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대산세계문학총서 159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다작으로 이름이 난 엔도의 책은 두 권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종교에 관한 담론을 거북하게 여기는 내가 읽기에도 이이의 작품 속에 함의되어 있는 기독교는 별 부담 없이 읽는다. 기독교 소설이라면 학을 떼는 증상은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다 읽고 책을 덮은 즉시 생긴 거 같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기독교적인 취향은 조금은 알아봤지만, 이청준이 누군가. 가히 20세기 후반의 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해도 시비 걸만 한 사람 한 명 없을 대가 수준이잖은가 말이지. 그런 이가 <낮은 데로....>에서 그냥 노골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찬양하는데, 읽긴 다 읽었지만, 이후 우리나라 기독교 문학은 완전 손절했다.
  근데 엔도를 읽었느냐고? 그렇다. 제일 처음에 <깊은 강>을 읽었다. 책을 사서 읽을 때도 분명히 삶과 죽음과 영혼과 위로와 안식과 용서와 화해와 그리움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작가가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라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글 속에 감화, 감동이 가득했더란 것. 열두 살 때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하고, 스물일곱 살 때, 정작 유럽인들은 기독교와 결별하기 시작할 무렵 프랑스로 유학해 현대 프랑스 가톨릭 문학을 공부한 이력이 있는 작가는, 기독교에 아는 바가 없는 검은 양으로서는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같은 것인지 뭔지, 하여튼 일찍이 나를 질리게 했던 이청준과는 많이 다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기독교적 체험을 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내게 두 번째 엔도였던 <바다와 독약>을 고를 때 기꺼운 마음으로 책을 사 읽게 해주었다. 그리고 역시 책에 만족했다.
  이러니 이번에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 낸 <바보>를 어찌 읽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겠는가 말이지. 엔도가 쓴 이 책의 중요한 출연진으로 또 다른 엔도가 나온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호시노 파派 야쿠자 그룹에서 살인청부업자로 활약하고 있는 아직은 근육질인 결핵환자. 그에 관해서는 이 독후감에 등장하지 않을 것이니 그만 넘어가고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프랑스 남동부,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알프스 지역인 사부아 출신으로 대강 1930년대 초반 출생인 가스통 보나파르트라는 얼굴이 긴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원래 프랑스 사람들이라면 저 유명한 갈리아의 대 로마 독립전쟁 영웅 베르생제토릭스처럼 늠름한 기상과 기골이 장대한 족속이었으나,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느라 씨알 굵은 것들은 싹 죽어 자빠지고 자잘한 것들만 남아, 인구 유지를 위해 그거만 밝히는 현대의 프랑스 남자들이 발생했다는, 불문과 교수들의 발생학적 의견도 있었던 바이지만, 그래도 같은 프랑스 인들이 보더라도 커다란 덩치의 사내의 집안 내력을 보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마리아 발레프스카 부인 사이의 소생이 이 가문의 시작이라니 산 같은 가스통의 덩치 하나는 땅딸보 나폴레옹에서 물려받은 건 아닌 게 분명한 듯하다.
  그런데, 작품의 제목 ‘바보’는 일본말로 “おべカさん:오바카상”이란다. 역자의 해설을 보면 ‘오바카상’은 바보라는 뜻의 ‘바카’에다 존칭 ‘오’를 앞에다 붙이고, 뒤엔 ‘님’ 정도의 경칭인 ‘상’을 붙인 것으로, 우리말 ‘바보’, 청맹과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좋기만 해서 늘 손해만 보는 이” 또는 “어머니가 어리숙해 보이는 자기 아이가 귀여운 나머지 부르는 경우”에 쓰는 말로, 경멸의 명칭이 아니라 애정과 안쓰러움을 품고 있다고 한다. 뒤표지에서도 이 가스통 보나파르트를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미쉬낀 공작을 연상시킨다고 했을 뿐, 지적장애를 가진 또는 지적장애에 준하는 사람을 일컫지는 않는다.
  가스통 보나파르트는 어려서부터 덩치만 컸지 형제들,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나 웃음거리가 되거나 바보 취급을 받는 데 익숙한 인물. 사부아 지방에선 가스통 같은 친구들을 ‘포플러나무’라고 호칭했으니, 포플러의 최대 활용처가 성냥개비의 재료일 뿐으로 결코 재목이나 집의 기둥 같은 곳에는 쓸 수 없는, 허우대만 좋은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스통 스스로는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나폴레옹처럼 영리하고 강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만 위한 곳도 아닐 터이라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약하고 슬픈 사람에게도 무언가 보람 있는 삶의 방법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런 그가 왜 일본에 그토록 가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독자들도 모른 채 끝난다. 하지만 일찍이 포교신학교(布敎神學校)애서 낙제를 세 번이나 할 정도로 나쁜 머리를 가지고도 일본을 향한 꿈을 꺾지 않아, 끈으로 주둥이를 묶는 자루 같이 생긴 가방 하나를 메고 말레이 반도의 싱가포르에서, 8년 전에 펜팔로 알게 된 일본인 남자 다카모리에게 프랑스 선적 여행선 ‘베트남 호’를 타고 20일 후에 요코하마 항에 도착한다는 두툼한 편지를 보내, 이를 일요일 아침, 똑똑한 여동생 도모에가 달달한 늦잠을 즐기고 있는 다카모리를 깨워 이를 전해주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59년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이라 한다. 1959년에 중산층 정도의 삶을 살던 주인공의 집에도 라디오로 뉴스를 들을 뿐, TV가 없던 시절이니 신문소설의 위상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주말 드라마 정도로 장안의 화재를 몰고 다닐 수 있었을 것. 그러니 엔도의 <바보>는 앞서 읽었던 <깊은 강>이나 <바다와 독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엔도 나름의 경쾌한 걸음을 걸으며 시작한다.
  기분파인 오빠 다카모리와 현실파 동생 도모에가 요코하마 항에서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결국 배에 직접 들어가 가스통을 찾아보니 4등실, 배 밑창에 간단한 메트를 깔고 화장실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곳에서 깡똥한 바지를 입은 거구의 가스통을 찾아, 그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로 초밥집에 가는 장면이 초장에 나온다. 가스통이 너저분한 가방에서 마르세유에서 일본인 선원에게서 얻은 ‘일본식 냅킨’을 꺼내 목에 척 걸치는 순간, 남매를 제외한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으니, 그게 냅킨이 아니라, 예전 일본 남자들이 사타구니를 가리던 훈도시였던 거다.
  어머니와 도모에 등 집안의 여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장인 다카모리의 주장에 의하여 홈스테이를 하게 된 가스통은 도쿄 관광을 하라고 해도 그저 사찰 한 곳에 앉아 새들과 개와 아이들을 구경할 뿐, 도쿄 타워도, 가마쿠라의 대불大佛도 도무지 구경하려 하지 않는다. 왜 왔을까? 그는 결코 자신이 왜 일본에 왔는지 말하지 않고, 물을 때마다 “네?” 또는 “네에?” 하고 반문만 할 따름이다. 일주일 후, 가스통은 다카모리의 집에서 나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 집에 들어올 때 자신을 따라왔던 늙은 떠돌이 개와 함께 홀연히 도쿄의 시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한 밤에 도쿄의 신주쿠 방면으로 접어들게 된 가스통은 일본의 온갖 하층 시민들, 하층도 하층 나름인데, 가장 낮은 쪽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을 시작해, 매춘부, 이들에게 성을 사는 남자들, 벌집 같은 여인숙 등을 경험하며 매춘부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절도에 자신도 모른 채 연루되기도 하고, 매춘부들에게 도움을 받아 주린 배를 채우기도 하고, 전직 교장선생이었다고 주장하는 점쟁이 노인의 방에서 이와 벼룩에 물려가며 밤을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은 간다. 점쟁이 노인의 옛 제자가 저 위에서 말한 엔도. 작가와 같은 이름의 폐병쟁이 살인청부업자. 결국 이자와 맺어져 또다시 도쿄를 떠나 북서쪽 산골로 향하게 되는데, 그는 과연 누구일지, 이 선량한 바보를 통해 어떤 아름다움을 소개하기 위해 엔도 슈사쿠는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 홍해, 인도양, 태평양을 거쳐 프랑스 사람을 도쿄에까지 끌어들이게 되었는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니까, 당신이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음. 나는, 세상은 결코, 결코 이렇게 선량하게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꿈은 그냥 꿈일 때가 제일 아름다운 법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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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1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폴스타프 님 이거 리뷰 제목이 너무 시(詩) 아닙니까!
˝알프스에서 막 도착한 포플러나무˝라니........

Falstaff 2020-09-14 11:0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근데 맞잖아요.

coolcat329 2020-09-14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 가스통이란 인물이 <깊은 강>에 나오는 병원 자원 봉사자 가스통하고 굉장히 비슷하네요?그 가스통도 병원에서 약간 바보 취급도 받고 놀림도 당하면서 환자들에게 위로를 주는데, 같은 인물은 아니겠죠?

Falstaff 2020-09-14 14:34   좋아요 2 | URL
아, <깊은 강>에서도 가스통이 나오나요? 읽은지 오래라 기억나지 않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바보>의 가스통도 프랑스에서라기보다 싱가폴에서 출발했으니 오기 전에 인도에 들렀을 수도.... 뭐 걍 짐작, 생각입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0-09-14 15:3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도에 들른 포플러나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9-14 15:5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뭐 드릴 말씀이 없네요. 크... 1:0 졌습니다.

coolcat329 2020-09-14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일본 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나오는데, 스쳐가듯 나오는 인물이지만 좀 신비스러운 데가 있네요.태평양전쟁에서 인육 먹고 괴로워하는 친구 마지막 가는길 함께 해주고 홀연 사라지거든요.
 
영웅들의 꿈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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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 번째 읽은 ABC(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책. 카사레스는 스스로 ABC를 써서 서명한다. 그동안 읽은 책이 차례로 <모렐의 발명>, 단편집 두 권 《러시아 인형》과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모렐의 발명>도 해설까지 합해 187쪽에 불과해 장편이라고 하기는 좀 머쓱한 측면이 있는데, ABC하고 친구로 지냈던 보르헤스까지 합해 봐도, 이런 장르, 나는 이런 종류의 작품을 “아몰랑 주의”라고 하는 바, 아몰랑 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이 책처럼 작가 서문과 본문까지 근 400쪽에 이르는 긴 글을 쓸 수 있을 수 있을지도, 그걸 또 내가 읽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 <모렐의 발명>도 그렇고 단편 작품들도 그렇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던 관계로, 이 책을 사기로 결정한 것도 나름대로 결심을 하고, ABC하고 좀 친해질 수 있으려나, 기대를 담았던 것인데, 다행스럽다. 어느 정도 화해를 한 거 같다. 흠. 이 말을 더 쉽게 하면, 여태까지 읽은 ABC보다 훨씬 이해하기 수월했다는 뜻도 될까? 아마 그럴 거다.
  ABC라면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멕시코의 룰포, 쿠바의 카르펜티에르(!)와 더불어 두 번 이야기하면 입 아픈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붐 문학의 선구자. 그리하여 ABC 개인에 관한 건 그냥 넘어가고 곧바로 책 이야기를 하자.
  짧은 장편 <모렐의 발명>과 단편들을 읽으면서 웬만큼 난감했던 건, 작품이 짧다보니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더 압축해야 했을 터이고,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암호풀이에 더 골몰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엔 호흡을 길게 하니까 거의 끝부분에 가서 작가 스스로 마술적인 광경을 시작한다고 엄포를 놓을 때도 앞에서 뿌려놓은 이삭들을 잘 주워 모았다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충분히 포착할 수 있을 법하다. 문제의 마술적 광경에 관한 엄포 바로 이전에 가볍게, “시간은 한 번 지나가는 것”이란 요지로 이야기하지만, 그리하여 독자는 분명히 지금 한 이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란 짐작을 하기만 한다면, 이후 전개되는 소설의 절정을 별로 어려움 없이 즐길 수 있다. 그렇다. 즐길 수 있다. 물론 오르가슴 적 카타르시스까지는 안 된다. 그래도 ABC를 읽으면서 애초에 그런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을 터이니 이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터.
  때는 1927년. 사흘 낮, 사흘 밤에 걸친 카니발이 벌어지는 시기. 주인공인 21세 청년 에밀리오 가우나. 장소는 ‘좋은 환경’이란 뜻을 가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아우르키사. 에밀리오 가우나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있는데 이발사 마산토니오가 경마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 경마에 ‘별똥별’이란 망아지가 굉장히 유력하다고 하도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수중에 있던 35페소를 걸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로 별똥별이 별똥별 떨어지는 속도로 달려주는 바람에 35페소를 던져 1,068페소 30센타보를 벌게 된다. 여기서 68페소 30센타보는 이발사에게 팁 또는 사례금으로 주고 주머니에 1천 페소를 넣은 가우나. 이것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친구들하고 카니발에 가서 몽땅 써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
  다섯 명의 친구들. 라르센은 선한 마음으로 가우나와 진실한 우정을 쌓는 인물이고 이런 성향은 책이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 소위 영웅들은 발레르가 박사라는 사람을 마치 중심으로 단단하게 뭉쳐있는 똘마니에 불과하다는 것이 책을 읽어가면서 드러나지만, 이렇게 힌트를 주는 것도 작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 발레르가 박사라는 인물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 가우나가 꿈꾸었던 이상적이지만 결코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던 미래를 구현해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아 가우나 역시 이들 멤버의 일원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래 이들 그룹은 ‘발레르가 박사와 여섯 명의 청년들’로 구성된다.
  이들의 아지트는 바야우르키사의 카페 ‘플라텐세’. 친구들이 모여 가우나의 천 페소 탕진 계획을 듣고 하는 말 좀 보자.
  마이다나 : 기차역에 신문, 잡지 파는 가판대가 마침 매물로 나왔으니 사서 운영을 해라. 비록 다 허물어진 기차역이라 사람도 별로 없지만.
  페고라로 : 북쪽 지역으로 가서 전화 한 대만 놓으면 되니까 사무실을 내고 직업소개소를 차려라.
  안투네스 : 자기 아버지한테 빌려주면 한 달에 네 배, 즉 4천 페소로 불려줄 것이다.
  이렇게 우왕좌왕 하다가 결론으로 발레르가 박사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하니, 박사 왈, 카니발에 가서 몽땅 써버리는 것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노름으로 번 돈은 자비를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조언을 해 그렇게 결정을 해버린다.
  그래 당장 내일 카니발이 시작되니까, 오늘 밤에 벌써 불 끄고 잠든 우리의 대머리 이발사, 별똥별을 소개해준 마산토니오를 두드려 깨워 친구들과 함께 밤기차를 타고 비야데보토로 향한다. 여기에 빠진 딱 한 명의 친구, 라르센. 만일 주인공 가우나에 모종의 위험이 가까이 온다면 기꺼이 그를 위해 도와줄 수 있는 친구는 카니발 행을 포기했고, 나머지만 해적 차림을 하고 행진하는 가장행렬에 합세해 클럽, 카페 등을 전전하며 술독에 빠진다. 물론 비용 전부는 가우나의 천 페소로 지불하고. 이들이 먹고 마시고 처음 만난 여자들에게 술을 사주고 하는 것을 보니 192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천 페소가 지금 우리 돈으로 천만 원 이상 가는 것 같다.
  술 잘 마시고 이곳저곳에서 잘 놀았던 것 같은데 이발사 마산토니오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얼른,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자고 다음 날 가면 아내에게 큰 경을 치게 될 거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대열에서 사라져버린다. 하여간 이들은 카페, 거의 카바레 수준의 카페 ‘아르메논빌’에 입장해 가면무도에 참석하는데, 결정적으로 가우나의 눈에 띄는 포대 같은 옷을 입은 가면 쓴 아가씨. 그는 아가씨한테 접근해 춤을 추다가 당시 가끔 그렇게 했듯이 음악의 절반쯤 지난 후 다른 남자에게 파트너를 인계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 끝난 후 그녀를 찾아 카페를 뒤지다가 잔뜩 술이 취한 상태에서 술값을 내고 밖으로 나갔고, 눈을 떠 깨질 것 같이 아픈 머리통을 흔들어보니 벙어리 남자와 세탁부인 듯한 여자가 자신을 보살피고 있었단다. 이 벙어리는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건장한 체격으로 5부 리그 축구팀의 관리인으로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가우나는 밤 동안 벌어진 일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이 사육제의 마지막 날 밤, 우리의 에밀리오 가우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가우나는 사육제가 끝나서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야우르키사에 돌아와 직장인 람브루스키나 정비소에 다니며 현명한 마법사 타보아다에게 점을 봐, “운명은 강물처럼 미래로 흘러가지. 미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야. 거기서 자네는 지난주에 죽었고, 거기서 영원히 살고 있네. 거기서 자네는 이성적인 인간이 되었고 또한 발레르가가 되었네.”라는 희한한 말도 듣는다. 가우나를 비유하자면 이카타에 돌아온 율리시스나 황금사과를 떠올리는 이아손처럼 무언가 늘 그리워하며 상실감으로 가득한 인간이라나? 이게 무슨 뜻일까. 당연히 가우나도 물어본다. 그러나 현명한 마법사는, 예언할 수 있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복채 5페소를 요구하고 입을 다문다. 그래도 가우나는 마법사의 집에서 이 어리둥절한 말 외에도 얻은 것이 있으니, 마법사의 딸 클라라. 둘이 사랑하게 되느냐고? 물론이지. 달빛이 교교한 새해 첫날, 남반구니까 한여름 밤, 나신으로 강물에 몸을 담고 사랑을 나눈 후 결혼까지 하는데 뭘.
  거의 짐작은 하시겠지. 이 작품의 결말은 가우나의 잃어버린 사흘째 되는 밤을 찾은 일이라는 것을. ABC의 작품으로는 쉽게 읽을 만하다. 근데 ABC의 작품은 쉽게 권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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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9-1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모렐의 발명>을 갖고 있는데 몇번 들었다 놓았다 하다 아직 안 읽은 책들 중 한권이지요. 쉽게 권하는게 아니라고 하시니 읽어봐야겠습니다 (청개구리).
리뷰 올리실때 늘 줄거리 요약을 빼놓지 않으시니 대단하십니다. 워낙 집중해서 빨리 읽으시고 바로 리뷰 올리시니 가능한가요? 전 리뷰 쓸때 쯤이면 중간 중간 내용이 벌써 머리속을 빠져나간 경우가 많던데 말입니다.

Falstaff 2020-09-11 12:26   좋아요 0 | URL
<모렐의 발명>이 ABC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책이라더군요. 몽환 자쳅니다. 말이 필요없고 그냥 읽어보시면 ㅋㅋㅋㅋㅋ.
책 읽으면서 주요 내용은 조금씩 메모를 해 둡니다. 나중에 독후감 쓸 때 크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제가 기억력이 꽝이라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쓸 자신이 없답니다.
 
성벽 / 헌사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5
오장환 지음, 이기성 엮음 / 소명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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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장환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정도로 배웠다. 북으로 갔다는 딱 한 가지 이유로 그의 이름은 오랜 세월 ‘오O환’, ‘오X환’, 이렇게 표기되었고 이이의 대표작이 어떤 시라는 것도 몰랐다. 세월이 흘러 6.29 선언이 나온 1987년에야 창비에서 오장환 전집을 출간할 수 있었으니, 52시간? 좋은 세월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심하면 일요일에도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시절에 어떻게 이이의 시를 읽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이이는 내 머리 속에 그저 이름만 ‘오장환’이라고 기억되고 있었는데, 그것도 ‘오창환’이란 이름의 괜찮은 직장 후배 덕분이었으리라. 어쨌든, 이이의 시집을 샀고, 드디어 첫 장을 열어 읽어보니, 어째 시들이 좀 삐딱하다.
  일단 시집을 다 읽고 ‘나무 위키’, ‘위키피디아’, 네이버 검색을 해봤다. 대개 문인을 소개할 때, “몇 년도에 어느 동네에서 아버지 누구와 어머니 어디 모씨 사이의 몇째 아들로 태어나” 식으로 표현함에도, 이이는 그냥 1918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고 만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오장환 편에서야 글의 중간에 “그의 초기 시는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과 도시에서의 타향살이” 운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이다. 서자, 첩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평생에 걸쳐 얼마나 아픈 상처가 되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오장환보다 세 살 아래인 장용학도 그의 대표작 <원형의 전설>에서 주인공 이장李章을 사생아로 설정해 작품을 만들어, 이장을 통해 사생아로 태어나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니 오장환의 시어들이 어떤 때는 삐딱하고, 전체적으로는 퇴폐적 슬픔 속에 있음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내 취향은 아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성씨보(姓氏譜)>를 읽어보자.



 성씨보(姓氏譜)
오래인 관습 -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 온 일 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전문)


  서자 출신인 오장환이 내놓고 그까짓 족보란 것이 무엇이건데 사람을 우습게 보느냐고 일갈하고 있다. 이런 불만은 또 한 편으로 자신을 낳은 출신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향할 수도 있어, 역시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향수>에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어머니는 무슨 필요가 있기에 나를 만든 것이냐! 나는 이항(異港)에 살고 어메는 고향에 있어 옅은 키를 더욱더 꼬부려가며 무수한 세월들을 흰 머리칼처럼 날려 보내며, 오 오메는 무슨, 죽을 때까지 윤락된 자식의 공명(功名)을 기다리는 것이냐.” (후략)


  서자 신분으로 남들과 같은 인정을 받으며 살기를 포기한 오장환은 위의 시처럼 이항(異港), 멀리 떨어진 낯선 항구도시, 즉 ‘탈 고향’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다. 근본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똑똑하고 강건하고 지조 높은 슬픈 시인은 이래서 더 퇴폐스러운 고통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버리지는 않았을까. 이이는 일제 말기에도 붓을 꺾지 않았고, 그들에게 협력도 하지 않은 채 끝끝내 버텨냈다. “시인부락”의 동인이기도 하며 가장 친한 동무였던 서정주가 부일의 시를 쓰기 시작하자 다시는 만나지도 않았다. 시에서 카프 적인 경향성은 거의 보이지 않거늘 왜 1947년에 월북을 한 것일까.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현대시의 한 페이지는 거뜬하게 장식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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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0-09-1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자. 유럽에서도 심한 욕 중 하나가 이 서자같은 놈이라던데요 ㅠㅠ 오장환작가님! 기억해뒀다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0-09-11 16:27   좋아요 1 | URL
bastard, 서자, 잡놈, 악당, 개자식이 같은 말이잖아요. ㅋㅋㅋㅋ
저도 사실 잘 몰랐는데 몇 년 전부터 <왕좌의 게임>보면서 저절로 알게 됐습죠.
 
요셉과 그 형제들 5 - 먹여살리는 자 요셉 (상)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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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와 파라오의 친구이자 오른편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자, 궁인 또는 환관 페테프레의 집사로 10년을 지내 이제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때, 요망한 난쟁이 두두의 꾐에 빠져 요셉을 짝사랑하게 된 여주인 무트-엠-에네트의 욕망을 좌절시킨 대가로, 일개 노예에 불과한 요셉은 죄 없이 저 이집트 변방 섬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진다. 페테프레가 요셉을 아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법적인 명예-아내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었으니. 《요셉과 그 형제들》의 마지막 책인 <먹여 살리는 자, 요셉>은 요셉이 수용소에 입소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숨을 거둘 때까지를 그리고 있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아버지 야곱에게 편애를 받은 열일곱 살의 철없던 요셉은 누구나 다 자신을 조건 없이, 심지어 본인들 보다 더 사랑하는 줄 착각했다. 그리하여 함부로 자신의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고, 상속권을 의미할 수도 있는 베일 옷 입은 모습을 자랑한 대가로 삼 일 동안 마른 우물, 구덩이에 알몸으로 빠졌다가 은 20세겔에 이스마엘의 자손인 상인들에 팔렸다. 이번엔 요셉이 여주인의 욕망을 선한 의도로 다스려 자신이 여인의 비뚤어진 사랑을 교정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으로 인해 또 다른 구덩이인 수용소에서 삼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마지막 책에서 가장 큰 주제는 “준비와 대비”다. 아주 오래 전, 아쉬타르 여신이 길가메시(책에서는 ‘길가메쉬’)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신들의 왕인 ‘아누’를 찾아가 복수를 청하기를,
  “하늘의 황소를 만들어주세요. 그 황소가 세상을 짓밟고 콧구멍에서 불을 내뿜어 온 땅이 말라붙고 들판이 완전히 폐허가 되게 해주세요.”
  아누가 이에 묻는다.
  “그러면 7년 동안 가뭄의 해가 다가올 것이다. 해가 짓밟고 불태워 기근이 다가올 것이다. 결핍의 해를 맞을 준비는 했느냐, 그때 먹을 양식을 제대로 쌓아두었느냐?”
  “준비는 다 했어요. 양식을 쌓아두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아쉬타르, 네가 큰 수모를 겪었으니 하늘의 황소를 내려 보내마.”
  위의 장면은 5권 39~40쪽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아쉬타르 여신은 분을 이기지 못해 펄펄 뛰는 와중에도 자신이 바라는 불짐승을 얻으려면 미리 대비를 해야 함을 이야기했다. 창세기를 읽어본 사람은 책의 앞머리에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순간, 나중에 이집트와 중동지역 전역을 뒤덮을 기근을 대비하는 요셉이 생각날 것이다.
  또 하나의 키 워드는 “꿈.” 요셉의 별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꿈꾸는 자”인 바에, 꿈을 해석하는 능력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다.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오직 세상살이 하면서 세 번의 연애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풍채 좋은 40세 수용소장 마이-사흐메의 선처에 힘입어 행정조수로 일 년 동안 일하던 요셉은 단기간 수용 처분을 받은 두 명의 궁정 신하를 만나게 된다. 십 년 동안 페테프레의 집사로 있었던 안목으로 보아하니 이들은 파라오에게 간식과 빵을 주는 ‘멘페의 영주’와 파라오의 주방서기로 음료를 담당하는 ‘아보두의 태수’임을 알아낸다. 이미 다 늙어 오늘 내일 그저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파라오를 새삼스레 암살하기 위한 모종의 음모가 있었고, 이들이 음모에 연루가 되어 있는지 조사 중이라 조만간에 결판이 날 예정이란다. 이들이 한 날 각기 다른 꿈을 꾸고 궁금해 하던 차에 꿈 이야기를 들은 요셉.
  포도주 담당 주방 서기의 꿈만 예로 들자. 파라오와 함께 포도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덩굴손 세 개에 열매가 익기 시작하더니 탱글탱글 탐스럽게 자라나더라는 것. 자기는 왼손에 물이 반 정도 든 잔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포도즙을 짜 파라오에게 건네주었다는 꿈이다.
  요셉이 꿈을 풀기를, 잔, 맑은 물, 열매를 직접 따서 포도즙을 짜는 행위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공물을 의미하며, 세 개의 덩굴손은 3일을 뜻하여 사흘 후 생명의 물을 얻을 수 있단다. 게다가 파라오가 다시 그를 ‘테벤의 의로운 자’로 복권시켜줄 것이니, 그 때가 되면 파라오에게 요셉을 이야기하여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당부한다. 포도주 서기는 이에 기분이 좋아져 흔쾌히 약속을 하지만 요셉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미 두 번 구덩이 속에 빠져본 요셉은, 그가 역모에 관여하지 않은 이유가 경박하고 말도 많은 성격이라 공모자들이 이 사람을 끌어들이면 모의가 금방 탄로 날 것임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으니.
  정말 삼 일 후에 포도주 서기는 무죄방면 된 반면 빵 서기는 요셉이 정확하게 예언한대로 참수형에 처해진다. 이후 세월이 흘러 역모가 진압되자마자 파라오 아무호트페 3세는 숨을 거두고 아들이 왕좌에 올랐으나 나이가 차지 않아 일 년 동안 어머니, 즉 대비에 의해 수렴첨정이 이루어지다가 열여섯 살이 되어 정식 파라오의 업무를 시작한다. 이때 파라오 아멘호테프가 꿈을 꾼 것. 왕은 먼저 아직 권력의 맛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 아들을 조금 질투하고 있는 대비에게, 다음엔 대비의 권유에 의하여 남, 북 제사장인 ‘베지르’들에게, 이어서 요셉을 알고 있는 ‘테벤의 의로운 자’를 포함한 대신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지만 도대체 제대로 해석을 하는 인간이 없어 복장이 터지는 순간, 포도주 서기가 2년 전 자신의 꿈을 해몽해준 수용소의 행정조수 요셉이 번쩍 생각나 파라오에게 추천하고, 파라오는 즉각 사신을 보내 요셉을 데려오게 하니, 이 때가 요셉이 수용소에 보내진지 꽉 찬 3년이 되었다.
  파라오의 꿈. 강물 속에서 암소 일곱 마리, 황소는 하나도 없고, 진짜 튼실한 암소 일곱 마리가 나오더니 이어서 곧바로 흉해도 너무 흉한, 가죽과 뼈가 붙어 곧바로 굶어죽을 듯한 암소 일곱 마리가 뒤이어 솟아나와 먼저 나온 살찐 암소를 다 잡아 먹었단다. 살찐 암소를 잡아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흉한 암소들은 하나도 살이 붙지 않았다. 연이어 같은 날 또 꿈을 꾸었는데, 쟁기로 갈아엎은 검은 땅에서 일곱 개의 이삭이 솟더니 탱글탱글 황금빛 주렁주렁 열매를 맺더라는 것. 그러나 이어서 나온 또 다시 솟은 일곱 개의 이삭은 완전한 쭉정이로 다 말라붙어 죽은 거 같은데 동풍이 불어 쭉정이 이삭들이 풍성한 이삭에 닿은 순간 살찐 이삭을 다 먹어 치워버렸고, 그랬음에도 흉한 이삭이 통통해지지도 않더라는 내용이다.
  해몽은 다 아실 듯. 7년 연속의 풍년과 7년 연속의 기근. 요셉은 풍년이 들 때 양식을 저장하여 기근에 대비하기를 주장해, 왕의 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농림부 장관이자 총리 수준의 자리에 올라 왕의 유일한 친구, 왕의 작은 아버지라 불리게 됐다는 거. 그러나 요셉의 진가는 기근의 시절에 있다. 파라오에게 제시하기를, 풍년이 들었을 때 충분히 비축한 양식은 기근이 시작되면 식량 무기가 되어 이집트 내의 토호세력과 속지들을 싼 값에 구입해 왕실의 재산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인근 국가의 모든 부를 다 흡수하여 이집트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가로 만들 수 있고, 심지어 왕이 경계해마지않는 ‘아문’ 신을 따르는 집단의 힘마저 뺄 수 있다는 비전vision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신을 추앙하는 거 역시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물론 이런 비전 속엔 꿍꿍이가 하나 있기는 하다. 언젠가는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떨어진 아버지 야곱과 열 명의 형들 역시 식량을 얻기 위해 이집트로 올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때가 바로 자신의 저 오래된 꿈, 열 개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을 향해 절을 하고, 태양과 달, 그리고 열한 개의 별 역시 자신에게 절을 하는 순간이리라는 것을.
  이 책 《요셉과 그 형제들》은 놀라운 작품이다. 그러나 내놓고 이야기해서, 쉽게 읽을 수는 없을 것. 구약성서 가운데 적어도 창세기를 미리 읽어두어 앞 뒤 관계 또는 이야기의 진행 정도를 알아두면 좋고, 신화학, 인류학적인 정보, 프레이저가 쓴 <황금가지>의 선독이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무턱대고 책을 덥석 들었다가는 낭패 보기에 맞춤하지만, 다 읽을 수 있으면 참 좋은 책 한 편 읽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듯. 나도 어제 책 다 읽자마자 독후감을 쓰는 대신, 큰 책 한 편 읽은 기념으로 축배를 먼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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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9-14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성경 인물 중에서 요셉을 좀 좋아합니다. 좋아하는데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마는 잘 생겨서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런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셉 이야기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이 여기에요. 요셉이 꿈을 해몽해준 포도주 담당 서기에게 자신을 탄원한 부분이요. 이 책에서는 요셉이 그가 자신을 잊어버릴거라는 암시가 있었나봐요.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더냐. 나의 복권을 예언한 사람을 어찌 잊을쏘냐. 그가 잊었기 때문에 후에 요셉은 파라오를 직접 만날 수 있었을거라 전 생각하거든요.
대작 읽으신것 너무 축하드립니다. 폴스타프님 리뷰 통해서 저도 좋은 책을 읽은 듯 합니다. 감사해요^^

Falstaff 2020-09-14 20:11   좋아요 0 | URL
이 작품에서도 요셉이 무지하게 잘 생긴 청년으로 등장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 넘어서까지 동정을 지키는 절제의 사나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포도주 서기의 경우엔, 초장부터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로 딱 찍어 예언을 합니다. 나라에 무슨 일이 있어 요셉이 아니라면 풀 수 없는 문제가 나와야 자신을 천거할 거라고요. 토마스 만은 신화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라서,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반역자가 아닌 것이 아니고, 반역을 꾀하는 무리가 같은 편으로 하면 자기들 비밀까지 몽땅 주위에 흘리고 다닐 인물이어서 반역의 무리에 끼지 못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저도 무릎을 탁, 쳤지요. ㅋㅋㅋㅋㅋㅋ
교인이시면 한 번 도전해보실만 할 겁니다. ^^
 
요셉과 그 형제들 3 - 이집트에서의 요셉 (상)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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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과 그 형제들》의 세 번째 책.
  토마스 만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났던 인물. 리하르트 바그너. 그의 작품들을 보면 구구절절 말이 많다. 사실 극에서 행해지는 일들에 객관성을 주기 위하여 행위의 근거 또는 먼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지만 처음 듣는 사람들은 단박에 나가떨어지게 만든다. 우스개로 비교하는 인물이 자코미니 푸치니인데, 푸치니라면 두 시간도 안 돼서 단박에 이놈 저놈 다 죽이고 피바다로 극이 끝났을 이야기를 바그너는 삼박사일 동안, 그것도 하루에 네 시간 넘게 관객들을 자리에 앉혀놓는다는 거.
  딱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이 그렇다. 창세기 39장 1절에 말하기를,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작가는 이 한 줄을 위하여 무려 240여 쪽의 지면을 할애했다.
  만의 이야기는 요셉이 알몸으로 던져져 갇힌 마른우물 또는 구덩이에서 구출된 것의 의미로 시작한다. 요셉은 열일곱 살의 나이로 구덩이에 빠져 스스로 죽은 몸이 됐다고 여긴다. 왜 그랬을까. 그동안 죽음으로까지 내몰릴 정도로 잘못 살았다는 자각이 든 것. 죽음에 이르는 잘못, 즉 죄의 이름은 ‘신뢰’였다. 사람을 무턱대고 믿는 일. 그들의 한계를 무시하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 형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을 향해 절을 한다는 등, 해와 달과 열 개의 별이 자신의 별에 절을 한다고 신이 나서 떠벌인 일. 눈치 없이 케토닛 파심을 입고 형들에게 자랑하는 눈 먼 행위 등. 타인의 한계를 무시하고 무리한 요구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무턱대고 존중해준 나름대로의 사랑이 결국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거다. 그 결과 손과 발이 묶여 마른우물 아래로 던져진 것으로 그때 자신은 이미 죽었으며, 이스마엘 사람들로 꾸려진 상단의 사위 ‘밉삼’에게 구출되어 어두운 터널 속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본 것을 다시 태어난 행위로 여긴다. 마른우물 또는 구덩이는 그에게 죽음의 장소이자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대지의 자궁이며 산도였다. 그리하여 첫째 형 르우벤이 없는 상태에서 상인들에게 은 20세겔에 팔렸을 때도 아무런 이의나 항의 없이 조용히 이를 수락했으며, 아버지 야곱이 사는 동네를 거쳐 끝없는 행진을 할 때 역시 상단을 탈출해 야곱의 집으로 도망하지 않았던 것.
  요셉을 산 상단의 노인은 천생 상인. 평생 세상 구석구석을 다니며 온갖 것을 다 경험한 이 늙고 현명한 상인은 먼저 자신의 노예이자 상품인 요셉의 품질을 확인한다. 노인은 요셉의 몸과 더불어 재주까지 산 것이니. 요셉이 글을 쓸 줄 알고 셈에 밝다는 말을 듣고 삼 일 안에 상단의 모든 물품의 목록을 정리해 가져오라 요구하고, 언변이 좋은 것을 알고는 자신의 잠자리에 잠이 잘 올 수 있도록 밤 인사를 하라하니, 요셉 가라사대,
  “가볍고 유쾌한 꿈들아, 주인님의 평화롭고 달콤한 단잠에 예쁜 수를 놓아다오.”
  당시가 기원전 20세기 가량. 거의 모든 즐거움은 이야기의 구전으로 전해지던 시대에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사람들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재주였을 수도 있다. 그래 노인은 날마다 다른 말들로 밤 인사를 할 것을 요구하고, 요셉은 주인의 명령에 따른다.
  “요람을 흔드는 한밤의 팔에 안겨 그 가슴에 머리를 묻고 달게 주무셔요. 어머니 품에 안겨 새록새록 잠자던 어린 시절처럼.”
  여기에 삼 일 후, 정말로 자신의 물품 목록과 수량을 각기 색이 다른 글과 숫자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온 것을 본 노인은, 이게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고 요셉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주기에 이른다. 왕의 오른편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자, 왕의 친구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자의 집에 그를 팔기로. 노인이 감히 왕의 친구라 불리는 자를 아는 건 아니고, 그자가 사는 저택의 집사, 개신교 창세기에 ‘가정 총무’라 불리는 ‘몬트-카브’라는 홀아비를 안단다. 아브라함 시절부터 이왕 신을 섬기려면 가장 힘이 센 신을 섬기겠노라며 주님을 선택한 핏줄답게, 요셉은 부채를 들고 있는 자를 칭송하는 의미에서 그에게 황금을 매달아준 왕이 누구인지 물어보았고, ‘넵-마-레-아문호트페-님무리아’라는 이름을 들었다. 세상에나. 가장 화려하고 영예롭게 이름을 드높인 왕, 혁혁한 명성과 함께 영원 속으로 사라진 왕들의 후손, 저 아래 세상, 진창의 나라이자 죽은 자의 나라의 파라오였다.
  여기까지도 성질 급한 독자들은 이야기가 늘어진다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이스마엘 사람” 가운데 애굽, 즉 이집트까지 가서 요셉을 팔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대상隊商이었을 것이고, 이집트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파라오의 친위대장 페테프레, 즉 보디발에게 접근할 정도라면 요셉의 능력을 독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터이다. 여기에 하나 더. 당시 이집트는 세상의 중심. 감히 변두리 가운데서도 변두리인 이스마엘 족 떠돌이 상인이 어떻게 친위대장과 대면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저택의 집사마저 간신히, 요셉의 주님이 배려한 덕에 만날 수 있게 되며, 더 이상 하인이 필요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구리 200데벤이라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된 것. 그런데 토마스 만을 리하르트 바그너와 비교한 이유는, 이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대상 무리는 아시아, 아라비아 각처, 그리고 이집트 땅에 들어와 처음 밟은 고셈 지역 등의 성 쌓은 모습, 풍경, 특산물, 축제, 탈 것(낙타 또는 배 등), 국경과 도시를 지키는 병사와 세관을 통과하기 위한 그들과의 대화와 뇌물 상납, 상품 거래내역 등까지 모두 설명을 하는데, 좀 심했겠지? 그렇다. 심했다.
  하여튼 ‘오사르시프’라고 이름을 바꾼 요셉이 어쨌건 처음 본 이집트는 하下이집트의 스무 번째 주state로 소박한 육지라 할 수 있으나 풀이 우거지고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적당히 촉촉한 매우 비옥한 땅이었으니, 요셉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이곳의 살찐 초원을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벤야민을 비롯한 형제, 가족들을 불러 살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이 이집트 땅에서 반드시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하며, 이왕 서쪽 저승(이집트)의 나라로 갈 바에 일인자가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 열일곱 살짜리가. 대단하지? 역시 될 인간은 떡잎부터 다르다.
  이후에도 가히 장황하고 장대한 서술 끝에 드디어 페테프레(성서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간 우리의 요셉. 여기서 처음 만난 후원자는 난쟁이 세엔크-웬-노프레-네테루호트페-엠-페르-다문, 또는 베스-엠-헵, 또는 베지르, 또는 곳립.
  창세기 39장 7절에 말하기를,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페테프레 혹은 포티파르의 집에서 선량한 집사 몬트-카브가 죽은 이후에 그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는 긴 이야기는 모두 생략하고, 성서에 나왔듯이 보디발, 페테프레의 정실 아내 무트-엠-에네트가 요셉에게 반해 눈짓하고 동침하기를 청하는 장면으로 가자. 페테프레의 부모는 아버지가 ‘후이’, 어머니가 ‘루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이집트 사람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가문의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친 오누이가 결혼한 커플이며, 이들의 유일한 아들이자 자손인 페테프레는 거인의 풍모에 장사다운 힘을 지닌 완력의 사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부부관계를 ‘부글거리는 끓어오름’이라 일컬을 정도로 불결하게 보아 아들은 어두운 영역에서 끄집어내어 보다 순결한 자에게 바치려, 그만 양 다리 사이의 모든 돌출된 것을 잘라 궁신宮臣, 즉 내관, 내시로 만들어 파라오에게 바쳤던 거다. 그리하여 그가 맡은 친위대장이라는 호칭도 완전히 명예직이지 실제 친위대장의 역할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남성’ 장교가 모든 권한을 갖고 있던 상태였다고 상정했다.
  아무리 잘 생기고 현명하고, 똑똑하고, 말을 잘 하는 요셉일지언정, 왕의 친구, 훗날에는 ‘왕의 유일한 친구’로 격상되는 대갓집 중의 대갓집 마나님이 한갓 노예에게 눈길이나 줄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토마스 만은 또 다른 난쟁이이자 남성의 기능은 정상이라 보통의 여자와 혼인하여 키가 큰 아들 둘을 낳은 악당 난쟁이 ‘두두’를 등장시켜 친위대장부인이자 여주인 무트-엠-에네트의 눈길을 요셉에게 이끌리게 하고, 스스로 가운데 끼어 부인의 마음에 요셉을 깊게 새기게 만들며, 심지어 연서를 써서 요셉에게 건네도록 종용하고 전달까지 맡긴다. 여태까지는 동정녀로 남자를 전혀 모르다가 평생 처음으로 연정을 품게 된 궁신, 환관의 아내에게 당시 기준으로 중년의 나이에 찾아온 첫사랑, 첫 번째 육욕의 대상으로 전환해버린 요셉. 무트-엠-에네트를 향한 토마스 만의 시선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문서(구약성서)에서처럼 오직 자신의 육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눈짓’은 아니었다고 변호한다.
  그렇다. 이것이 연대기와 소설작가의 차이점이다. 연대기에 나와 있는 것 말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상황을 사람 사는 이야기, 그것도 타당할 수밖에 없는 전개과정을 상상하여 그럴 듯하게 만들어내는 이들을 우리는 소설가라고 부른다.
  토마스 만. 장황하고 장황하다. 간혹 질리기도 하고, 너무 오랜 시간 책을 들여다보느라고 피로해진 눈, 시각 때문에 고단한 때를 맞춰 장황한 장면이 나오면 확 질려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토마스 만을 읽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누가 있어 이리도 재미있게, 감히 성서의 행간을 뒤져 매력적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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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9-06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이게 3권에 대한 리뷰군요. 너무 재미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혹은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요셉에 대해 ‘택함 받은 사람이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거든요. 100에 98정도요. 근데 비교적 최근(15년 전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에는 요셉의 ‘눈치없음‘에 대한 또 다른 해석도 나오더라구요. 최초로 이야기했던 설교자는 기억이 안 나는데, 요는 요셉은 그렇게나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다는데 방점이 찍히지요. 요셉 좋아하는, 그의 스토리를 사랑하는 기독교인으로서 이 페이퍼가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네요. 저는, 이 시리즈를 다 읽을 엄두는 안 나고요. 폴스타프님이 올려 주시면 리뷰 정독하는 걸로 갈음하려 하오니, 부디 또 리뷰를 올려주시면 매운 반갑겠습니다^^

Falstaff 2020-09-06 20:12   좋아요 0 | URL
아, 기독교인이시라면 별 어려움 없이 읽으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
이제 독후감은 마지막 책冊, 하나 남았습니다. 아주 흥미롭더라고요. 원래 창세기가 출애굽기와 더불어 재미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성서 속에 생략되어 있는 사람 사는 모습을 이리도 적묘하게 잘 묘사를 하는지, 역시 토마스 만, 이름 값이 헛되지 않더라고요.
다음번엔 상인, 정치인, 책략가로서의 요셉이 등장합니다. ㅎㅎㅎ 정작 읽기를 마치니까 좀 아쉬운 감정도 들더라고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