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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윅 클럽 여행기 ㅣ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허진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평점 :
디킨스를 또 읽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제는 디킨스를 졸업했다, 라고 허튼 얘기를 했던가. 이것 참. 그래도 디킨스의 첫번째 장편소설이라니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고. 무려 1,256쪽까지 본문이 이어지고, 3만2천 원의 정가가 매겨진 비싼 벽돌임에도 불구하고, 자칭 디킨스 졸업생은 또다시 3만2천 원, 할인가 28,800원의 무게에 바들바들 떨면서 첫 페이지를 열어 읽기 시작한다. 한 시간쯤 눈에 힘을 주고 읽다 보면 초반부터 디킨스 특유의 수다와 해학, 그리고 풍자와 말장난이 넘실거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문장까지도 아니고, 한 귀절도 허투루 읽었다가는 기가 막히게 숨긴 디킨스 특유의 유머 코드를 놓칠 수 있다는 경계경보를 발령하게 된다.
예를 들어 픽윅 클럽의 종신 회장 새뮤얼 픽윅 씨를 보자. 독신을 고수하는 픽윅 씨는 대머리 속의 거대한 두뇌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으며, 이제 노년이 그리 멀지 않은 나이임에도 언제나 모험과 새로운 발견 같은 것에 관심이 많은 진취적인 성향의 전통적 잉글랜드 특유의 젠트리 계급이다. 당연히 일을 하지 않아도 남은 평생 풍족하게 살 만큼의 재정이 뒷받침하고 있어서, 작품을 시작하기 바로 전엔 벌써 거대한 햄프스테드 연못의 수원까지 탐색해 큰가시고기 이론으로 과학계를 흔들었다고, 우리의 디킨스 씨는 주장한다. 픽윅 씨가 탐험한 햄프스테드가 어딘가 하면, 런던 인근,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 주장이자 등번호 7번에 빛나는 손흥민이 살고 있는 동네다. 이 근처에 호수도 아니고 연못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못의 수원, 그러니까 과천 아래 수원 말고, 연못이 시작하는 샘을 발견했으며, 연못의 수생동물 큰가시고기, 최대 몸길이가 무려 11cm에 육박하는 민물고기에 관해서 이론은 무슨 이론을 세웠겠는가. 이게 디킨스 식 농담이다.
이 새뮤얼 픽윅 씨가 클럽을 만들고 직접 탐험과 과학적 결실을 맺을 정도로 활성화되자, 1827년 5월의 어느 날, 클럽의 종신부회장 조지프 스미거스 씨는 총회를 열어 클럽 산하에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많은 영역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픽윅 클럽 통신회’라는 이름의 소모임의 설립의 안건을 상정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소모임은 관찰한 분위기와 현장의 관습, 여행 전체에 대한 설명을 런던 소재 픽윅 클럽 본부에 제출해야 하며, 무엇보다 이게 중요한데, 우편료, 화물 운송료를 포함한 모든 여행 비용은 소모임에 참가한 회원들이 직접 부담해야 한다는 거. 이런 의무사항만 제대로 착착 이루어지면 클럽 본부는 소모임의 여행기간이 얼마나 길어지든지 간에 반대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자기들 돈으로 자기들이 여행하겠다는 걸 누가 말려. 하여튼 이렇게 구성한 소모임 ‘픽윅 클럽 통신회’ 역시 종신 회장 새뮤얼 픽윅 씨가 초대 소모임장을 맡는다. 이제 첫 여행을 떠나는 세 명의 회원을 보자.
먼저 트레이시 터프먼. 너무도 예민한 감수성의 사나이. 성숙한 어른의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소년의 열정과 열의 또한 소유한 이. 물론 가장 큰 열정은 여성을 향한 찬양이다.
두번째로 오거스터스 스노드그래스. 시인이라 불릴 만큼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시를 쓰고 싶어하는 문학적 취향의 사나이지만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작품이 끝난 다음에도 영원히 한 줄의 시도 쓰지 않고 생을 마감할 거 같다.
마지막으로 너새니얼 윙클. 스포츠 애호가이며 결투를 포함해 어떤 스포츠라도 부딪히면 일단 하고 본다. 그러나 아불싸, 세상에 이런 허당이 또 있을까. 그래도 명문가 아가씨 하나 옆구리에 꿰차고 도둑 결혼을 올릴 배짱은 갖고 있다.
이렇게 네 명의 소모임 멤버들이 여행을 떠난다. 이후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소설의 형식을 띄는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피카레스크 소설이 <돈키호테>라서 세르반테스의 전범을 따르기 위해 디킨스 식 산초 판사를 등장시킨다. 런던 입구에 예전엔 유명했으나 지금은 좀 쇠락한 ‘화이트 하트 여관’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새뮤얼 웰러. 그런데, 샘 웰러를 산초 판사와 직접 비교하면 샘이 매우 서운할지도 모른다. 젠트리 계급도 아니고 일개 마차꾼의 아들인 샘 웰러로 말할 거 같으면, 1,256쪽의 길고 긴 장편소설에서 가장 총명하고 기민하며 앞뒤 사정을 가려 가까운 미래에 어떤 결과가 초래할 줄 짐작하는 지혜도 가지고 있는 데다가, 한 번 맺은 사람간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아는 의리까지 겸비한, 말 그대로 최고의 마스터 키 역할을 맡았다. 만일 내게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물론 새뮤얼 픽윅 씨라도 대답하겠지만, 주연 못지않게 중요한 배역, 조연보다 우위의 준주연 급으로 이 샘 웰러를 꼽을 정도다.
사람도, 사업도, 소모임 ‘픽윅 클럽 통신회’도 첫발이 중요하다. 네 명의 소모임 동지들은 1827년 5월 13일, 드디어 골든 크로스에 모여 녹색 상의를 입은 낯선 젊은이와 함께 다섯 명이 로체스터 행 마차에 오른다. 회원들이 처음으로 만난 녹색 상의의 낯선 청년은 나중에 ‘징글’이라는 사기꾼 악당으로 밝혀지지만 하여튼 이 청년의 앞뒤 가리지 않는 행동 때문에 엉뚱하게 총 한 번 쏴본 경험이 없는 윙클 씨가 군의관이기는 해도 어엿한 군대의 장교와 결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곤란에 빠지게 된다. 하늘이 도와 사람이 다치는 결투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징글이란 청년과의 악연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래도 동시에 군의관이 속한 부대의 사열식에서 지역 유지이자 이저벨라와 에밀리, 두 명의 어여쁜 딸을 둔 워들 씨 가족과 사귀게 되고, 당연히 픽윅 씨를 추앙하는 젊은 동지들의 팔팔하고 뜨거운 피가 어떻게 어여쁜 따님들과 엮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니 첫 여행으로 고른 로체스터에서 징글과의 작은 악연과 함께 위들 가족과 크고 선한 인연을 맺는 셈. 특히 워들 가족과는 끝까지 깊고 아름다운 우정을 쌓는다. 게다가 진실한 종복관계가 되는 새뮤얼 웰러까지.
첫번째 장편소설이며 피카레스크, 소위 길바닥 소설이라 짧은 에피소드들이 숱하게 나열된다. 그래서 읽기에 부담이 없이 그냥 써 있는 대로 머리 안 굴리고 읽으면 그만이지만, 나중에 이 에피소드를 가지고 다른 작품을 만들기도 하니 그것도 염두에 두면 더욱 재미있을 거 같다. 예컨데 크리스마스에 묘지를 파는 불경한 교회지기한테 등장하는 고블린 이야기 같은 것. 이건 저번에 읽은 《크리스마스 캐럴》에 단편소설로 실려 있기도 하다.
“100년쯤 전에 세상을 떠난 어떤 남자가 아무도 가지 않는 어느 장소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다른 장소로 이어지는 작은 길을 막아버린 사건에 대한, 지루할 정도로 길어진 소송”(689쪽)은 무려 40년 동안 끝나지 않은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사건”을 다룬 <황폐한 집>을 떠올리게 하고, 많은 분량을 할애한 채무자 감옥 ‘플리트’는 여러 작품의 비극적 장면에서 등장한다.
물론 빅토리아 시대의 개막과 함께 출간한 첫 장편 <픽윅 클럽 여행기>인만큼 낡은 묘사도 디킨스 특유의 화법과 함께 무수하게 등장한다. 54쪽에,
“사정을 들은 윙클 씨가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로체스터 성의 중심탑이 갑자기 주춧돌에서 걸어내려와 카페 창문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해도 이보다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지나친 과장 같은 건 이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 읽어보면 촌스럽고 귀엽고 뭐 그래서 좋지 않나?
이제는 더 이상, “디킨스 졸업했다.”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속으로 생각하기에, 이만하면 디킨스는 된 거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2년 전에도, 3년 전에도 했으면서 눈에 보이기만 하면 읽게 되는 작가가 디킨스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