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촌 - 이기영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8
이기영 지음, 조남현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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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네 편의 단편소설을 엮은 책. 앞뒤 따지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게을러서 다 늦게 대표작 이기영의 <고향>을 읽어보고 언젠가 단편집도 꼭 찾아보겠다, 결심했다가 이번에 읽었다. 열네 편 어느 하나 빠짐없이 말 그대로 카프 문학이다. 크게 나누어 소작을 짓는 빈농, 도시 소시민 가운데서 억지로라도 먹고는 사는 쁘띠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공장 노동자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렇게 세 부류의 주인공이 등장해 소작쟁의를 일으키거나 도모하고, 도시 소시민의 삶을 자조하고, 파업을 준비한다.
  물론 시대가 바뀌어 더 이상 진한 감흥은 없지만 1920년대, 30년대에 읽었다면 짜릿한 의식화 교재로 사용했을 수도 있겠다. 카프 문학이 흔히 그렇듯이 무산자와 동경유학을 다녀온 인텔리겐치아는 거의 조건 없이 선하고, 부르주아 가운데 인텔리겐치아를 제외한 모든 족속들은 무산자들이 생산한 것을 수탈해 배를 불린다. 배만 불리는 것을 넘어 무산자의 딸과 유부녀의 성을 착취하기도 한다. 카프 문학 자체가 사회주의적 시각으로 봐서 다분히 계몽적인 성격을 띠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런 단순한 이분법은 책 읽기를 식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소작인 가운데 주인공을 맡은 이는, 경성유학을 한(이상도 하지, 경성유학생은 악랄한 아비 지주보다 한 술 더 뜨는 악독한 세습지주인 반면, 동경유학생은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준 혁명가 같다. 이이가 동경유학을 해서 그런지는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지주 아들하고 같은 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지주의 아들보다 더 총명했으며, 시류에 밝고, 무엇보다 체격과 체력이 걸출하고 생각하는 바가 애초부터 정의파다. 정의파로 말할 거 같으면 첫 번째로 실린 <농부 정도룡>의 주인공 정도룡이 특히 그런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새 세상을 만든다는 정감록의 정도령이라도 되는 듯이, 소작이 떼인 이웃에게 자신의 소작논을 짓게 하고 지주에게 쫓아가 새 땅을 내놓으라고 닦달을 할 정도의 뱃심이 있는 자다.
  많은 주인공들이 지주에 대항해 그들이 저지른 비행을 탄핵하거나 소작쟁의를 선동하지만 어쨌든 당시의 율법과 법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장리쌀 두 섬에 동생을 지주의 첩으로 보내야 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민촌>), 가뜩이나 병든 몸이 먹지를 못해 굶어죽기도 한다(<아사>).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이 어떤 내용인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것. 소작쟁의든 공장 파업이든, 그것들이 발생하는 과정과 굳건한 단결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것들. 지주와 도시 부르주아들에 의한 노동자, 농민의 노예화 현상을 스케치한 작품들, 사회주의자를 등장시킨 운동 소설, 그리고 생계 능력에 관한 한 별 볼일 없는 인텔리 이야기로 구분할 수 있겠다.  물론 읽으면 안 읽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이기영이 그리도 소원했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70년의 생명을 끝내고 안녕을 고한 지금, 설마 이 책을 아직도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의 책이라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 식민지 시절의 국민의 노예화 과정과 현상, 도시에서 지식인들의 좌절을 알고 싶다면 좋을 듯하다.
  이기영의 시각도 좀 문제가 있다. 무대가 1920년대 이후라고 한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소작인들이 좋았던 시대라고 여러 작품에서 자주 언급하는 시절이 구한말이다. 비록 무너지고는 있었지만 봉건 양반들과 지배계급에 의한 수탈이 저질러지던 신분사회를 그리워하는 것도 의아스럽다. 아무리 검열 때문이라고 해도 그렇지 농민들이 최악의 환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인 식민지 현상에 관해서도 입도 벙긋하지 않는 건 유감스러울 뿐이다.
  어쨌든 <고향>과 단편집을 읽었으니 이것으로 이기영 졸업장을 받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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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인간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4
궈스싱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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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궈스싱에 관해서는 2018년에 간략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1952년에 중국의 대표적인 바둑 명가에서 태어났으나 바둑에는 별로 자질을 보이지 않았던 궈스싱은 1979년에 북경만보에 수습 기자로 들어가 연극비평을 쓰기 시작해 15년간 천여 편의 연극을 관람한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극에 관한 일가견이 생긴 궈스싱은 자연스럽게 직접 희곡을 쓰기에 이르러 현재는 중국을 대표하는 부조리극 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물고기 인간>과 <청개구리>는 우리나라에서 낭독공연 형식으로 무대에 올려진 바 있으니 현대 동아시아의 대표 희곡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불러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해설을 보면 궈스싱의 작품 가운데 <물고기 인간>, <새 인간> 그리고 <바둑 인간> 이렇게 세 편을 한량閑良 시리즈라 하는 모양이다. 대개 한량이라고 하면 “일정한 직업 없이 놀고먹는 말단 양반계층” 즉 룸펜 부르주아를 말한다. <새 인간>은 안 읽어봐서 모르겠는데, <물고기 인간>과 <바둑 인간>만 보고 얘기하자면, 한량 시리즈라기보다 초절정 고수 또는 초절정 마니아 시리즈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물고기 인간>에선 큰 저수지 대청호에서 30년에 한 번 기회가 있다는 전설적인 물고기 대청어를 낚기 위한 ‘낚시의 신’이, <바둑 인간>에선 바둑에 미쳐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가는 줄도 모르고 이제 그 여인이 낳은 새로운 바둑 영재와의 마지막 한 판 승부를 겨루는 최고의 바둑 고수 허윈칭이 등장하는데, 암만 봐도 이들이 룸펜인 건 맞지만, 부르주아 비슷하지는 않다.
  궈스싱의 작품을 부조리극이라고 해도, 베케트나 이오네스코, 엘비 같은 극작가를 연상할 필요는 없다. (이 사람들의 작품을 읽어봐 극작가들의 이름을 인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뭐 이들을 연상한다고 해도 이제 부조리극이란 타이틀 때문에 미리부터 쫄 독자도 없을 터이긴 하지만.
  큰 줄거리는 위에서 잠깐 짚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은 역시 중국 최고의 바둑 고수로 보이며 이제 갓 60세에 진입한 허윈칭(何雲淸 구름이 어찌 맑으랴?). 이이의 상대역은 30년 전 옛사랑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스무 살 먹은 아들 쓰옌(司炎). 이름 옌炎, 불이 아래위로 두 개나 있다. 그러니 얼마나 뜨겁겠는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아 병이 된 청년. 겨우 스무 살에 산더미 같은 책을 다 독파하고도 사는 의미를 별로 찾을 수 없는 고독하고 불행한 천재. 과학연구소에서도 머리 좋은 건 알겠지만 쓰옌이 생각하는 걸 너무도 좋아해서 받아주지 않았을 정도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뇌세포가 자꾸 증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기 위해 복잡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야 한단다. 그래 쓰옌이 생각해낸, 가장 복잡하게 경우의 수를 따지는 작업이 바로 바둑.
  그러나 쓰옌의 엄마 쓰후이(司慧)는 이름 후이慧같이 전혀 지혜롭지 못해 평생 30년 전의 첫애인 허윈칭이 바둑에 너무 몰두해 자신을 위한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은 것을 한으로 지니고 살았다. 그러니 아들이 아무리 뇌세포가 무한 증식한다고 해도 바둑을 허락하지 않을 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쓰후이는 그걸 넘어서 옛 애인과 죽은 남편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돌봄을 아들에게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쓰후이가 허윈칭을 찾아와 아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주지 않도록 요구하자, 허윈칭은 쓰옌과 바둑 대결을 벌여 (쓰옌이 먼저 두 점을 깔고), 자신이 이기면 쓰옌은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고 어머니를 지성껏 돌보기로 맹세를 한 후 드디어 마지막 대국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국의 장면이 흥미롭다. 두 바둑 기사가 단기필마로 장창을 빗겨 들고 단판 승부를 벌이는 걸 관람하는 등장인물, 바둑광인 작가 '마구잡이'의 말 그대로 장판파에서 헌 칼로 조조의 친조카 하후은을 비롯한 조조군 병사 도륙내는 광경을 그리는 듯이 흥미진진하다. 허윈칭이 궁지에 몰리자 급격하게 신경을 쓰는 바람에 코피가 터지고, 필살기를 구사하는 초절정 고수들의 칼부림이 흥미진진 긴박하다.
  이 장면이 마지막 막인 4막 1장. 여기까지 오느라고 독자는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부조리극이란 걸 잠깐 잊었을 수도 있다. 부조리 극작가, 이오네스코나 올비, 그리고 베케트의 작품이 행복하게 마감하는 거 보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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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6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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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꼰대다. 꼰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고정관념이 한 번 박혔다하면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것. 키플링의 작품으로는 딱 한 권의 장편소설 <킴>을 읽었을 뿐. 그리고 곧바로 이이를 식민주의자, 국가주의적 애국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킴>이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낌새가 마땅하지 못했던 것. 그리하여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친애하는 서재 친구 잠자냥 님의 낚시에 걸려서였을 뿐이다. (원래 이이의 낚시 기술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라서 '꾼'을 넘어 도사의 경지이긴 하지만.)
  근데 이 책으로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에 관해 생각이 바뀐다. 나는 처음엔 당연히 키플링이라고 하면 <정글북> 같은 아동 소설가로 생각했다가, <킴>으로 위에 쓴 고정관념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진짜 예상 외로 키플링의 이 단편소설집을 읽고 생각을 좀 바꾸기로 했다. 이이가 정치적으로 국수주의자에다가 제국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식민주의자인 것은 맞지만, 소설가로 그의 작품에 한해서 얘기하자면, 키플링은 아동 소설가는 물론 아니고, 작품 속에 애국주의적인 분위기가 좀 있는 그냥 소설가,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에서 자신의 반짝이는 재능을 더욱 꽃피운 작가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 책은 키플링이 열아홉 살 때 쓴 작품 <백 가지 슬픔의 문>에서 시작해 작품을 쓴 순서대로 예순한 살 때의 작품 <알라의 눈>까지 스물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다. 그러니 그의 전 생애를 걸친 작품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텐데, 가장 놀랐던 것은 참 다양하다는 것. 저 잉글랜드의 전통 고딕소설부터 시작해 언뜻 에드가 포를 연상할 수 있는 괴기극도 있다가, 인간 본성 속에 든 권력욕을 조망하기도 하고, 순진한 어린아이의 심성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비뚤게 만들어버리는 교조적 기독교 교육 같은 것도 있고, 헨리 제임스가 쓴 <나사의 회전>과 유사한 혼령이 등장하는 어려운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그야말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명멸했던 온갖 소설장르를 한 권의 책으로 다 즐길 수 있다.
  이 가운데 재미있게 또는 공감이나 감정이입을 해가며 읽은 작품 세 개를 꼽는다면 첫째가 <매애, 매애, 검은 양>, 둘째가 <‘그들’>이요 셋째가 표제작이기도 한 <왕이 되려 한 남자>이지만 다른 것들도 이들과 견줄 수 있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단편집 좀 읽은 독자들도 키플링의 이 단편집처럼 고르게 수준 있는 것들만 골라 실은 책은 발견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키플링의 단편들이 내 취향은 아니다. 단편의 경우에 나는 작년에 우연히 발견한 독일 여자 유디트 헤르만의 《단지 유령일 뿐》 같은 지극한 심리소설을 좋아한다. 키플링은 헤르만과 거의 반대편에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단편소설의 결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키플링은 충분히 즐길 만했고, 즐겼다.
  이이는 인도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보내고, 부모와 떨어져 영국에서 학교를 다닌다. 이때 자신의 경험 일부를 <매애, 매애, 검은 양>에서 묘사한 것일 수도 있을 텐데, 학교를 마치고는 기자 신분으로 다시 인도로 가 7년을 보낸다. 그래서 그랬는지 작품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의 원시성이 뚝뚝 떨어지는 날것의 단어들이 곧바로 시각을 자극하기도 하는 반면, 영국을 무대로 해서는 문제적 작가 피터 애크로이드를 읽는 것처럼 삶의 비의나 역사 이면의 오리무중(알라의 눈)을 헤매는 혼돈을 그려내기도 하니, 그의 다양한 문법은 말 그대로 종횡무진이다.
  그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이 19세에서 61세까지 무려 42년에 걸쳐 쓴 것으로, 식민지와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전쟁 중에 아들을 먼저 보낸 작가의 파란만장이 다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야 짧은 시간에 세월을 휙 지나갈 수 있으나 작가는 한 시간, 한 시간 속에 자신의 모든 성취와 실수와 후회와 안타까움과 사랑과 질투와 미움과 그냥 그런 순간들로 채웠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사실 독자라는 것, 책을 사서 읽는 일이 얼마나 큰 특권이냐는 말이지. 작가라는 이름의 인간들은 오직 독자를 위해 그리 오랜 세월의 경험과 축적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면 우리는 그냥 읽고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이 독후감을 읽어주신 분들이여, 오랜만에 만나는 일품 뷔페,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의 일독을 미루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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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8 09: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단편집 정말 물건이죠? ㅎㅎ 저의 낚시에 걸려서 좋은 책을 만나신 듯하여 뿌듯합니다. 제 낚시 솜씨도 인정해주시니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아무튼 저도 이 단편집으로 키플링을 다시 봤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 단편집을 만나서 그런 행운을 누리시길~!

Falstaff 2021-03-08 09:41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런 책만 미끼로 걸어주시면 황공무지입지요!
덕분에 좋은 책,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책을 좀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몇 명의 작가가 있다. 이름난 명작, 걸작들을 생산한 위대한 작가가 아닐지언정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거나, 반대로 가슴 속으로 바람이 한 번 휙 불어오는 사람들. 나도 생각나는 대로 몇 명을 떠올리면 윌리엄 트레버, 메릴린 로빈슨, 율리 체 그리고 윌라 캐더와 오정희가 그렇다. 장대한 스토리가 아니라 독자의 감정선을 안타깝게 자극하는 작가들.

  <로스트 레이디>. 본문만 185쪽. 짧은 소설이라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다. 하기는 캐더의 작품치고 캐더 문장의 맛과 멋을 흠향할 수 있게 번역만 했다면 어떤 것이든지 손에서 떼기 힘들기는 하다. 캐더의 나이 오십 세, 작가로 절정기에 달했을 때 쓴 작품이다. 당연히 지역주의 작가답게 광활하고 거친 서부 지역을 무대로, 포레스터 플레이스라는 명칭의 저택에 사는 부부의 흥망성쇠가 어려서부터 이들과 친밀하게 지내다가 청년으로 성장하는 닐 허버트라는 이름의 소년/청소년/청년과의 관계로 그린 작품. 로스트 레이디, 즉 잃어버린 숙녀는 포레스터 플레이스의 여주인 메리언 포레스터를 의미한다.

  짧은 소설이고 아주 재미있다. 그러니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선에서 독후감은 마치고 싶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란 한 마디로 충분하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메리언 포레스터를 묘사하는 장면 한 컷.

  “그녀의 눈이 웃으면서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눈빛은 상대가 아직 세상에서 발견하지 못한 강렬한 환희를 약속하는 것만 같았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이 1923년. 이때 F.S. 피츠제럴드는 작품 하나를 쓰고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의 초안을 쓰고 있을 당시 작품 안에 피츠제럴드는 이런 묘사를 이미 써놓았다.

  “슬프면서도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은 반짝이는 눈과 열정적으로 빛나는 입술처럼 눈부신 것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설레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작품을 쓰고 있던 피츠제럴드가 <로스트 레이디>를 읽었고, 이왕에 자신이 사용한 위 문장이 윌라 캐더의 문장과 소위 “문장의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 또는 문장 역시 특허와 비슷해서 먼저 발표한 사람이 우선권을 갖는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직접 고안해 낸 문장을 ‘유사성’ 때문에 삭제하기가 싫었다. 그는 ‘링 라드너’라는 출판계 사람을 비롯해 여러 명에게 두 글을 보여주고 토의한 끝에 <위대한 개츠비>에 삽입하기로 한다. 동시에 윌라 캐더에게 편지를 보내 지금 인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작품 <위대한 개츠비>에 이런 문장이 들어갈 것이며, 캐더가 <로스트 레이디>를 발표하기 전에 쓴 것임과, 그것을 결정하기까지 과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낸다. 물론 위의 두 문장과 함께.

  이에 윌라 캐더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보았고, 참 좋았으며, 읽는 도중에 피츠제럴드의 문장 속에서 한 번도 <로스트 레이디>를 연상하지 못했다는 답장을 보낸다.

  난 <위대한 개츠비>를 별로 인상 깊게 읽지 못했다. 그래 호밀밭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번역으로 꼭 한 번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내가 읽은 개츠비가 누구 번역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건 그거고, 하여튼 작가라면 이래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만든 문장이 이미 나와 있는 문장과 비슷하면 그것이 활자화되기 전에 의견을 첨부해 확실하게 표절, 글 도둑질이 아니라 문자적 유사성임을 밝히는 것. 위에 쓴 것들 모두 <로스트 레이디>의 첨부, 즉 부록에 나온 이야기다.



  이 독후감 쓰다가 마음이 좋지 않아 쐬주 한 병 깠다. 그래서 이하는 음주 독후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15년에 미시마 유키오, 정확하게 얘기해서 그의 작품을 번역한 우리나라의 품격있는 시인이 시적으로 표현한 구절을 그대로 ‘따다 붙인’ 신영숙이 신간을 냈다. 정말 경악스러운 건... 여기서 잠깐. 영숙이가 따다 붙인 일은 그러려니 하더라도, 그이를 발굴했다시피 했고, 영숙이의 특기인 백반 한 상으로 저녁밥을 먹었는지 어땠는지, 대한민국의 대표적 양심이라고 일컬어지던 백악청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 ‘창피’가 이를 “문자적 유사성”이라고 아싸라비아 달달하게, 혹은 딸딸하게? 주장하던 일이 기억난다.

  소설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통탄할 것이 많고 많지만, 다른 출판사도 아니고 하필이면 내 지나간 청춘 시절에 그리도 믿고 믿었던 ‘창피’, 예전 말로 하자면 출판사 “창작은 개피”에서 영숙이의 붙여넣기를 “문자적 유사성”이라고 면죄부를 줄 수 있었느냐 하는 거다. 창피의 명예는 개가 물어갔다. 백악청과 창피는 영숙이가 하루는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수염이 허연 산신령이 나타나 “즐거움을 아는 몸”이란 구절을 일러주었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근데 영숙이가 2015년, 그 난리를 겪고 겨우 6년 만에 새롭게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니?>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미친다. 6년 전에 크게 떠들썩했을 테니 이번엔 문자적 유사성은 없겠지. 근데도 안 될 일이다. 누가 아는가. 즐거움을 아는 몸 이후에 나는 영숙이의 데뷔작부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느 한 작품을 막론하고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작품? 작품 좋아하네,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글에 대해 의심이 들었던 것. 누가 알아 그걸. 영숙이가 좋아했던 필사노트 속에 숨겨놓은 무수한 주옥같은 문장들이 얘가 쓴 글 속에 이리저리, 조금씩 토씨만 바꿔 등장하고 있는지 말이지.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영숙이가 쓴 모든 글은 도무지 믿지를 못하겠더라는 얘기다.

  읽어보고 얘기하라고? 2015년에 난 책장에서 영숙이가 쓴 책 일곱 권인가를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다. 데뷔작 <외진 방>부터 시작해 <깊은 아픔>, <풍선이 있던 자리>, <기차는 일곱 시 반에 떠나네> 등등. 어떻게 알아? 이것들 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문자적 유사성이 도처에 숨어 있는지? 표절은 글만 도둑질하는 게 아니다. 나처럼 애먼 독자들의 지갑도 털어가는 진짜 도둑질이기도 하다.

  참 나쁜 사람이다. 진정한 사과? 숱한 사람들이 이걸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데, 나는 이거야말로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사과가 뭐야? 영숙이 같은 경우에, 만일 진정한 사과라는 것이 있다면, 붓을 꺾는 일일 듯. 그러나 매몰차게 절필을 요구하지는 않겠다. 여태까지 자기가 작가인줄 착각하고 있던 사람한테 글을 쓰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혹독하니까. 단, 조건이 글을 쓰건 말건,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걸 하건 말건, 글을 써서 아직도 영숙이를 찬양하는 집단들하고만 나눠 보라는 거다. 안 쓰면 죽을 거 같다니까. 죽지 말아라. 쓰고, 쓰고 또 써라. 근데 밖에 내놓지는 말라.

  참 대단하다, 대단해. 뭐? <아버지에게 갔었니?>라고? 그걸 출판해주는 출판사가 창피라고? 우아.... 또 그걸 읽고, 물론 출간 전 서평단인가 뭔가지만 말이지, 온갖 온라인 책 가게 서평란에서 별 다섯 개 만점을 때리는 독자들까지. 도대체 얼마나 더 속아야 정신을 차릴 건지.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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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1-03-06 09: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전 더 비싸게 해외배송 받아서 그녀의 소설, 다 샀던 사람입니다.
불쏘시개로 쓸려고 해도 건조한 곳에 살면서 자칫 산불낼까 두렵고
돈 너무 아까와서 재활용통에 넣지도 못하고.
천불나는데 안타깝게 술도 못 마시는 나는 어쩌라고.

그녀 이후 한국소설, 아예 안 삽니다.
저도 Willa Cather 좋아합니다. 책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다시 산 책도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강제로 읽었던 Great Gatsby, 문장, 구절구절 예술이라
요샌 손에 달고 삽니다. 이건 내용이 아니라 글 자체가 눈 앞에 그림을 그려줌.

귀신 시나리까먹는 소설에 미쳐 있는데 님의 책에 관한 글,
무지 재미있습니다.

Falstaff 2021-03-06 09:56   좋아요 2 | URL
아이고 저런.... 그걸 해외배송으로 사 읽으셨군요!
저도 우리 소설을 멀리하게 돼 마음이 많이 캥깁니다. 더 읽어야 할 텐데 도무지 선택하기가 힘들어서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1-03-06 10: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그나저나 영숙이 작품 이름 ㅋㅋㅋㅋㅋㅋㅋㅋ 본디 제목보다 더 맛깔나는구먼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3-06 10:31   좋아요 3 | URL
영숙이는 바보같고, 창피는 철면피 같아요. ㅋㅋㅋ
아, 안타까운 제목이 깊은 하품이었는데, 하품이라 ‘픔‘자 라임에 맞지 않아서 정말 아깝게 탈락했답니다.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3-06 1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로스트 레이디 리뷰는 정말 기분 좋은데, 이후 리뷰는 정말 안타깝네요. 폴스타프님의 분노가 느껴집니다 ㅜㅜ

Falstaff 2021-03-06 10:33   좋아요 4 | URL
영숙이 땜에 맘 상한 독자들이 어디 한두 명이겠습니까.
그중에 제일 심하게 아파야 할 독자가 왕년의 팬들이겠지요. 이런 배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유독 창피가 미운 이유입니다.

레삭매냐 2021-03-06 10:3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제 창피 책을 산 제가 더 창피하네요... 그전에 영숙이 사태 와중에 창피가 약속한 게 지켜졌나요? 독자들을 금붕어로 아나 봅니다.

영숙이는 노답입니다.
그간 뻔뻔함을 씨게 장착했나 봅니다.

가제본 받고 별점테러하는 이들은 6년 전에 무슨 일은 있었는 지 잊은 걸까요.

Falstaff 2021-03-06 10:36   좋아요 5 | URL
영숙이는 뻔뻔함이라기 보다 과하게 멍청한 거 같아요. 눈치도 없고 말입죠.
정말 웃긴 곳은 창사이래 현재까지 자칭 진보와 정의의 사도라고 외치고 있는 창피 애들 아녜요? 진보와 정의도 영숙이가 벌어다 줄 현금을 이길 수 없는 거 같아 더 씁쓸...

청아 2021-03-06 11: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엄마에게 부탁해봐> 하나 버렸는데
그나마 다행이네요. 엄청 울었는데 저도 혹 복붙에 울었을까 바보된 기분. 계속 다른 작품 보려고 하니 일이 터졌었죠. 일곱권이라..7병은 필요하셨을것 같아요. 덕분에 속이 후련해요!!

Falstaff 2021-03-06 11:14   좋아요 3 | URL
미미님도 버리셨군요!
근데 바로 그해, 창피가 미미님이 버리신 그 책을 주워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전시했다는 거 아닙니까!! 대단한 창핍니다.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3-06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숙이가 누굴까 했는데... 책 제목...
미시마 유키오... 백악청...ㅋㅋ
저는 원래 이 작가 싫어했어요
아주 오래전에 <인물과 사상>지에서 초등학생이 이 작가 글을 비판하는 글 읽고 통쾌했던 생각이 나네요.
<엄마를...>읽고 So what?했습니다.
음주 독후감이 재미있고 시원합니다.

Falstaff 2021-03-06 14:59   좋아요 3 | URL
ㅎㅎㅎ 영숙, 악청. 이런 현상을 우리는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이라고 합지요.

전 데뷔작부터 별로였어요. 분명히 누군가(안 알려드림!)의 뛰어난 작품(안 알려드림!), 이 가운데 절정의 장면을 패러디했는데 도무지 마음이 께름칙하더라고요.
영숙이 책은 주로 선물을 받았습니다. 얘가 자필로 제게 주겠다고 서명까지 해서 들어온 것이 일곱시 반에 떠난 기찬데요, 그 책을 읽고 완전히 손절했습니다. 불량식품은 먹지 않겠다! 라고 작정했던 것이지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동두천 문학과지성 시인선 9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7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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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한자어는 모두 한글로 바꾸고, 띄어쓰기 없이 한자어를 작은 글씨로 이어 썼다.



  시인 김명인은 1946년생. 다섯 살 때 한국전쟁을 만나 역사적 기록이 되기도 했던 50~51년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을 경험했다. 울진이 고향이라 태평양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웠을 것 같지만 추위와 주림의 경험은 바다의 이미지를 삼각파도와, 구겨지는 모랫벌과 찢겨 지나가는 푸른 깃대와, 귓뺨을 후려치는 파도와, 방파제 끝에서 뒤집히는 파도와, 흩어진 암초와, 부서지는 물거품과, 얼음보다 차갑게 비벼대는 물보라와, 모래를 몰고 와 온몸에 끼얹는 바람과, 여태 돌아오지 않는 어부들과, 살갗에 깊이깊이 찔려오는 낚시 바늘과, 원양선을 타다 온 주정꾼 친구들로 바뀌게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 동두천읍 보산리에 있던 학교에 발령받아 국어교사 생활을 하며, 당시에 기지촌이었던 이유로 보육원에 소속된 고아들과 보산리 포주의 아이들 간의 지긋지긋하고 폭력적인 패싸움을 수시로 겪으며 몇 년을 보내다 군역을 위해 서울로 온다. 입대해서 하필이면 베트남 파병을 가게 되어, 시인의 말대로 하면 자신의 앞날과 더 이상 관련되지 않도록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을 쌓는다. 게다가 이 시대의 시인을 필두로 한 작가들은 1970년 전태일의 분신으로 현실참여의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 김명인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
  이 시집의 초판이 나온 시점도 재미있다. 1979년 10월 25일. 책이 종로서적의 진열대에 채 깔리기도 전에 독재자가 총에 맞아 죽는다. 이이가 등단한 것이 1973년, 세는 나이로 스물여덟 살 때. 그 후 육 년이 흘러 첫 시집을 낸 것이 바로 《동두천東豆川》이다. 당시는 금속활자 시대였으니, 만일 조판을 하기 전에 독재자가 죽었다면 시인은 시집을 다시 만들었을까? 나는 이것도 궁금했다. 시집이 문학과지성에서 나왔지만, 반시동인 김명인의 시들은 문지 쪽이라기보다 창비 성향이 더 짙다. 내가 김명인을 처음 읽어본 것이 1981년에 나온 무크지 <실천문학> 2호에서였다고 기억하는데(아닐 수도 있다), 당시 함께 실린 시들의 주인을 보면, 백기완, ‘늘봄’이란 필명만 밝힌 문익환, 양성우, 황색예수전을 쓴 김정환 등이었으니 그때의 기억이 강렬해서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동두천東豆川》을 읽어보니까 저 옛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시집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문득 생각이 났다. ‘송천동 바닷가 그 고아원에서’라는 부제를 단 <켄터키의 집 I>.


  봄과 여름에 정든 모습들 모두 어디로 갔느냐
  바다는 더 조용하고 소문에는
  그해 전쟁도 이미 끝난 겨울에
  아이들은 더러 먼 친척을 따라 떠나가고 날마다
  골짜기를 덮으며 눈 내려서
  추위에 그슬린 주먹들도 깨진
  유리창에 매달린 얼굴들도
  그렇게 쉽사리 서로를 용서하지 않았다

  (중략)

  다시 겨울이 오기 전에 몇 명은
  시집간 여자를 수소문하여 떠나가고 남아 있어도
  자라서는 뿔뿔이 새벽 안개 속으로 흩어졌지만
  모른다 어느 길 어느 모퉁이에서
  어른이 되어서도 우두커니
  누가 길을 잃고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겠는지
  그렇게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기야 하는지  (부분)


  이 시를 보면 ‘켄터키의 집’은 송천동 바닷가에 있었던 고아원인 거 같다. 흠. 아래한글 2010은 ‘고아원’을 허용하는데, 한글 2018에선 ‘보육원’이 맞다. 거참 이것도 세월의 힘이다. 어쨌든 고아원에 있던 원생들이 뿔뿔이 그곳을 떠나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암담한 심정을 그린 듯하다. 근데 왜 켄터키의 집일까. 1연에서 밝혔다. ‘전쟁도 끝난 겨울’이라고. 전쟁을 매개로 고아가 된 아이들, 그들 가운데 특별히 미군을 부계로 둔 고아를 염두에 둔 시라고 제목은 가르쳐준다.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월급 만 삼천 원을 받으면서 우리들은 / 선생이 되어 있었고 / 스물 세 살 나는 늘 / 마차산 골짜기의 허둥대는 바람 소리와 / 쏘리 쏘리 그렇게 미안하다며 흘러가던 물소리와 / 하숙집 깊은 밤중만 위독해지던 시간들을 / 만났다 끝끝내 가르치지 못한 남학생들과 / 아무것도 더 가르칠 것 없던 여학생들을” (<동두천東豆川 II> 부분)에서 보듯 미군 주둔기지촌이었던 동두천에 교사로 부임해 본 것들에서 기인한다고 보인다. 그래 동두천 이야기로 넘어가면, <동두천東豆川 I>에서 시인은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1연, 부분)

  기차를 타고 동두천에 도착을 한다. 학교 교사를 하지만 현장은 세상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시인이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막막함은 더 깊은 곳에도 있었다 매일처럼
  교무실로 전갈이 오고
  담임인 내가 뛰어가면
  교실은 어느 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죄가 된 고아들과
  우리들이 악쓰며 매질했던 보산리 포주집 아들들이
  의자를 던지며 패싸움을 벌이고
  화가 나 나는 반장의 면상을 주먹으로 치니
  이빨이 부러졌고 


  함께 울음이 되어 넘기던 책장이여 꿈꾸던
  아메리카여  (<동두천東豆川 II> 부분)

  오래지 않아 시인은 입대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왔으나 사회인으로의 첫 발자국이었던 그곳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주사가 있었는지 술만 마셨다 하면 동료 교사들과 싸움을 벌이곤 했더라도 그쪽 소식은 계속 들려왔다.


  우리들이 가르치던 여학생들은 더러 몸을 버려 학교를 그만두었고
  소문이 나자 남학생들도 덩달아 퇴학을 맞아
  지원병이 되어 군대에 갔지만
  우리들은 첩첩 안개 속으로 다시 부딪혀 떠나면서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든 이 세상 것은
  알려고 해선 안 된다고 믿었다.  (<동두천東豆川 III> 부분)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 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 때 교내 웅변 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중략)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합중국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쓰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동두천東豆川 IV> 부분)


  이렇게 9번까지 이어지는 연작시가 일종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게 되는 일을 평론가 김치수는 책 뒤의 해설에서 “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가 스스로 씌어지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 설명하며 “그것은 시인들 자신이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할 이야기>가 시인 자신들의 오랜 사유와 절제와 인내를 통해서 이미 내부에서 하나의 결정 작용을 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시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시는 동두천 이후의 기억 또는 경험, 그러나 시인의 말을 완전히 믿는다면 자신과 더 이상 관련되지 않게 지워버리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인 베트남 연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바닷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김명인의 시는 대체로 긴 편이라 인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그건 직접 사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 아니면 <어떤 소년少年 어부>라고 제목을 일러드리니, 검색해 보시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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