위에서 일을 치르던 중에도 목성의 위성이 목성을 도는 괘도에 관한 오류에 대한 방정식이 번쩍 생각이 나 얼른 몸을 일으켜 기어이 떠오른 공식을 종이에 적어놓은 다음에 후반전을 시작했다는 거 아닌가. 확실히 인간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와중에 어떻게 타원을 도는 오차誤差에 관해 궁리를 할 수가 있었는지. 하버드 의과대 다니는 인간들은 연인의 몸을 만지면서도 서로 상대방 피부 속 뼈의 라틴어 이름과 개수를 센다며? 그건 진짜로 뼈의 외곽을 만지니까 그럴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목성의 위성이 어쩌구저쩌구... 1부터 n까지의 수를 더하기 한 합계가 n(n+1)/2 인 것을 밝혀낸 인간이 가우스인데, 그때 나이가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이었다.
  훔볼트로 말하자면 남작의 아들로, 위로 형이 한 놈 있어서 나중에 국가의 고위 공무원이 된 후에 훔볼트 대학을 짓는다. 그러니까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은 이 책의 주인공 훔볼트의 형이, 동생 알렉산더, 알렉시의 눈부신 업적을 보고 질투가 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질투는 지극히 생산적이고 모범적이고 발전적인 질투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질투는 질투니까, 동생보다 더 오래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기 바라는 형이 만든 학교다. 하여간 이 형제들의 바람직한 양육을 위해 어머니가 괴테를 찾아가 아들 키우는 법에 관해 컨설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괴테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니, 아들 형제를 키우는 분들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읽어보시라.


  -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의 다양함을 뚜렷이 보여주는 형제
  - 즉 행위와 향유의 풍부한 가능성들을 가장 모범적인 현실로 만드는 형제
  - 그들의 감성을 희망으로, 정신을 여러 가지 생각으로 충족시키는 하나의 극작품과도 같은 형제.

  로 키우라고 했단다. 근데 문제는 아무도 괴테의 위와 같은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고. 만일 괴테의 이 편지를 가우스에게 보여주었으면 아마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말았을 걸?
  어쨌든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알렉시 훔볼트는, 소년시절에 재능에 있어 자신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형의 악의에 찬 장난으로 죽을 위기를 몇 번 넘긴 다음, 드디어 정확한 세상의 사이즈와 무수한 선들(위도, 경도, 자오선 기타 등등)을 위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드넓은 강과 밀림으로 들어가 진짜로 죽을 고생을 하며 여러 가지 광물과 식물, 심지어 인간 시체의 표본들을 박스에 담아 (스페인 여권으로 떠났으니) 일부는 스페인으로, 일부는 형에게 보내기에 이른다. 훔볼트가 인류학적으로도 흥미가 있었는지, 그는 완전한 나신에 몸에다 갖가지 그림만 그리고 다니는 아마존 여인의 머릿속에 머릿니가 몇 마리 들었는지 세보기도 하고, 화살촉에 발라 이웃한 종족을 쏴 죽인 다음 그 고기를 먹는 식인종에게 독을 얻어 직접 꿀꺽 삼키고는 애매한 몽환 속을 헤매보기도 하고, 날아다니는 새의 똥을 찍어먹어 보기도 하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다닌다. 그것이 괴테의 양육법이 낳은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엽기발랄한 행위를 하고도 끝내 식인종의 만찬 식탁엔 오르지 않고 다시 유럽으로 귀환해 이름이 만방에 떨치니 어찌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괴팅겐을 포격하지 않았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가우스일지언정 그의 초대를 뿌리칠 수 있었으랴.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진짜 재미는 작가 다니엘 켈만이 요소마다 숨겨놓은 유머 코드를 발견하고 함께 낄낄거리는 거라는데,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두 마에스트로를 좇아 서양식 유머를 ‘모두’ 발견하기는 극동의 아시아 사람에겐 조금 무리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는 할지라도 도무지 추천은 하지 못하겠다. 대신 켈만의 다른 소설 <에프>는 한 번 읽어보셔도 무난할 듯하니, 그저 참고만 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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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3-1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닌 이럴 수가...

저도 며칠 전부터 이 책 읽고
있었거든요 놀라워라 ~

다만 <거장과 마르가리타> 읽
느라 미처 못 읽는 사이에 까비...

Falstaff 2020-03-19 10: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 책, 아이디어가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장하고 함께 읽는 건 무리지요. 거장이 워낙 사람을 확 빨아들이는 작품이라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