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78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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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행숙의 시는 처음 읽었다. 70년생으로 99년, 서른 살에 현대문학으로 데뷔하여, 2003년에 낸 첫번째 시집 《사춘기》. 첫번째 시집의 제일 앞에 실린 시 <조각공원>의 첫 행은 이렇다.


  “비둘기 한 마리가 발가락 사이에 부리를 넣었다 뺐다 넣었다를 시계추같이 반복한다. 그의 발가락 옆에서 「무제 II」라는 그의 이름을 보았다. 끄덕끄덕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비둘기 한 마리가 발가락 사이에….” 이 문장 바로 다음 다시 “그의 발가락 옆에는….” 이라니까 여기서 “그”는 한 마리의 비둘기이고, 비둘기 옆에 「무제 II」란 태그가 놓여 있었으니 이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조각임에 틀림없다. 제목이 <조각공원>이니까. 그럼 다음 문장 “끄덕끄덕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는 추가서술에도 불구하고, 김행숙의 시는 다분히 회화성이 중요한 서술방식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두번째로 실린 <삼십세>의 첫번째 연을 보자.


  “네겐 햇빛이 필요하단다. 여자는 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을 산책했다. 햇빛은 어디 있지요? 난 뭔가 만지고 놀 게 필요해요. 나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도 어딘가를 올려다보았다.”


  김행숙에게 삼십 세란, 자신이 시인으로 재탄생한 나이. 갓 시인이 되어 이제 유모차에 태워져 자신에게 필요한 햇빛을 찾고 있다. 성숙한 서른 살의 여인이 갓 태어나 유모차에 오른 아이로 퇴행하는 순간이지만, 사람으로서가 아닌 시인으로 그렇다는 말씀. 이어서 같은 시의 2연.


  나는 엄마, 라고 말했다.

  얘야, 너는 잠시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세상은 많이 변했단다. 여자가 유모차를 밀던 손을 놓았다.

  구른 건 바퀴뿐이었을까? …… 내 차가 들이받은 나무는 허리를 꺾었다. 나뭇잎 나뭇잎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를 나는 들은 것 같다. 아아아, 내가 처박힌 여기는 어딜까? (하략)


  내가 엄마, 라고 부른 사람은 나를 보호하지 않고 그냥 유모차를 밀어버린다. 당연하지 시인으로 유아이지만 실제 나이는 서른 살인 걸. 그리하여 서른 살 시인은 머리를 굴린다. “구른 건 바퀴 뿐이었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충동적으로 한 시집을 떠올렸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번에 빛나는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문지 시인선이 갖는 상징성. 이 가운데서도 1번의 위치에 있는 시집의 제목이 “구른 건 바퀴 뿐이었을까?”라는 의문/질문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나? 저 문지 시인선 1번에 빛나는 ‘시의 조상님’도 이제 갓 태어난 서른 살의 시인은 전혀 돌보지 않는다. 시인으로 태어나 보니, 환생하니까, 이 판도 험악하긴 마찬가지란다. 이렇게 쓰고 보니까, 역시 독자의 시 독법은 전지전능이다. 내가 이렇게 읽었다는데, 그러면 그런 거지, 왜 아니꼽니?

  전지전능한 독자의 시 독법에 관한 권능으로 말하자면, 그리하여 이 시집에서는 아이,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첫번째 시 <조각공원>에서 보는 회화성은 점점 사라지고, <삼십세> 식의 아이를 빙자한 시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띈다. 단, 이렇게 읽으려면 아이와 이제 갓 시인이 된 김행숙 자신의 동일화라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대책 없는 의식의 퇴행이란 골짜기로 추락할 수 있으리니. 예컨대.



  울지 않는 아이


  아주 조용하죠. 내 머릿속에서 훌쩍임들이 멎고 흘러나오던 콧물도 얼었어요.

  꺽, 하는 뭔가 한꺼번에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를 분할했지요. 다음에 온 고요는 쌔근거렸어요. 여진일까요?

  정말 아이들은 잠에 빠져버렸나 봐요. 내 머릿속은 보육원이죠. 아이들의 악몽을 덮을 이불을 준비해야겠어요.

  아이들의 악몽은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자동차 같아서 피하기가 어려워요. 자동차가 통과해 갔는데 내가 어떻게 콩나물을 사고 두부를 사겠어요?

  더 이상 울지 않는 아이는 위험해요. 아주 조용하지만

  조용히 내린 눈이 마을을 고립시키죠. 그리고 아무도 그 마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면. (전문)



  보육원이든지 놀이방이든지 아이들이 죽 늘어서 자고 있는데 막힌 코 때문에 누구 하나가 수면중 무호흡증세가 일어나 꺽, 하고 소리를 냈나보다. 이게 악몽으로 넘어가고, 시인이 악몽을 꾸거나 말거나 어른 여자 보호자는 이 악몽이 모퉁이에서 튀어나오는 자동차 같아 손쓸 도리가 없다. 어른은 결코 악몽에 꺽, 소리를 지르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려는 마음도 없다. 아이 앞에 남은 것은 폭설이 와 고립된 고요한 시인들의 마을. 그 속에서 열라 울어야 한단다. 근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맞긴 맞는 건가, 혹시 견강부회 아닌가 싶어 캥기는 바가 작지는 않다.

  여태 아이를 이야기했으니, 그러면 돌봐야 하는 아이를 방치하는 어른 여자는 누굴까. 누구긴 누군가. 기성세대지. 시인은 여전한 아이의 눈으로 어른 여자를 바라다본다.



  여자들의 품


  영원히 여자들 품에 안긴 여자애이기를 원했어요. 나는 그녀들의 얘기를 귀에 꽂고 다녔어요. 내 입에서 그녀들이 흘러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그녀의 테이프가 늘어져서 우린 조금씩 어지러워지거나 천천히 섞였지만

  이미 우리는 다 외워버렸는걸요.  어쩌면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녹색의 시냇물이 삼부아파트 101棟 102棟 103棟…… 새를 흐르고

  우린 영원히 발을 담그고, (전문)


  그래도 아이는 여자들의 품이 좋다. 여간해 품에 안아주지 않았지만 시인, 또는 아이는 어른 여자들의 이야기를 줄창 입에 달고 살다가 급기야 어른들의 이야기를 몽땅 외워버렸는데, 그게 그래서 우리들도 발을 담았다가 이내 휩쓸려 함께 흘러야 할 삼부아파트 101동, 102동, 103동 사이의 시냇물, 뻔한 이야기, 뻔한 노래를 하게 되리라는 것. 결국은 아이들도 어른들의 이야기를 빼다 박아 하고, 빼다 박고 만다는. 기어이 다른 노래를 하고 말겠다는 각오는 없다. 다만 그러다가 어쩌다 여지껏의 것들과 다른 노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와 어른 여자 사이에 놓인 것이 바로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사춘기다. 수없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사춘기 신드롬 가운데 하나. 그것도 반항의 한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극소수의 청소년들은 이 시기에 책에 빠진다. 시인 역시 이 가운데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이들에 관한 시 한 수가 어찌 없을 수 있으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사춘기 4


  그가 사라지자 바람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그를 바람의 아들이라 불렀다. 어른들은 후레자식이라고 말했다. 돌멩이가 구르지 않았다.

  바람이 사라지자 그는 침을 뱉고 사라졌다. 구름의 모양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름은 더 이상 좋은 공상의 재료가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똑 같은 냄새를 풍겼다. 저녁마다 갈비를 뜯었다.

  사람들은 바람의 도움 없이 책장을 넘겼다. 바람과 함께 그가 사라지자, 몇몇 애들은 정말로 책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책에서만 폭풍이 일고 운명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전문)


  여기까지 아이-여자-사춘기를 이야기했다. 이 시집 《사춘기》에는 이 세 개의 시절 외에 한 시절을 더 보탰으니, 드디어 인생을 마감했으나 천국의 안식을 맛보기를 거부한 채 구천을 떠도는 유령, 귀신 이야기다. 아이, 사춘기 청소년, 어른의 시절은 대강 때려 맞춰서 시를 이해한다고 위안하면 그만인데, 여태 내가 귀신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이 귀신 메들리에 접어들어서는 그만 눈알만 빠지려고 한다. 그래도 《사춘기》를 소개하면서 귀신 이야기를 빼놓기는 아무래도 섭섭하니 그냥 읽어보십사, 하는 서비스 측면에서 제일 짧은 귀신 이야기 한 수 소개하며 독후감을 마친다. 으떠셔? 나 착하지?


  귀신 이야기 2


  우히히, 정말 장난이 아니었어. 사람들은 귀신 들린다고들 하지만 사람에게 먹힌 귀신에 대해 들어봤니? 히히히, 그래서 늙은 귀신들은 사람을 피해서 다녔지만 내가 세상에 귀신으로 남은 이유는 순전히 사람을 피해서 우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재밌어, 어떤 나무나 어떤 오토바이 어떤 전봇대……에 비길 수 없이 사람을 그냥 통과할 때, 단숨에 어떤 一生이 한 줄로 정리될 때, 정말 神이 된 기분이야. 얼레리꼴레리

  나는 내 멋대로 흘러다니지만 때때로 이상하게 빨리 흐르는 피를 가로지를 때, 우우우 휩쓸리고 싶어지기도 해. 정말 장난이 아니지. 늙은이는 교활하거나 분별력이 뛰어나서 우리는 애송이일 뿐이지만 세상에 같은 살덩어리는 없어. 내가 누빈 살덩어리 사이에서라면 나는 훌륭한 거간꾼이 될 수 있지. 누구도 속일 수 없는 게 있으니, 피의 흐름 피의 향기…… 히히히, 난 네가 누군지 알고 있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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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08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요. 골드문트님 덕분에 시를 읽습니다. 비록 리뷰에서만이지만..... 그래도 역시 감성이 잘 안와닿는 저는 감성이 메마른것 맞겠지요? ㅠ.ㅠ

Falstaff 2022-03-08 14:35   좋아요 1 | URL
감성에 잘 와닿지 않는 시 = 시인이 감성에 바탕해서 쓴 시가 아님.
ㅎㅎㅎ 전 무조건 독자가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아니면 누가 그렇게 쓰라고 했나요, 그죠?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오늘의 젊은 작가 33
김희선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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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처음 낸 소설집 《라면의 황제》에는 대한민국 강원도 W시 상공 해수면 5백 미터 지점에 멈춘 우주선이 등장한다. 이 우주선은 베데스타 별에서 2만년 만에 지구 별로 보낸 일종의 수송선으로 인간들이 유전정보, DNA라고 오해하고 있는 우주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는 패스워드를 통해 자기네 종족과 통신을 할 예정이었다.

  얼마나 발랄한 아이디어였나. 이 책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에서는 진한 산화철 농도 때문에 붉은 사막처럼 보이는 화성이 등장하고, 인간들이 만든 화성 기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을 제일 앞에 배치했다. 최근 피해자는 유럽연합 우주국 ESA 소속의 프랑스인 알랭. 그는 갈색나는 길쭉하고 단단한 것을 손에 쥔 채 죽어 있어서 물체의 정체가 무엇일까 독자의 관심을 끌지만, 곧바로 밝혀지기를 바게트 빵이었다. 왜 하필 바게트 빵을 가슴에 품은 채로 죽었을까? 유머 코드? 에이, 설마.

  어쨌거나 이 연쇄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지구에서 도착한 과학수사대 대원 최가 등장한다. 최는 강원도 주문진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방학때마다 내려와 지내곤 했는데 한여름 마루에서 꿈을 꾸면 푸른 우주를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황량한 사막에 도착하면서 고함을 지르던 기억이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 진짜로 붉고 황량한 사막인 화성에 도착한 것.

  여기까지가 삼헌광업이 바이오산업단지와 영화촬영세트를 유치한 W시 극동리에서 찍는 SF 영화 <배틀 온 마스>의 첫번째 장면이다. 그러니까 극중극 형식을 차용한 소설 속 영화장면.


  이어지는 건 실제 극동리 주민 이만호 노인의 에피소드다. 요즘 바이오산업단지, 영화촬영세트장과 신재생에너지발전소까지 들어서는 바람에 큰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극동리에 관해 르포를 쓰고 있는 지방신문 기자 김영주가 카페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나중에 이만호 노인이란 것이 밝혀지는 한 노인이 회전교차로 앞 도로에서 주춤대며 발을 내밀다가 다시 거둬들이는 모습을 보고, 기자의 직감이랄까, 하는 것들이 발동을 했는지 그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한다. 노인은 급기야 교차로 중심화단에 들어가더니 교통신호 제어기 위에 전동 드릴을 끈과 청테이프 등을 이용해 단단히 고정시킨다. 그리고는 가방 속에서, 나중에 농약이라고 밝혀질, 자그마한 갈색병을 꺼내 뚜껑을 따더니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는 전동 드릴을 향해 돌진한다. 이 모든 것이 김영주 기자가 휴대전화를 통해 촬영을 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지며 드디어 맹렬하게 회전하는 드릴이 노인의 미간을 뚫어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목격한 김기자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만다.

  21세기에 여성이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고 해서 기절을 했다? 마땅하지 않지만 이렇게 설정한 건 이유가 있다. 기절을 한 김영주는 병원에 입원을 하고, 전동 드릴로 스스로 자기 미간을 뚫어 뇌 한가운데에 있는 송과선까지 파괴해버린 노인도 이 병원 지하 2층의 안치실에 누워 있게 하기 위하여. 김영주는 기절을 하는 바람에 노인이 살던 동네 극동리의 이장 오구식을 비롯해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같은 신문사의 후배 기자인 최에게 전화를 해 안치실에 들어가 정확한 사인을 밝히게 한다. 검시의 김봉호는 농약을 마신 고통으로 인해 비틀대다가 우연히 돌아가던 전동 드릴에 다쳐 죽은 것이란 보고서를, 삼헌광업 회장 노이균의 부탁으로 작성을 했다. 하지만 검시의가 확신하는 진짜 사인은 전동드릴에 의한 뇌 천공이라는 것을 밝히게 된다. 죽을 당시 노인은 세 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를 꽉 쥐고 있었단다. 저 프랑스 남자 알랭이 바게트 빵을 쥔 채 죽어 자빠진 것처럼. 영화의 주인공은 과학수사대 최, 소설의 주인공은 지방신문 기자 최.


  이 책은 1993년에 개봉한 영화 <육체 강탈자 Body Snatcher>, 우리말 제목 <보디 에일리언>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디 에일리언>은 화학전 담당 군부대 안을 잠식한 외계식물이 인간의 몸에 침입해 영혼을 빼앗아가 결국 껍데기만 남게 되며, 외계식물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식물은 결국 지구행성을 점령하리라는 우울한 결말로 끝난(다고 한)다.

  소설 속 영화 <배틀 온 마스>에서는 바이오산업단지, 영화세트장, 신재생에너지발전소의 건설을 위해 대규모 개발을 진행해 땅이 마치 붉은 모래 사막인 화성의 표면처럼 변한 극동리를 무대로 쵤영하는데, 역시 기지의 모든 사람들이 화성 괴물에 의하여 몸을 빼앗기고 혼자 남은 최만 마지막 우주선을 타고 탈출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투자자들의 요구에 의해 결말이 바뀌기는 하더라도.

  소설 <무언가……>는 신재생에너지발전소를 운영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산업폐기물을 수거해와 소각한 에너지로 발전을 하는 방식에서 필연적으로 엄청난 유독가스가 배출될 것이고, 이를 항의하는 일을 전동 드릴로 자기 양미간을 뚫어버리는 노인이 진행했으나, (그것, 산업폐기물 소각으로 인한 유독가스 생성과 연계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 일과는 전혀 관계없다. 오래 전에 현 노이균 회장의 아버지인 노원철과 한때 김일호라고 불렸던 과학자가 사람의 영혼을 이식하는 실험이 어떤 형태라도 성공했다는 전제에서 영혼의 무한번식을 통한 영생을 꿈꾼 이단아/이단아들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의하면 멀쩡한 내 몸에 다른 인간의 영혼이 들락거릴 수 있다는 것. 대개 유년기부터 사춘기 시절까지 누구나 한 번쯤 “나는 왜 나일까?”라는 질문을 해보았으리라. 영혼이란 뇌와 신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화학작용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현대 의과학의 설명이지만, SF 소설의 특권으로, 정말로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걸 예를 들어 전기 충격이나 고주파 등의 파장을 통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전이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전하고자 하는 영혼이 우주괴물 등 하여간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어야 될 거 같다. 자기 몸에 들어 있는 기존의 영혼이 책과는 달리 호락호락하게 자기 몸을 내줄 턱이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지.


  그런데 영혼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나폴레옹 이전 시대까지 영혼은 심장에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근데 영혼이란 게 이동도 하는 모양이라서 이제 정든 곳을 떠나 눈 뒤편에 정착했으니, 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송과선, 비밀스러운 자리를 골랐다. 그래서 이만호 노인이 사용한 전동 드릴은 드릴의 길이가 최단 10 센티미터는 되어야 할 터이지만, 실제 전동 드릴을 보면 아쉽게도 강철 드릴의 길이가 그리 길지가 않다. 그러나 이런 걸로 시비하지 말자.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회전 교차로의 교통신호 제어기(회전 로터리에 교통신호 제어기가 필요한지 여부도 따지지 말자)에 전동 드릴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힘껏 자기 미간을 관통하게 하는 충격적인 자살 장면은 압권이다. 김희선이 즐겨 봤던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을 써도 좋았겠지만 사실 전기톱 자살 정도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어서 전동 드릴 만한 쇼크를 독자에게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

  나는 김희선의 전작 장편 <무한의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큰 기대를 갖고 <무언가……>를 읽기 시작했지만, 아쉬웠다. 전개상 반드시 밝히고 넘어가야 하겠지만, 자살한 노인이 죽을 때 손에 쥔 종이에 적혀 있던 세 명의 인물과 관련한 에피소드 같이 극동리 사건의 핵심 스토리 라인의 보조 이야기에 공을 과하게 들인 것처럼 읽었으며, 결과적으로 정작 현 시점의 사건 전개가 생각만큼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주장이 합당하지는 않겠지만, 2월 23일 아침의 보고서는 독자로 하여금 “내가 과연 나인가?”라는 의문을 줄 수는 있어도 내가 읽기로는 난데없는 화해였다. 차라리 이날의 보고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물론 작가도 여러 버전을 염두에 두었다가 그렇게 마감을 했으니 작가가 옳고, 작가의 권리일 것이다. 독자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다.

  더 말단으로 들어가서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한의 책>과 비교해, 아니, 비교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SF 소설을 표방했다고 해도 무리한 설정이 과하게 많이 보인다. 산만하게 이야기를 벌려 놓고 그냥 내버려둔 모양새다. 작가의 집필실에 조언자가 별로 없는 것 같아 아쉽다. 분량의 압박 때문에 마음대로 쓸 수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고. 뭐 사는 게 다 그렇다. 건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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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07 08: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이제 한국문학까지..... 골드문트님의 한국문학평을 기대하겠습니다. ^^
한국문학은 좀 더 애정을 갖고 보게 되는데 책이 나에게 맞고 좋을 때는 괜찮은데 그렇지 않을 때는 뭐라고 쓰야하나 참 어렵더라구요. 하지만 골드문트님 글을 보니 이렇게 솔직한 평도 쓰는게 안 쓰는거보단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

Falstaff 2022-03-07 09:46   좋아요 2 | URL
오, 한국문학 좋아해요!
일천한 눈으로 보니 요즘 작가들이 다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서 선뜻 사 읽게 되지 않아서 그렇지요. 책꽂이에 쟁여놓은 책들 마무리하면 도서관 다니면서 우리 문학책 열라 읽을 준비, 다 해놓았습니다. ㅋㅋㅋㅋㅋ 한여름 정도가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그레이스 2022-03-07 09: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절할것 같아요 ㅠ

Falstaff 2022-03-07 09:48   좋아요 1 | URL
윽, 기절을 왜요? 김희선 작품에 별 3 줬다고요?
별 3 주면서 저도 안타까웠습니다. 드물게 독특한 이야기를 하는 상상력 뛰어난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은 여러가지로 아쉬웠습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2-03-07 09:58   좋아요 2 | URL
21세기 여성이 드릴이 머리를 뚫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해서 기절을 했다?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ㅋㅋ

Falstaff 2022-03-07 10:0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님은 그걸 처음부터 촬영할 생각 자체를 안 하실 겁니다. 냅다 달려가서 자살하지 못하게 하든지, 119나 112에 신고를 하든지, 이러셨을 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3-07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예전에 <무한의 책> 골드문트님께서 호평하신 리뷰 읽고 이 작가 처음 알게됐어요. sf류가 저는 어려워서 선뜻 손이 안가지만 이렇게 기억이라도 나니 반갑네요.

Falstaff 2022-03-07 13:40   좋아요 2 | URL
옙. <무한의 책>은 참 재미나게 잘 읽었는데, 이후에 나온 건 그만 미치지 못하는 거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서도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를 냈는데, 그 책도 독자들 별점은 좋지만 분량도 그렇고 해서 안 읽고 있습니다.

지금 검색해보니, 이 월간문학의 핀 시리즈가, 월간지에 투고한 걸 퇴고해서 한 권으로 낸 거랍니다. 에휴. 책으로 낼 만한가 모르겠습니다. 미리보기 해보니까 대단한 거품편집이기도 하군요. 핀 시리즈, 정말 못마땅합니다.

잠자냥 2022-03-0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댓글 중에 도서관 다니는 골드문트 기대됩니다. ㅎㅎㅎ

Falstaff 2022-03-08 14:36   좋아요 0 | URL
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원래 도서관 귀신 출신입니다. ㅋㅋㅋ
 
픽윅 클럽 여행기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허진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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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킨스를 또 읽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제는 디킨스를 졸업했다, 라고 허튼 얘기를 했던가. 이것 참. 그래도 디킨스의 첫번째 장편소설이라니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고. 무려 1,256쪽까지 본문이 이어지고, 3만2천 원의 정가가 매겨진 비싼 벽돌임에도 불구하고, 자칭 디킨스 졸업생은 또다시 3만2천 원, 할인가 28,800원의 무게에 바들바들 떨면서 첫 페이지를 열어 읽기 시작한다. 한 시간쯤 눈에 힘을 주고 읽다 보면 초반부터 디킨스 특유의 수다와 해학, 그리고 풍자와 말장난이 넘실거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문장까지도 아니고, 한 귀절도 허투루 읽었다가는 기가 막히게 숨긴 디킨스 특유의 유머 코드를 놓칠 수 있다는 경계경보를 발령하게 된다.

  예를 들어 픽윅 클럽의 종신 회장 새뮤얼 픽윅 씨를 보자. 독신을 고수하는 픽윅 씨는 대머리 속의 거대한 두뇌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으며, 이제 노년이 그리 멀지 않은 나이임에도 언제나 모험과 새로운 발견 같은 것에 관심이 많은 진취적인 성향의 전통적 잉글랜드 특유의 젠트리 계급이다. 당연히 일을 하지 않아도 남은 평생 풍족하게 살 만큼의 재정이 뒷받침하고 있어서, 작품을 시작하기 바로 전엔 벌써 거대한 햄프스테드 연못의 수원까지 탐색해 큰가시고기 이론으로 과학계를 흔들었다고, 우리의 디킨스 씨는 주장한다. 픽윅 씨가 탐험한 햄프스테드가 어딘가 하면, 런던 인근,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 주장이자 등번호 7번에 빛나는 손흥민이 살고 있는 동네다. 이 근처에 호수도 아니고 연못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못의 수원, 그러니까 과천 아래 수원 말고, 연못이 시작하는 샘을 발견했으며, 연못의 수생동물 큰가시고기, 최대 몸길이가 무려 11cm에 육박하는 민물고기에 관해서 이론은 무슨 이론을 세웠겠는가. 이게 디킨스 식 농담이다.


  이 새뮤얼 픽윅 씨가 클럽을 만들고 직접 탐험과 과학적 결실을 맺을 정도로 활성화되자, 1827년 5월의 어느 날, 클럽의 종신부회장 조지프 스미거스 씨는 총회를 열어 클럽 산하에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많은 영역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픽윅 클럽 통신회’라는 이름의 소모임의 설립의 안건을 상정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소모임은 관찰한 분위기와 현장의 관습, 여행 전체에 대한 설명을 런던 소재 픽윅 클럽 본부에 제출해야 하며, 무엇보다 이게 중요한데, 우편료, 화물 운송료를 포함한 모든 여행 비용은 소모임에 참가한 회원들이 직접 부담해야 한다는 거. 이런 의무사항만 제대로 착착 이루어지면 클럽 본부는 소모임의 여행기간이 얼마나 길어지든지 간에 반대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자기들 돈으로 자기들이 여행하겠다는 걸 누가 말려. 하여튼 이렇게 구성한 소모임 ‘픽윅 클럽 통신회’ 역시 종신 회장 새뮤얼 픽윅 씨가 초대 소모임장을 맡는다. 이제 첫 여행을 떠나는 세 명의 회원을 보자.

  먼저 트레이시 터프먼. 너무도 예민한 감수성의 사나이. 성숙한 어른의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소년의 열정과 열의 또한 소유한 이. 물론 가장 큰 열정은 여성을 향한 찬양이다.

  두번째로 오거스터스 스노드그래스. 시인이라 불릴 만큼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시를 쓰고 싶어하는 문학적 취향의 사나이지만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작품이 끝난 다음에도 영원히 한 줄의 시도 쓰지 않고 생을 마감할 거 같다.

  마지막으로 너새니얼 윙클. 스포츠 애호가이며 결투를 포함해 어떤 스포츠라도 부딪히면 일단 하고 본다. 그러나 아불싸, 세상에 이런 허당이 또 있을까. 그래도 명문가 아가씨 하나 옆구리에 꿰차고 도둑 결혼을 올릴 배짱은 갖고 있다.

  이렇게 네 명의 소모임 멤버들이 여행을 떠난다. 이후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소설의 형식을 띄는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피카레스크 소설이 <돈키호테>라서 세르반테스의 전범을 따르기 위해 디킨스 식 산초 판사를 등장시킨다. 런던 입구에 예전엔 유명했으나 지금은 좀 쇠락한 ‘화이트 하트 여관’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새뮤얼 웰러. 그런데, 샘 웰러를 산초 판사와 직접 비교하면 샘이 매우 서운할지도 모른다. 젠트리 계급도 아니고 일개 마차꾼의 아들인 샘 웰러로 말할 거 같으면, 1,256쪽의 길고 긴 장편소설에서 가장 총명하고 기민하며 앞뒤 사정을 가려 가까운 미래에 어떤 결과가 초래할 줄 짐작하는 지혜도 가지고 있는 데다가, 한 번 맺은 사람간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아는 의리까지 겸비한, 말 그대로 최고의 마스터 키 역할을 맡았다. 만일 내게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물론 새뮤얼 픽윅 씨라도 대답하겠지만, 주연 못지않게 중요한 배역, 조연보다 우위의 준주연 급으로 이 샘 웰러를 꼽을 정도다.


  사람도, 사업도, 소모임 ‘픽윅 클럽 통신회’도 첫발이 중요하다. 네 명의 소모임 동지들은 1827년 5월 13일, 드디어 골든 크로스에 모여 녹색 상의를 입은 낯선 젊은이와 함께 다섯 명이 로체스터 행 마차에 오른다. 회원들이 처음으로 만난 녹색 상의의 낯선 청년은 나중에 ‘징글’이라는 사기꾼 악당으로 밝혀지지만 하여튼 이 청년의 앞뒤 가리지 않는 행동 때문에 엉뚱하게 총 한 번 쏴본 경험이 없는 윙클 씨가 군의관이기는 해도 어엿한 군대의 장교와 결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곤란에 빠지게 된다. 하늘이 도와 사람이 다치는 결투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징글이란 청년과의 악연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래도 동시에 군의관이 속한 부대의 사열식에서 지역 유지이자 이저벨라와 에밀리, 두 명의 어여쁜 딸을 둔 워들 씨 가족과 사귀게 되고, 당연히 픽윅 씨를 추앙하는 젊은 동지들의 팔팔하고 뜨거운 피가 어떻게 어여쁜 따님들과 엮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니 첫 여행으로 고른 로체스터에서 징글과의 작은 악연과 함께 위들 가족과 크고 선한 인연을 맺는 셈. 특히 워들 가족과는 끝까지 깊고 아름다운 우정을 쌓는다. 게다가 진실한 종복관계가 되는 새뮤얼 웰러까지.


  첫번째 장편소설이며 피카레스크, 소위 길바닥 소설이라 짧은 에피소드들이 숱하게 나열된다. 그래서 읽기에 부담이 없이 그냥 써 있는 대로 머리 안 굴리고 읽으면 그만이지만, 나중에 이 에피소드를 가지고 다른 작품을 만들기도 하니 그것도 염두에 두면 더욱 재미있을 거 같다. 예컨데 크리스마스에 묘지를 파는 불경한 교회지기한테 등장하는 고블린 이야기 같은 것. 이건 저번에 읽은 《크리스마스 캐럴》에 단편소설로 실려 있기도 하다.

  “100년쯤 전에 세상을 떠난 어떤 남자가 아무도 가지 않는 어느 장소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다른 장소로 이어지는 작은 길을 막아버린 사건에 대한, 지루할 정도로 길어진 소송”(689쪽)은 무려 40년 동안 끝나지 않은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사건”을 다룬 <황폐한 집>을 떠올리게 하고, 많은 분량을 할애한 채무자 감옥 ‘플리트’는 여러 작품의 비극적 장면에서 등장한다.

  물론 빅토리아 시대의 개막과 함께 출간한 첫 장편 <픽윅 클럽 여행기>인만큼 낡은 묘사도 디킨스 특유의 화법과 함께 무수하게 등장한다. 54쪽에,

  “사정을 들은 윙클 씨가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로체스터 성의 중심탑이 갑자기 주춧돌에서 걸어내려와 카페 창문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해도 이보다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지나친 과장 같은 건 이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 읽어보면 촌스럽고 귀엽고 뭐 그래서 좋지 않나?

  이제는 더 이상, “디킨스 졸업했다.”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속으로 생각하기에, 이만하면 디킨스는 된 거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2년 전에도, 3년 전에도 했으면서 눈에 보이기만 하면 읽게 되는 작가가 디킨스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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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3-04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 디킨스가 그렇군요.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올리버 트위스트가 너무 유명해서 하나도 안 읽었는데 읽었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작가.
골드문트님 서재는 출입금지 팻말이라도 달아놓아야 할 듯합니다. 이 사람거도 재밌어? 이것도 좋네? 하여튼 너무 많은 작가들을 흥미있게 소개해주셔서 진짜 죽기 전에 이들을 다 못읽을 거 같아 슬퍼지네요. ㅠ.ㅠ

Falstaff 2022-03-04 13: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맞아요. 안 읽고도 읽어본 거 같은 느낌이 드는 대표적 작가입죠.
<크리스마스 캐럴> 읽으면 후회하실 거 같아요!
저는 디킨스 가운데 <위대한 유산>하고 <두 도시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stella.K 2022-03-04 14: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잘 생각하셨네요.
저는 골드문트님하고 디킨스하고 웬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디킨스를 영원히 사랑해 주세요.ㅋㅋ

Falstaff 2022-03-04 16:07   좋아요 2 | URL
아, 그렇습니까? ㅎㅎㅎㅎ
디킨스 읽으면서 딱 한 번, <...캐럴>로 후회했습니다. 그것도 너무 소년 취향이라서 그랬을 뿐입니다. 얘기하신 대로 저하고 맞는 작가인 거 같아요. ^^

coolcat329 2022-03-04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이 두꺼운 책을 읽으셨군요! 도서관에서 보고 허걱! 했거든요.
위대한 유산은 저도 참 재밌었어요.
두 도시 올해 꼭 읽어보겠습니다 😊

Falstaff 2022-03-04 20:57   좋아요 2 | URL
ㅎㅎㅎ 두껍기는 하더라고요!
넵. 두 도시 이야기, 필독입니다. 디킨스 같지 않았던 기억이.... ㅎㅎㅎ
 
입술을 열면 창비시선 418
김현 지음 / 창비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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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의 《입술을 열면》을 읽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4부는 대충 휙휙 넘기며 시집 읽기를 끝마쳤다고 주장하면 나도 입술을 열고 한 마디쯤 해야 하겠지? 근데 그게 난감해서, 지극히 난감해서 지금 곤혹스러워 하는 중이다. 도대체 뭐라 해야 할지, 어떤 감상을 내놓아야 할지 문학평론가 양경언의 해설을 읽고, 역시 문학평론가 송종원이 뒷표지에 쓴 글을 읽고도 감을 잡지 못하겠다. 양경언이 이야기한 “캠프적 작법과 다양한 각주가 차지하는 페이지”라든지, 송종원이 서슴없이 쓴 대로 “김현의 펜은 칼끝 같다.” 같은 것이 도무지 그럴 듯하지 않다는 수준을 떠나 이 양반들의 평도 오리무중이다. 물론 이거야 문학적으로, 특히 시, 이 가운데서도 현대시를 읽는 내 소양이 혹독할 지경으로 보잘것없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시를 이해하기는커녕 알아듣지도 못하고, 공감하기는 더욱 거시기 했음에도 지금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인 김현의 이름값만 보고, 좋아, 좋아, 밋치겠어,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앞으로 시를 읽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시를 안 읽겠다는 건지, 김현을 안 읽겠다는 건지 아직 모르겠지만서도.


  김현은 1980년 철원에서 태어났다. 가장 징그러운 시절 (가운데 한 때)에 태어나 일곱 살 때 소위 민주화가 되고, 열 살 때 장벽이 무너졌으며, 열한 살 시절엔 소비에트가 완전히 무너졌음에도 여전히 “독재타도 유신철폐 / 민족해방과 조국통일 / 구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 노동권을 보장하라 /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외칠 수 있으나 / 우리는 눈을 부릅뜬다 // 지금부터 평등한 밤이다” (<빛은 사실이다> 부분)라고 외치는 시인. 물론 이 시집이 2018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되지 않은 상태라서 많은 작품들이 박근혜 정부 때 쓴 것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게 언제 적 이야기라고 독재타도와 유신철폐, 그리고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운운하는지, 질림. 왜, 논문을 쓰시지 않고.

  이 시집의 중요한 흐름 하나가 퀴어다. 근데 퀴어보다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이 책에는 각주 대신 디졸브(dissolve, 장면전환기법)가 사용되었음을 밝혀둔다.”라고 목차 바로 다음 페이지에 써 놓았던 것.

  디졸브가 무슨 뜻인지 알고 본문을 읽는 것이 좋다. 네이버 검색해서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을 보니 이렇게 쓰여있다.


  “(영화) 앞의 장면이 사라지고 있는 동안 새 장면이 페이드인(fade-in)되는 것. 두 화면을 얕게 겹친 것으로 두 화면이 깊게 겹치는 오버랩(overlap)과 비슷하다. 짧은 시간의 경과나 가까운 장소의 이동을 나타낼 경우 많이 쓰이며, 영화보다는 가벼운 장면 전환이 요구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많이 쓰인다. 시나리오에서의 약호는 DIS이다.”


  시 읽느라고 별 짓을 다 한다고? 그럼 어떻게 하나. 시인이 자기 시를 디졸브 방식으로 썼다고 주장하면서 독자 역시 디졸브 방식으로 읽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음에. 그러면 디졸브가 이런 뜻임을 숙지하고, 익숙하게 또는 충분히 알고, 좀 길지만 퀴어를 다룬 시 한 수를 읽어보자.



  *애정만세



  어제 이강생의 얼굴을 발견했다. 이강생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강생은 그 얼굴을 가지고 아시아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저게 바로 세계인의 얼굴이구나, 동성애자의 얼굴을 한 이강생의 얼굴을 보며 수많은 얼굴을 생각했다.


  해진 누나 애정만세 보세요.


  쓰고 나는 해진 누나의 얼굴을 떠올린다. 해진 누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해진 누나는 해진 누나의 얼굴을 가지고 해진 누나의 얼굴을 기억나게 하지 않는다. 해진 누나는 고개를 든 채로 해진 누나의 얼굴을 숙인다. 해진 누나의 얼굴을 눈앞에 두고 아, 저게 바로 누나의 얼굴이구나, 세계적인 얼굴이 해진 누나를 가지고 있다.


  나는 빛과 함께 침대 위에서 세계 속 미스터리를 본다. 빛의 얼굴은 잘생겼다. 눈과 코가 무엇보다 입이 있으므로, 뽀뽀를 한다. 뽀뽀할 때마다 빛의 얼굴은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슬픔 쪽으로 닭살이 돋는다. 빛의 얼굴이 보고 싶을 때마다 빛의 목소리를 듣는다. 해진 누나에게 애정만세를 보냈어. 이강생의 얼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해진 누나의 얼굴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빛의 얼굴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 얼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얼굴이 무수히 변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죠, 미스터리하다.


  이강생의 얼굴은 묘지를 돌아다닌다. 해진 누나는 우는 얼굴에 귀를 기울였다. 내 얼굴은 눈부시지 않다.


  **우리의 얼굴은 망가져갈 거야. 그렇지만 너의 얼굴이 먼저 보고 싶구나.


 (DIS)

  * 묘지를 산책할 때였다. 벤치에 앉아 얼굴을 떨어뜨린 여자가 얼굴을 줍지 못한 채 울고 있었다. 얼굴이 없으므로 숨죽여 흐느꼈다. 그 앞에 살아 있는 누나가 앉아 있었다. 누나는 떨어진 얼굴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누나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누나에게는 애정이 있다.


  ** 빛은 사실주의다/빛의 목소리를 듣고/빛은 사실이다/쓴다/  (전문)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먼저 제목 “애정만세”를 읽고, 사전적으로 보자면, 제목이 주는 감상이 사라지기 전에 아래쪽, 예전이라면 ‘각주’라고 불렀을 곳까지 시선을 끌어내려 “묘지를 산책할 때였다.……”를 페이드인 해야 하리라. 이 다음에야 시의 본문을 읽고, 마지막 “그렇지만 너의 얼굴이 먼저 보고 싶구나.”가 발음의 잔향 또는 뇌의 뉴런에서 사라지기 바로 전에 두 번째 디졸브인 “빛은 사실주의다/빛의 목소리를 듣고/빛은 사실이다/쓴다/”를 읽어야 한다. 아니면 * 표시가 된 각주 위치의 디졸브를 먼저 보고 제목을 읽는… 아니다, 이건 가능하지 않겠다. 습관적으로 눈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니까.

  여기에 독자를 애먹이는 다른 하나는, 디졸브, 즉 다음 페이드인 된 것들, 위의 시를 예로 들자면 “묘지를 산책할 때였다.……”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하겠다는 점. 이리하여 독자는 오늘도 김현의 미궁에 빠져 허덕이게 되고, 급기야, 각주인지 디졸브인지, 지랄인지는 더 이상 읽지 않고 본문만 딸랑 읽다가 4부 중간쯤 되면 대한민국의 현대시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침과 동시에 방바닥에 시집을 내팽개치며, 이거 팔면 얼마나 받을까, 궁금해한다.


  시인 김현이 차라리 산문을 썼으면 어땠을까? 다분히 독자를 위한 독자의 생각이지 시인을 위해 배려하는 건 아니다. 산문으로 쓴다면 위에 인용한 <애정만세>에서 해진 누나가, 이름이 해진이라서 해진 누나인지, 세상의 산전수전을 다 겪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닳고 닳아, 다시 말해 해질 대로 해져서 해진 누나인지도 알겠고, <애정만세>의 감독 자이밍량이 동성애자인 건 확실하게 알겠는데 자이밍량의 페르소나인 이강생이도 동성애자인지 적어도 시로 쓴 거 보다는 쉽게 알 수 있을 거 같다. 혹시 김현, 정말로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 아냐? 시집보다는 소설책이 값도 비싼데 많이 팔리니까 말이지.

  그런데 <방공호>라는 시를 보면 김현도 이런 독자의 안타까움 또는 이해불가의 답답함을 조금, 아주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것도 같다. 김현의 길고 긴 시를 전문 인용하기엔  ‘조금’ 어려운 일이라서 첫 다섯 연만 옮겨보자.



  밤낮

  라디오를 들었다


  사람이 살아 있는 이야기가 이야기되었다


  나는 밤낮으로

  우리는 죽었다는 말을 번복했다

  사람들은 나를 광인이라 불렀다


  삐에르, 누군가는 뜻을 알아듣는 말을 해야 한단다

  어머니는 말했다


  라디오는

  부질없는 인류를 작동시켰다



  적어도 삐에르, 광대, 재인, 예인, 시인이라면 누군가, 즉 무식하고 천하고 원래부터 상것인 독자님들은 뜻을 알아 처먹게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도 그걸 알고는 있을 터인데도, 왜 그토록 무식한 불상놈들한테 여전히 밀교의 모스 부호를 타전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우리 현대시집 골랐다가, 흠.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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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3-03 06: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디졸브 부분부터 빵 터졌습니다.^^

Falstaff 2022-03-03 07:51   좋아요 3 | URL
재미있으셨습니까? 시집이 오리무중이라면 독후감이라도 재밌게...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03-03 1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가.... 음 미스터리하군요. ㅎㅎ

Falstaff 2022-03-03 18:28   좋아요 2 | URL
미스테리오조 하기도 하고요, 미궁에 빠져 미노타우로스를 기다리는 것도 같았습니다. ㅠㅠ

mini74 2022-03-03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닳고 닳아 해진 누나인지 ㅎㅎ 골드문트님 말고 누가 이런 서평을 쓸 수 있을까요. ㅎㅎㅎ

Falstaff 2022-03-03 18:29   좋아요 2 | URL
아, 재미있었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되겠지요? ㅋㅋㅋ 다행입니닷!!!!!!

stella.K 2022-03-03 1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경우는 독자가 너무 착하신 것 같습니다.ㅎㅎ
저는 별 세 개도 아깝다 할 것 같은데...
저는 작가와 평론가끼리만 좋고 독자를 외롭게 하거나
당황스럽게 만드는 거 아주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ㅠ

Falstaff 2022-03-03 19:51   좋아요 1 | URL
흠.... 별 둘 까지는 아닌 것이 디졸브, 라고 해서 새롭지만 낯설고 독자를 뒤집어지게 만드는 양식을 마련했잖아요. 어떤 의미인 줄은 알겠더라고요. 디졸브를 통해 주장하는 바는 거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ㅋㅋㅋㅋㅋ
제가 보기엔, 평론가들도 매우 곤혹스러워 하는 거 같더랍니다. 이이 뿐만 아니라 요즘 시집을 보면 대강 그렇던 걸요. ㅎㅎㅎ
 
궁지 - 위스망스 단편 (구) 문지 스펙트럼 25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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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스-카를 위스망스, 라고 하면 뭔지 모르게 이름 하나 갖고도 엄청 폼이 난다. 세기말, 퇴폐, 아방가르드, 댄디즘 쪽으론 사실이기도 하고. 그러나, 처음 발을 담근 자연주의 소설로는 세기말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거 같아, 조금, 아주 조금 아쉽다는 아마추어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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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3-02 10: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설거지에 지쳐 노트북 펼치기 귀찮은 골드문트는 오늘도 100자평으로 ㅋㅋㅋㅋ

Falstaff 2022-03-02 18:57   좋아요 2 | URL
음하하하... 지금 저녁 먹고 설거지 하고, 놋북 열었습니다. 아, 귀신이셔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