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좀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몇 명의 작가가 있다. 이름난 명작, 걸작들을 생산한 위대한 작가가 아닐지언정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거나, 반대로 가슴 속으로 바람이 한 번 휙 불어오는 사람들. 나도 생각나는 대로 몇 명을 떠올리면 윌리엄 트레버, 메릴린 로빈슨, 율리 체 그리고 윌라 캐더와 오정희가 그렇다. 장대한 스토리가 아니라 독자의 감정선을 안타깝게 자극하는 작가들.
<로스트 레이디>. 본문만 185쪽. 짧은 소설이라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다. 하기는 캐더의 작품치고 캐더 문장의 맛과 멋을 흠향할 수 있게 번역만 했다면 어떤 것이든지 손에서 떼기 힘들기는 하다. 캐더의 나이 오십 세, 작가로 절정기에 달했을 때 쓴 작품이다. 당연히 지역주의 작가답게 광활하고 거친 서부 지역을 무대로, 포레스터 플레이스라는 명칭의 저택에 사는 부부의 흥망성쇠가 어려서부터 이들과 친밀하게 지내다가 청년으로 성장하는 닐 허버트라는 이름의 소년/청소년/청년과의 관계로 그린 작품. 로스트 레이디, 즉 잃어버린 숙녀는 포레스터 플레이스의 여주인 메리언 포레스터를 의미한다.
짧은 소설이고 아주 재미있다. 그러니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선에서 독후감은 마치고 싶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란 한 마디로 충분하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메리언 포레스터를 묘사하는 장면 한 컷.
“그녀의 눈이 웃으면서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눈빛은 상대가 아직 세상에서 발견하지 못한 강렬한 환희를 약속하는 것만 같았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이 1923년. 이때 F.S. 피츠제럴드는 작품 하나를 쓰고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의 초안을 쓰고 있을 당시 작품 안에 피츠제럴드는 이런 묘사를 이미 써놓았다.
“슬프면서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은 반짝이는 눈과 열정적으로 빛나는 입술처럼 눈부신 것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설레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작품을 쓰고 있던 피츠제럴드가 <로스트 레이디>를 읽었고, 이왕에 자신이 사용한 위 문장이 윌라 캐더의 문장과 소위 “문장의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 또는 문장 역시 특허와 비슷해서 먼저 발표한 사람이 우선권을 갖는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직접 고안해 낸 문장을 ‘유사성’ 때문에 삭제하기가 싫었다. 그는 ‘링 라드너’라는 출판계 사람을 비롯해 여러 명에게 두 글을 보여주고 토의한 끝에 <위대한 개츠비>에 삽입하기로 한다. 동시에 윌라 캐더에게 편지를 보내 지금 인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작품 <위대한 개츠비>에 이런 문장이 들어갈 것이며, 캐더가 <로스트 레이디>를 발표하기 전에 쓴 것임과, 그것을 결정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낸다. 물론 위의 두 문장과 함께.
이에 윌라 캐더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보았고, 참 좋았으며, 읽는 도중에 피츠제럴드의 문장 속에서 한 번도 <로스트 레이디>를 연상하지 못했다는 답장을 보낸다.
난 <위대한 개츠비>를 별로 인상 깊게 읽지 못했다. 그래 호밀밭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번역으로 꼭 한 번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내가 읽은 개츠비가 누구 번역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건 그거고, 하여튼 작가라면 이래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만든 문장이 이미 나와 있는 문장과 비슷하면 그것이 활자화되기 전에 의견을 첨부해 확실하게 표절, 글 도둑질이 아니라 문자적 유사성임을 밝히는 것. 위에 쓴 것들 모두 <로스트 레이디>의 첨부, 즉 부록에 나온 이야기다.
이 독후감 쓰다가 마음이 좋지 않아 쐬주 한 병 깠다. 그래서 이하는 음주 독후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15년에 미시마 유키오, 정확하게 얘기해서 그의 작품을 번역한 우리나라의 품격있는 시인이 시적으로 표현한 구절을 그대로 ‘따다 붙인’ 신영숙이 신간을 냈다. 정말 경악스러운 건... 여기서 잠깐. 영숙이가 따다 붙인 일은 그러려니 하더라도, 그이를 발굴했다시피 했고, 영숙이의 특기인 백반 한 상으로 저녁밥을 먹었는지 어땠는지, 대한민국의 대표적 양심이라고 일컬어지던 백악청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 ‘창피’가 이를 “문자적 유사성”이라고 아싸라비아 달달하게, 혹은 딸딸하게? 주장하던 일이 기억난다.
소설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통탄할 것이 많고 많지만, 다른 출판사도 아니고 하필이면 내 지나간 청춘 시절에 그리도 믿고 믿었던 ‘창피’, 예전 말로 하자면 출판사 “창작은 개피”에서 영숙이의 붙여넣기를 “문자적 유사성”이라고 면죄부를 줄 수 있었느냐 하는 거다. 창피의 명예는 개가 물어갔다. 백악청과 창피는 영숙이가 하루는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수염이 허연 산신령이 나타나 “즐거움을 아는 몸”이란 구절을 일러주었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근데 영숙이가 2015년, 그 난리를 겪고 겨우 6년 만에 새롭게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니?>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미친다. 6년 전에 크게 떠들썩했을 테니 이번엔 문자적 유사성은 없겠지. 근데도 안 될 일이다. 누가 아는가. 즐거움을 아는 몸 이후에 나는 영숙이의 데뷔작부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느 한 작품을 막론하고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작품? 작품 좋아하네,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글에 대해 의심이 들었던 것. 누가 알아 그걸. 영숙이가 좋아했던 필사노트 속에 숨겨놓은 무수한 주옥같은 문장들이 얘가 쓴 글 속에 이리저리, 조금씩 토씨만 바꿔 등장하고 있는지 말이지.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영숙이가 쓴 모든 글은 도무지 믿지를 못하겠더라는 얘기다.
읽어보고 얘기하라고? 2015년에 난 책장에서 영숙이가 쓴 책 일곱 권인가를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다. 데뷔작 <외진 방>부터 시작해 <깊은 아픔>, <풍선이 있던 자리>, <기차는 일곱 시 반에 떠나네> 등등. 어떻게 알아? 이것들 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문자적 유사성이 도처에 숨어 있는지? 표절은 글만 도둑질하는 게 아니다. 나처럼 애먼 독자들의 지갑도 털어가는 진짜 도둑질이기도 하다.
참 나쁜 사람이다. 진정한 사과? 숱한 사람들이 이걸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데, 나는 이거야말로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사과가 뭐야? 영숙이 같은 경우에, 만일 진정한 사과라는 것이 있다면, 붓을 꺾는 일일 듯. 그러나 매몰차게 절필을 요구하지는 않겠다. 여태까지 자기가 작가인줄 착각하고 있던 사람한테 글을 쓰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혹독하니까. 단, 조건이 글을 쓰건 말건,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걸 하건 말건, 글을 써서 아직도 영숙이를 찬양하는 집단들하고만 나눠 보라는 거다. 안 쓰면 죽을 거 같다니까. 죽지 말아라. 쓰고, 쓰고 또 써라. 근데 밖에 내놓지는 말라.
참 대단하다, 대단해. 뭐? <아버지에게 갔었니?>라고? 그걸 출판해주는 출판사가 창피라고? 우아.... 또 그걸 읽고, 물론 출간 전 서평단인가 뭔가지만 말이지, 온갖 온라인 책 가게 서평란에서 별 다섯 개 만점을 때리는 독자들까지. 도대체 얼마나 더 속아야 정신을 차릴 건지.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