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대산세계문학총서 159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다작으로 이름이 난 엔도의 책은 두 권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종교에 관한 담론을 거북하게 여기는 내가 읽기에도 이이의 작품 속에 함의되어 있는 기독교는 별 부담 없이 읽는다. 기독교 소설이라면 학을 떼는 증상은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다 읽고 책을 덮은 즉시 생긴 거 같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기독교적인 취향은 조금은 알아봤지만, 이청준이 누군가. 가히 20세기 후반의 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해도 시비 걸만 한 사람 한 명 없을 대가 수준이잖은가 말이지. 그런 이가 <낮은 데로....>에서 그냥 노골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찬양하는데, 읽긴 다 읽었지만, 이후 우리나라 기독교 문학은 완전 손절했다.
  근데 엔도를 읽었느냐고? 그렇다. 제일 처음에 <깊은 강>을 읽었다. 책을 사서 읽을 때도 분명히 삶과 죽음과 영혼과 위로와 안식과 용서와 화해와 그리움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작가가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라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글 속에 감화, 감동이 가득했더란 것. 열두 살 때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하고, 스물일곱 살 때, 정작 유럽인들은 기독교와 결별하기 시작할 무렵 프랑스로 유학해 현대 프랑스 가톨릭 문학을 공부한 이력이 있는 작가는, 기독교에 아는 바가 없는 검은 양으로서는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같은 것인지 뭔지, 하여튼 일찍이 나를 질리게 했던 이청준과는 많이 다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기독교적 체험을 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내게 두 번째 엔도였던 <바다와 독약>을 고를 때 기꺼운 마음으로 책을 사 읽게 해주었다. 그리고 역시 책에 만족했다.
  이러니 이번에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 낸 <바보>를 어찌 읽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겠는가 말이지. 엔도가 쓴 이 책의 중요한 출연진으로 또 다른 엔도가 나온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호시노 파派 야쿠자 그룹에서 살인청부업자로 활약하고 있는 아직은 근육질인 결핵환자. 그에 관해서는 이 독후감에 등장하지 않을 것이니 그만 넘어가고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프랑스 남동부,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알프스 지역인 사부아 출신으로 대강 1930년대 초반 출생인 가스통 보나파르트라는 얼굴이 긴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원래 프랑스 사람들이라면 저 유명한 갈리아의 대 로마 독립전쟁 영웅 베르생제토릭스처럼 늠름한 기상과 기골이 장대한 족속이었으나,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느라 씨알 굵은 것들은 싹 죽어 자빠지고 자잘한 것들만 남아, 인구 유지를 위해 그거만 밝히는 현대의 프랑스 남자들이 발생했다는, 불문과 교수들의 발생학적 의견도 있었던 바이지만, 그래도 같은 프랑스 인들이 보더라도 커다란 덩치의 사내의 집안 내력을 보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마리아 발레프스카 부인 사이의 소생이 이 가문의 시작이라니 산 같은 가스통의 덩치 하나는 땅딸보 나폴레옹에서 물려받은 건 아닌 게 분명한 듯하다.
  그런데, 작품의 제목 ‘바보’는 일본말로 “おべカさん:오바카상”이란다. 역자의 해설을 보면 ‘오바카상’은 바보라는 뜻의 ‘바카’에다 존칭 ‘오’를 앞에다 붙이고, 뒤엔 ‘님’ 정도의 경칭인 ‘상’을 붙인 것으로, 우리말 ‘바보’, 청맹과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좋기만 해서 늘 손해만 보는 이” 또는 “어머니가 어리숙해 보이는 자기 아이가 귀여운 나머지 부르는 경우”에 쓰는 말로, 경멸의 명칭이 아니라 애정과 안쓰러움을 품고 있다고 한다. 뒤표지에서도 이 가스통 보나파르트를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미쉬낀 공작을 연상시킨다고 했을 뿐, 지적장애를 가진 또는 지적장애에 준하는 사람을 일컫지는 않는다.
  가스통 보나파르트는 어려서부터 덩치만 컸지 형제들,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나 웃음거리가 되거나 바보 취급을 받는 데 익숙한 인물. 사부아 지방에선 가스통 같은 친구들을 ‘포플러나무’라고 호칭했으니, 포플러의 최대 활용처가 성냥개비의 재료일 뿐으로 결코 재목이나 집의 기둥 같은 곳에는 쓸 수 없는, 허우대만 좋은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스통 스스로는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나폴레옹처럼 영리하고 강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만 위한 곳도 아닐 터이라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약하고 슬픈 사람에게도 무언가 보람 있는 삶의 방법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런 그가 왜 일본에 그토록 가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독자들도 모른 채 끝난다. 하지만 일찍이 포교신학교(布敎神學校)애서 낙제를 세 번이나 할 정도로 나쁜 머리를 가지고도 일본을 향한 꿈을 꺾지 않아, 끈으로 주둥이를 묶는 자루 같이 생긴 가방 하나를 메고 말레이 반도의 싱가포르에서, 8년 전에 펜팔로 알게 된 일본인 남자 다카모리에게 프랑스 선적 여행선 ‘베트남 호’를 타고 20일 후에 요코하마 항에 도착한다는 두툼한 편지를 보내, 이를 일요일 아침, 똑똑한 여동생 도모에가 달달한 늦잠을 즐기고 있는 다카모리를 깨워 이를 전해주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59년 신문에 연재했던 소설이라 한다. 1959년에 중산층 정도의 삶을 살던 주인공의 집에도 라디오로 뉴스를 들을 뿐, TV가 없던 시절이니 신문소설의 위상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주말 드라마 정도로 장안의 화재를 몰고 다닐 수 있었을 것. 그러니 엔도의 <바보>는 앞서 읽었던 <깊은 강>이나 <바다와 독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엔도 나름의 경쾌한 걸음을 걸으며 시작한다.
  기분파인 오빠 다카모리와 현실파 동생 도모에가 요코하마 항에서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결국 배에 직접 들어가 가스통을 찾아보니 4등실, 배 밑창에 간단한 메트를 깔고 화장실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곳에서 깡똥한 바지를 입은 거구의 가스통을 찾아, 그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로 초밥집에 가는 장면이 초장에 나온다. 가스통이 너저분한 가방에서 마르세유에서 일본인 선원에게서 얻은 ‘일본식 냅킨’을 꺼내 목에 척 걸치는 순간, 남매를 제외한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으니, 그게 냅킨이 아니라, 예전 일본 남자들이 사타구니를 가리던 훈도시였던 거다.
  어머니와 도모에 등 집안의 여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장인 다카모리의 주장에 의하여 홈스테이를 하게 된 가스통은 도쿄 관광을 하라고 해도 그저 사찰 한 곳에 앉아 새들과 개와 아이들을 구경할 뿐, 도쿄 타워도, 가마쿠라의 대불大佛도 도무지 구경하려 하지 않는다. 왜 왔을까? 그는 결코 자신이 왜 일본에 왔는지 말하지 않고, 물을 때마다 “네?” 또는 “네에?” 하고 반문만 할 따름이다. 일주일 후, 가스통은 다카모리의 집에서 나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 집에 들어올 때 자신을 따라왔던 늙은 떠돌이 개와 함께 홀연히 도쿄의 시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한 밤에 도쿄의 신주쿠 방면으로 접어들게 된 가스통은 일본의 온갖 하층 시민들, 하층도 하층 나름인데, 가장 낮은 쪽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을 시작해, 매춘부, 이들에게 성을 사는 남자들, 벌집 같은 여인숙 등을 경험하며 매춘부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절도에 자신도 모른 채 연루되기도 하고, 매춘부들에게 도움을 받아 주린 배를 채우기도 하고, 전직 교장선생이었다고 주장하는 점쟁이 노인의 방에서 이와 벼룩에 물려가며 밤을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은 간다. 점쟁이 노인의 옛 제자가 저 위에서 말한 엔도. 작가와 같은 이름의 폐병쟁이 살인청부업자. 결국 이자와 맺어져 또다시 도쿄를 떠나 북서쪽 산골로 향하게 되는데, 그는 과연 누구일지, 이 선량한 바보를 통해 어떤 아름다움을 소개하기 위해 엔도 슈사쿠는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 홍해, 인도양, 태평양을 거쳐 프랑스 사람을 도쿄에까지 끌어들이게 되었는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니까, 당신이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음. 나는, 세상은 결코, 결코 이렇게 선량하게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꿈은 그냥 꿈일 때가 제일 아름다운 법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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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1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폴스타프 님 이거 리뷰 제목이 너무 시(詩) 아닙니까!
˝알프스에서 막 도착한 포플러나무˝라니........

Falstaff 2020-09-14 11:0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근데 맞잖아요.

coolcat329 2020-09-14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 가스통이란 인물이 <깊은 강>에 나오는 병원 자원 봉사자 가스통하고 굉장히 비슷하네요?그 가스통도 병원에서 약간 바보 취급도 받고 놀림도 당하면서 환자들에게 위로를 주는데, 같은 인물은 아니겠죠?

Falstaff 2020-09-14 14:34   좋아요 2 | URL
아, <깊은 강>에서도 가스통이 나오나요? 읽은지 오래라 기억나지 않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바보>의 가스통도 프랑스에서라기보다 싱가폴에서 출발했으니 오기 전에 인도에 들렀을 수도.... 뭐 걍 짐작, 생각입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0-09-14 15:3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도에 들른 포플러나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9-14 15:5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뭐 드릴 말씀이 없네요. 크... 1:0 졌습니다.

coolcat329 2020-09-14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일본 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나오는데, 스쳐가듯 나오는 인물이지만 좀 신비스러운 데가 있네요.태평양전쟁에서 인육 먹고 괴로워하는 친구 마지막 가는길 함께 해주고 홀연 사라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