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복한 가족들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경주.김정하 옮김 / 뿔(웅진)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그동안 읽은 푸엔테스가, <아우라>, <의지와 운명>, 그리고 “미국은 섹스를 한다.”라고 우리말 제목을 뽑았던 <다이아나, 혹은 외로운 사냥꾼>. 네 번째 푸엔테스로 옴니버스 소설 <모든 행복한 가족들>을 골랐다. 푸엔테스는, 눈에 띄면 읽는다. 파나마시티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살며 라틴 아메리카 작가가 늘 그렇듯이 중남미 아메리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기 작품의 무대로 삼는데 당연히 8할이 넘게 멕시코를 배경으로 글을 썼다. 내가 읽은 한도에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 왜 내가 웹 서핑하다 푸엔테스만 발견하면 장바구니로 건져 올리느냐고? 당연히 재미있어서이다. <다이아나, 혹은 외로운 사냥꾼>의 작품해설을 보면,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푸엔테스 스스로가 엄청난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이 카를로스 푸엔테스이며 일인칭 시점으로 쓴 소설이기도 하다. 옴니버스 소설 <모든 행복한 가족들>의 몇 작품에서도 이름은 카를로스가 아니지만 여러 명의 푸엔테스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다 작가의 체험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 생각으로 말하자면, 작가 스스로가 가족 또는 가정생활에 그리 바람직하지 못할 정도의 바람둥이라서 오히려 그런 외도 성향이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정도.
  소설을 읽는 재미. 이것의 상당부분은 당연히 문장에서 나온다. 세 번째 작품이 <매력 없는 사촌>인데, 아내의 사촌 언니 중에 나이 마흔이 넘겼고, 너무 못생겨서 여태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는 더 결혼할 가망이 없는 좀 불쌍한 여자 발렌티나다. 이 여인에게 한 눈에 넘어가는 미남자이자 ‘아내’의 남편이 드디어 발렌티나의 방에 들어 침대에 눕히고 키스를 퍼부으며 하는 말을 잠깐, 아니, 조금 길더라도 인용해보자. 어차피 책이 절판이니 당신이 이 글을 기억하고 있을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우선 내게 1분만 줘. 더 이상은 안 바라. 그런 다음 내게 선물로 한 시간만 줘. 그런 다음 너와 함께 밤을 보내게 해줘. 말하고 또 생각하면서 발렌티나 너의 쏘는 듯한 쓰디쓴 냄새는 나를 미치게 해. 뱀들의 밀림 같은 너의 풀어 헤친 머리 너의 경직된 얼굴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네 수녀 복장 뒤에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그렇게 완전하고 그렇게 동그란 네 벗은 몸의 아름다움, 너는 몸을 숨기기 위한 얼굴을 가졌어. 몸은 가면을 쓸 수 없어. 가면은 몸을 눈부시게 폭로해 버려. 발렌티나, 넌 그걸 알아. 얼굴을 가리지 마. 몸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얼굴, 그것이 너의 비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 감히 너의 옷을 벗기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널 상상했겠어? 네게 나를 데려온 사람은 발렌티나 네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지금부터 온 사람은 나야. 너를 발견하고 너로부터 더 이상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너의 마법에 걸린 나 헤수스 아니발,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기다리며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조용히 그렇게 인내한 너를 발견한 것 때문에. 발렌티나, 이거 알아? 진실은 나를 죽이고 있었고, 너와 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기만이라면 그땐 거짓이 내게 삶을 주는 나의 삶이야. 나의 사랑 나의 여인 초조해하며 기다려 왔던 발렌티나 소로야, 네가 날 떨리게 하는 것을 알고 있니, 날 미치게 하는 것을, 사촌 발렌티나 널 갖게 될 때 내 안에 생기는 부드러운 야수성을? 너와 나 사이에 일어나 이것 때문에 넌 나를 미워할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날 싫어하면 할수록 난 널 더욱더 사랑할 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아무것도 해명하려 들지 마. 그냥 받아들이면 돼. 너라는 자체로 나를 사로잡았어. 너는 내가 알지 못했던 기쁨이야 네 시간이 회전할 때마다 텅 비어 있던 내 영혼의 모래시계가 채워져, 발렌티나. 우리 두 사람 서로 떨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워, 나의 사랑. 날 함부로 대해 봐. 그러면 네가 나에게 아무리 상처를 줘도 너는 네가 내게 주는 행복을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네 모두를 키스하고, 발부터 머리까지 키스하면서 너를 순례할 거야. 네 인생의 처음도 마지막도 되고 싶지 않아. 유일하고 싶어. 사촌 발렌티나,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고질적인 사랑이야. 너의 폭로는 나를 고집쟁이 헤수스로 만들어버려. 네가 날 버린다면 난 평안 없는 날들만 맞이하겠지. 넌 내 평화이고 나의 자유, 나의 배꼽, 나의 손톱, 나의 영양분, 나의 꿈. 발렌티나, 너는 나를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양심, 의무, 신의, 습관의 짐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줘. (헥헥... 이제 문단의 한 사분의 일 썼다. 더는 못 쓰겠다.)”


  제목 그대로 행복한 가족들에 관한 열여섯 개의 스케치, 또는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을 넘기면 “행복한 가족들은 모두 서로 비슷하게 닮아 있다. 그러나 불행한 가족들은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 적혀 있다. 그러나 우리의 푸엔테스는 위에 내가 길게 인용한 사랑의 속삭임을 처사촌 언니에게 퍼부은 가족의 장남이자 회계사인 헤수스 아니발처럼 ‘가족’의 구분이 대단히 애매모호해서, 작가가 계속해서 “행복한 가족들”이라고 주장하는 가족의 구성원들이 매우 색다른 조합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행복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서로 행복하기 위해 “각기 나름의 이유가 있는” 모습을 보인다.
  52세에 회사로부터 명예퇴직을 당한 가장 파스토르 파간 씨에게는 대학 다니다가 도무지 학문에 뜻을 세우지 못해 중도작파하고 하필이면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 취업해 잠깐 잘 나가다가 거렁뱅이가 된 후 다시 돌아와 부모의 육아낭으로 쏙 들어온 아들 아벨 캥거루와 국내선 스튜어디스를 비롯해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역시 부모네 집 꼭대기 좁은 다락방에 박혀버린 딸 알마 캥거루와 함께 살게 된다. 파간 씨의 아내 엘비라는 젊은 시절 꽤 유망한 볼레로 가수였는데 파간 씨를 만나는 바람에 꿈을 접고 육아와 가사에 전념했으며 이제 다시 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먼 먼 시절을 되돌려보면서 열심히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푸엔테스는 첫 번째 작품으로 이 가족을 소개하며 행복한, 어쨌든 안정되고 행복한 가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에 길게 인용한 시사촌 언니 꼬드겨 애인으로 삼는 것이 네 번째 작품이고, 심지어 동거 40년 만에 둘 사이에 새로운 남자가 비집고 들어오는 남성 동성애 커플도 있는데, 새로운 젊은 남자에서 상대방의 젊은 모습을 발견했다고 하니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옴니버스 소설은 읽기엔 재미있다. 그런데 일관된 뚜렷한 발자국이 없어서 정작 다 읽은 다음에는 또 별로 남는 게 없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은 그러나 열여섯 작품이 모두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심지어 장군이 국가에 반역을 한 장남과 장남이 숨어 있는 현장을 고발한 차남 이야기 같은 것까지, 원래 출판사 [뿔>이 숱한 문학작품을 절판시키기는 했지만, 이 책의 출간 포기를 아쉽게 생각하게 만든다.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 당연히 아니면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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