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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인간 ㅣ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4
궈스싱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20년 1월
평점 :
궈스싱에 관해서는 2018년에 간략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1952년에 중국의 대표적인 바둑 명가에서 태어났으나 바둑에는 별로 자질을 보이지 않았던 궈스싱은 1979년에 북경만보에 수습 기자로 들어가 연극비평을 쓰기 시작해 15년간 천여 편의 연극을 관람한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극에 관한 일가견이 생긴 궈스싱은 자연스럽게 직접 희곡을 쓰기에 이르러 현재는 중국을 대표하는 부조리극 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물고기 인간>과 <청개구리>는 우리나라에서 낭독공연 형식으로 무대에 올려진 바 있으니 현대 동아시아의 대표 희곡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불러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해설을 보면 궈스싱의 작품 가운데 <물고기 인간>, <새 인간> 그리고 <바둑 인간> 이렇게 세 편을 한량閑良 시리즈라 하는 모양이다. 대개 한량이라고 하면 “일정한 직업 없이 놀고먹는 말단 양반계층” 즉 룸펜 부르주아를 말한다. <새 인간>은 안 읽어봐서 모르겠는데, <물고기 인간>과 <바둑 인간>만 보고 얘기하자면, 한량 시리즈라기보다 초절정 고수 또는 초절정 마니아 시리즈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물고기 인간>에선 큰 저수지 대청호에서 30년에 한 번 기회가 있다는 전설적인 물고기 대청어를 낚기 위한 ‘낚시의 신’이, <바둑 인간>에선 바둑에 미쳐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가는 줄도 모르고 이제 그 여인이 낳은 새로운 바둑 영재와의 마지막 한 판 승부를 겨루는 최고의 바둑 고수 허윈칭이 등장하는데, 암만 봐도 이들이 룸펜인 건 맞지만, 부르주아 비슷하지는 않다.
궈스싱의 작품을 부조리극이라고 해도, 베케트나 이오네스코, 엘비 같은 극작가를 연상할 필요는 없다. (이 사람들의 작품을 읽어봐 극작가들의 이름을 인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뭐 이들을 연상한다고 해도 이제 부조리극이란 타이틀 때문에 미리부터 쫄 독자도 없을 터이긴 하지만.
큰 줄거리는 위에서 잠깐 짚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은 역시 중국 최고의 바둑 고수로 보이며 이제 갓 60세에 진입한 허윈칭(何雲淸 구름이 어찌 맑으랴?). 이이의 상대역은 30년 전 옛사랑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스무 살 먹은 아들 쓰옌(司炎). 이름 옌炎, 불이 아래위로 두 개나 있다. 그러니 얼마나 뜨겁겠는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아 병이 된 청년. 겨우 스무 살에 산더미 같은 책을 다 독파하고도 사는 의미를 별로 찾을 수 없는 고독하고 불행한 천재. 과학연구소에서도 머리 좋은 건 알겠지만 쓰옌이 생각하는 걸 너무도 좋아해서 받아주지 않았을 정도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뇌세포가 자꾸 증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기 위해 복잡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야 한단다. 그래 쓰옌이 생각해낸, 가장 복잡하게 경우의 수를 따지는 작업이 바로 바둑.
그러나 쓰옌의 엄마 쓰후이(司慧)는 이름 후이慧같이 전혀 지혜롭지 못해 평생 30년 전의 첫애인 허윈칭이 바둑에 너무 몰두해 자신을 위한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은 것을 한으로 지니고 살았다. 그러니 아들이 아무리 뇌세포가 무한 증식한다고 해도 바둑을 허락하지 않을 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쓰후이는 그걸 넘어서 옛 애인과 죽은 남편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돌봄을 아들에게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쓰후이가 허윈칭을 찾아와 아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주지 않도록 요구하자, 허윈칭은 쓰옌과 바둑 대결을 벌여 (쓰옌이 먼저 두 점을 깔고), 자신이 이기면 쓰옌은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고 어머니를 지성껏 돌보기로 맹세를 한 후 드디어 마지막 대국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국의 장면이 흥미롭다. 두 바둑 기사가 단기필마로 장창을 빗겨 들고 단판 승부를 벌이는 걸 관람하는 등장인물, 바둑광인 작가 '마구잡이'의 말 그대로 장판파에서 헌 칼로 조조의 친조카 하후은을 비롯한 조조군 병사 도륙내는 광경을 그리는 듯이 흥미진진하다. 허윈칭이 궁지에 몰리자 급격하게 신경을 쓰는 바람에 코피가 터지고, 필살기를 구사하는 초절정 고수들의 칼부림이 흥미진진 긴박하다.
이 장면이 마지막 막인 4막 1장. 여기까지 오느라고 독자는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부조리극이란 걸 잠깐 잊었을 수도 있다. 부조리 극작가, 이오네스코나 올비, 그리고 베케트의 작품이 행복하게 마감하는 거 보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