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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ㅣ 오늘의 젊은 작가 33
김희선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작가가 처음 낸 소설집 《라면의 황제》에는 대한민국 강원도 W시 상공 해수면 5백 미터 지점에 멈춘 우주선이 등장한다. 이 우주선은 베데스타 별에서 2만년 만에 지구 별로 보낸 일종의 수송선으로 인간들이 유전정보, DNA라고 오해하고 있는 우주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는 패스워드를 통해 자기네 종족과 통신을 할 예정이었다.
얼마나 발랄한 아이디어였나. 이 책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에서는 진한 산화철 농도 때문에 붉은 사막처럼 보이는 화성이 등장하고, 인간들이 만든 화성 기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을 제일 앞에 배치했다. 최근 피해자는 유럽연합 우주국 ESA 소속의 프랑스인 알랭. 그는 갈색나는 길쭉하고 단단한 것을 손에 쥔 채 죽어 있어서 물체의 정체가 무엇일까 독자의 관심을 끌지만, 곧바로 밝혀지기를 바게트 빵이었다. 왜 하필 바게트 빵을 가슴에 품은 채로 죽었을까? 유머 코드? 에이, 설마.
어쨌거나 이 연쇄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지구에서 도착한 과학수사대 대원 최가 등장한다. 최는 강원도 주문진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방학때마다 내려와 지내곤 했는데 한여름 마루에서 꿈을 꾸면 푸른 우주를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황량한 사막에 도착하면서 고함을 지르던 기억이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 진짜로 붉고 황량한 사막인 화성에 도착한 것.
여기까지가 삼헌광업이 바이오산업단지와 영화촬영세트를 유치한 W시 극동리에서 찍는 SF 영화 <배틀 온 마스>의 첫번째 장면이다. 그러니까 극중극 형식을 차용한 소설 속 영화장면.
이어지는 건 실제 극동리 주민 이만호 노인의 에피소드다. 요즘 바이오산업단지, 영화촬영세트장과 신재생에너지발전소까지 들어서는 바람에 큰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극동리에 관해 르포를 쓰고 있는 지방신문 기자 김영주가 카페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나중에 이만호 노인이란 것이 밝혀지는 한 노인이 회전교차로 앞 도로에서 주춤대며 발을 내밀다가 다시 거둬들이는 모습을 보고, 기자의 직감이랄까, 하는 것들이 발동을 했는지 그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한다. 노인은 급기야 교차로 중심화단에 들어가더니 교통신호 제어기 위에 전동 드릴을 끈과 청테이프 등을 이용해 단단히 고정시킨다. 그리고는 가방 속에서, 나중에 농약이라고 밝혀질, 자그마한 갈색병을 꺼내 뚜껑을 따더니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는 전동 드릴을 향해 돌진한다. 이 모든 것이 김영주 기자가 휴대전화를 통해 촬영을 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지며 드디어 맹렬하게 회전하는 드릴이 노인의 미간을 뚫어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목격한 김기자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만다.
21세기에 여성이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고 해서 기절을 했다? 마땅하지 않지만 이렇게 설정한 건 이유가 있다. 기절을 한 김영주는 병원에 입원을 하고, 전동 드릴로 스스로 자기 미간을 뚫어 뇌 한가운데에 있는 송과선까지 파괴해버린 노인도 이 병원 지하 2층의 안치실에 누워 있게 하기 위하여. 김영주는 기절을 하는 바람에 노인이 살던 동네 극동리의 이장 오구식을 비롯해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같은 신문사의 후배 기자인 최에게 전화를 해 안치실에 들어가 정확한 사인을 밝히게 한다. 검시의 김봉호는 농약을 마신 고통으로 인해 비틀대다가 우연히 돌아가던 전동 드릴에 다쳐 죽은 것이란 보고서를, 삼헌광업 회장 노이균의 부탁으로 작성을 했다. 하지만 검시의가 확신하는 진짜 사인은 전동드릴에 의한 뇌 천공이라는 것을 밝히게 된다. 죽을 당시 노인은 세 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를 꽉 쥐고 있었단다. 저 프랑스 남자 알랭이 바게트 빵을 쥔 채 죽어 자빠진 것처럼. 영화의 주인공은 과학수사대 최, 소설의 주인공은 지방신문 기자 최.
이 책은 1993년에 개봉한 영화 <육체 강탈자 Body Snatcher>, 우리말 제목 <보디 에일리언>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디 에일리언>은 화학전 담당 군부대 안을 잠식한 외계식물이 인간의 몸에 침입해 영혼을 빼앗아가 결국 껍데기만 남게 되며, 외계식물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식물은 결국 지구행성을 점령하리라는 우울한 결말로 끝난(다고 한)다.
소설 속 영화 <배틀 온 마스>에서는 바이오산업단지, 영화세트장, 신재생에너지발전소의 건설을 위해 대규모 개발을 진행해 땅이 마치 붉은 모래 사막인 화성의 표면처럼 변한 극동리를 무대로 쵤영하는데, 역시 기지의 모든 사람들이 화성 괴물에 의하여 몸을 빼앗기고 혼자 남은 최만 마지막 우주선을 타고 탈출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투자자들의 요구에 의해 결말이 바뀌기는 하더라도.
소설 <무언가……>는 신재생에너지발전소를 운영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산업폐기물을 수거해와 소각한 에너지로 발전을 하는 방식에서 필연적으로 엄청난 유독가스가 배출될 것이고, 이를 항의하는 일을 전동 드릴로 자기 양미간을 뚫어버리는 노인이 진행했으나, (그것, 산업폐기물 소각으로 인한 유독가스 생성과 연계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 일과는 전혀 관계없다. 오래 전에 현 노이균 회장의 아버지인 노원철과 한때 김일호라고 불렸던 과학자가 사람의 영혼을 이식하는 실험이 어떤 형태라도 성공했다는 전제에서 영혼의 무한번식을 통한 영생을 꿈꾼 이단아/이단아들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의하면 멀쩡한 내 몸에 다른 인간의 영혼이 들락거릴 수 있다는 것. 대개 유년기부터 사춘기 시절까지 누구나 한 번쯤 “나는 왜 나일까?”라는 질문을 해보았으리라. 영혼이란 뇌와 신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화학작용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현대 의과학의 설명이지만, SF 소설의 특권으로, 정말로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걸 예를 들어 전기 충격이나 고주파 등의 파장을 통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전이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전하고자 하는 영혼이 우주괴물 등 하여간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어야 될 거 같다. 자기 몸에 들어 있는 기존의 영혼이 책과는 달리 호락호락하게 자기 몸을 내줄 턱이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지.
그런데 영혼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나폴레옹 이전 시대까지 영혼은 심장에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근데 영혼이란 게 이동도 하는 모양이라서 이제 정든 곳을 떠나 눈 뒤편에 정착했으니, 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송과선, 비밀스러운 자리를 골랐다. 그래서 이만호 노인이 사용한 전동 드릴은 드릴의 길이가 최단 10 센티미터는 되어야 할 터이지만, 실제 전동 드릴을 보면 아쉽게도 강철 드릴의 길이가 그리 길지가 않다. 그러나 이런 걸로 시비하지 말자.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회전 교차로의 교통신호 제어기(회전 로터리에 교통신호 제어기가 필요한지 여부도 따지지 말자)에 전동 드릴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힘껏 자기 미간을 관통하게 하는 충격적인 자살 장면은 압권이다. 김희선이 즐겨 봤던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을 써도 좋았겠지만 사실 전기톱 자살 정도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어서 전동 드릴 만한 쇼크를 독자에게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
나는 김희선의 전작 장편 <무한의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큰 기대를 갖고 <무언가……>를 읽기 시작했지만, 아쉬웠다. 전개상 반드시 밝히고 넘어가야 하겠지만, 자살한 노인이 죽을 때 손에 쥔 종이에 적혀 있던 세 명의 인물과 관련한 에피소드 같이 극동리 사건의 핵심 스토리 라인의 보조 이야기에 공을 과하게 들인 것처럼 읽었으며, 결과적으로 정작 현 시점의 사건 전개가 생각만큼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주장이 합당하지는 않겠지만, 2월 23일 아침의 보고서는 독자로 하여금 “내가 과연 나인가?”라는 의문을 줄 수는 있어도 내가 읽기로는 난데없는 화해였다. 차라리 이날의 보고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물론 작가도 여러 버전을 염두에 두었다가 그렇게 마감을 했으니 작가가 옳고, 작가의 권리일 것이다. 독자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다.
더 말단으로 들어가서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한의 책>과 비교해, 아니, 비교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SF 소설을 표방했다고 해도 무리한 설정이 과하게 많이 보인다. 산만하게 이야기를 벌려 놓고 그냥 내버려둔 모양새다. 작가의 집필실에 조언자가 별로 없는 것 같아 아쉽다. 분량의 압박 때문에 마음대로 쓸 수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고. 뭐 사는 게 다 그렇다. 건필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