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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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나보코프는 많이 읽은 줄 알았다. 근데 세어보니까 얼마 안 된다. <롤리타>, <재능>, <사형장의로의 초대>, <절망>, <창백한 불꽃>, <프닌>. 이렇게 장편소설 여섯 작품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근데도 무척, 꽤 읽은 듯한 기분이다. 아마 읽으면서 골치 깨나 썩이지 않은 책이 한 권도 없어서, 읽다가 갑자기 오리무중의 벌판을 더듬으며 가는 느낌이 들어, 읽다가, 읽다가 다시 저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은 경험이 많아, 나부코프, 하면 아예 지긋지긋했던 기억이 먼저 떠올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근데 문제는, 이렇게 골치를 썩이면서도 읽을 때마다 색다른 재미를 발견한, 내게는 특별한 작가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골치 썩이면 썩일수록 엑스터시를 느끼는 피학적 취향은 없다. 나보코프를 고생고생하며 읽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고나서, 거참 특별한 경험이었네, 이 비슷한 각성, 각성? 맞아, 각성 비슷한 희한한 경험을 갖게 한 듯하다. 참 별난 작가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은, 이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영어로 쓴 첫번째 작품인데, 책을 읽는 내내 이 책 읽기 이전에 어디서 좀 본 듯한 기분이 자꾸 들어서, 나보코프를 읽을 때 거의 예외 없이 탁, 꽂히는 특유의 색이랄까, 맛이랄까, 아니면 멋이랄까, 하는 기분이 좀 덜 든다. 그건 작품의 구성이 화자 V가 자신의 죽은 이복형 서배스천 나이트의 전기를 쓰기 위하여 생전에 관계했던 사람들과 사랑했던 여자 등을 추적하는 구성이라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좀 흔한 플롯, 맞지?


  서배스천 나이트와 그의 동생 V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

  젊은 근위병이었던 서배스천과 V의 공동 아버지는 1890년대 초에 이탈리아 로마 근교의 여우사냥 행사에서 아름다운 버지니아 나이트 양을 만나 순식간에 사랑의 화염을 불살랐다. 버지니아는 재산 깨나 있는 영국 신사 에드워드 나이트 씨의 딸로 근위병 장교이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위를 마땅하지 않게 여겼다. 장서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혼을 했고, 1899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옛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맏아들 서배스천을 낳았다. 아버지는 1904년부터 05년까지 있었던 러일전쟁 이후에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 작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 때는 버지니아와 갈라선 이후였다. 첫 아내 버지니아 나이트는 좀 이상하고 경박한 여자여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즉각 남편과 아들 서배스천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이때 네 살배기 첫 아이는 파리의 한 호텔에서 유모의 형편없는 보살핌을 받고 있었는 데도.

  그럼 계산을 해보자. 서배스천이 1899년 말일, 그러니까 지난 세기의 마지막 날 출생한 러시아인. 아버지는 1904년에 첫 아내에게 버림을 받은 다음해인 1905년 이후에 군인으로 성공을 해서, 1905년에 재혼을 하고 1906년에 둘째 아들 V가 태어난다. 맏아들과 이복동생 사이에 뭔가 있다. 한 세기가 바뀐 일이다. 서배스천은 생모 버지니아에게 침대차와 유럽횡단 급행열차에 대한 거의 낭만적일 정도의 기이한 열정을 물려 받았는데, 오랜 세월 유럽 국가가 되기를 갈망했던 반쯤 유럽국가이며 2등 유럽국가인 러시아인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탈 러시아를 실행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조건은 역시 돈이다. 서배스천의 외할아버지 에드워드 나이트 씨에게 버지니아가 무남독녀의 외동딸이라 그가 죽을 때 모든 재산을 전부 외동딸 버지니아에게 상속했고, 버지니아마저 일찍 죽어 그게 또 몽땅 서배스천에게 넘어왔던 거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서배스천은, 마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부르주아 러시아 가정의 영적인 우아함과 기품에 유럽문화의 가장 훌륭한 유산이 결합되어 지적으로 세련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문학적으로 매우 특출해 16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모든 시는 나중에 거의 폐기했지만, 각 시의 밑에 서명은 잉크로 그린 조그만 검은 색 체스 말 나이트Knight를 그렸다. 1912년 말에 아버지가 결투하다가 가슴에 총상을 입어 이후 회복하다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1913년에 숨을 거두었는데, 훌륭한 군인이자 유머러스하고 활기찬 모험가 기질의 아버지의 성향까지, 모든 좋은 것들을 물려받은 서배스천은 나이가 차자마자 계모와 이복동생 V를 떠나 어머니의 나라 잉글랜드로 가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시인, 소설가로 조금씩 이름을 내기 시작한다.

  근데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건, 1912년에 팔친이라는 경박한 남자가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첫번째 아내 버지니아에 대한 소문,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여간 헛소문인 것이 틀림없는 이야기를 쓸데없이 퍼뜨리고 다녔다. 이 소문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팔친을 찾아가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다. 피가 솟는 근위병 장교는 시절이 1912년 말, 이미 러시아에서 결투라는 단어가 사라졌건만, 자기 대리인을 보내 권총으로 결투하기로 정했다가, 그렇게 추운 날 아침, 눈 쌓인 숲 초입에서 가슴에 총알이 박혀 얼굴을 눈 속에 파묻은 채 쓰러져 버렸다. 자기 엄마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것이 틀림없으니 아무리 자기한테 잘 하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계모라도 낯짝이 있지 다 커서 성인이 된 다음에도 같이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 그래, 잘 떠났다.


  그러나, 십대 시절까지 러시아에서 러시아 말을 쓰던 서배스천이 영국으로 가서, 영어를 쓰는 시인, 소설가를 하자니 이게 쉽겠느냐고. 아무리 엄마가 영국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서배스천의 영어 속에 든 러시아 억양과 자모음 발음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을 터. 이렇게 지우려 해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는 러시아인의 흔적을 버리지 못한 채 서배스천은 작가 생활을 유지하고, 책을 몇 권 내고, 당연히 젊었으니 풋사랑도 하고, 연애도 하고, 진짜 사랑을 했다고 믿었으나 상대방은 심각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이거 미리 이야기하면 안 좋은데 이왕 썼으니 지우지도 못하겠고, 하여간 그래서 좀 묘한 사랑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서배스천의 생모 버지니아 나이트는 1904년에 남편과 아들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가면서 저절로 혼인관계를 청산하고, 1908년에 다시 나타나 자기 동서, 그러니까 서배스천의 계모이자 V의 생모에게 서배스천을 만나게 해달라고 무뚝뚝한 편지를 보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 객실에서 아들과 서먹서먹한 상봉을 하고 돌아가더니, 다음해인 1909년 여름에 남프랑스 로크브륀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심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희귀 유전질환인 레만병으로 죽어, 시신을 런던으로 옮겨 장례식을 하고 매장했다. 그러니 세바스찬 역시 많지 않은 나이에 정확한 병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심장병으로 거의 급사 수준으로 세상을 뜨는데, 이게 거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거라 더 이상은 말하지 못하겠다.

  하여간 나보코프는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서배스천 나이트가 자기와 거의 비슷한 처지, 즉 러시아에서 낳고 십대까지 보낸 작가가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을 써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보코프가 태어난 해이며, 작중 서배스천이 출생한 1899년이라는 해도 한 세기를 마감하여 마지막 19세기 인간으로, 결국 평생을 20세기에 살면서도 19세기 사람일 수밖에 없는, 1899년, 아니면 1890년대 사람이 아니라면 수긍은 하되 그리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태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즉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세대차이를 전제로 살아야 하는 팔자라면 말이 되나? 하여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읽기에, 초반에는 V. 나보코프답게 배 다른 형제와, 전처에 대한 헛소문 때문에 결투를 벌인 (다른 병과도 아니고) 근위병 장교 아버지의 가슴에 박힌 총알이라든지, 하여튼 참 나보코프다운 입심에 감탄을 하며 읽다가, 본격적으로 V가 서배스천의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피시식, 또는 푸시식, 열기가 식어가면서, 나보코프의 문장들도 급속하게 사변적으로 변해버린다. (물론 많이, 많이 다르지만) 마치 마르셀을 읽는 것 같은 기분, 마르셀은 소음을 없애기 위해 코르크로 벽을 둘러친 방에 누워 세상 만물과 만인과 한 명의 탄압받는 유대인 장교에 관해 사색을 했지만, 서배스천의 행적을 찾는 V는 오직 한 인간, 사실 많은 부분이 나보코프 자신이겠지만, 서배스천에 관한 사색과 추측과 명상적 추적을 벌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 잡는다. 마르셀이 그러했듯이. 그나마 분량이 적어 다행이지 아주 골로 갈 뻔했다. 본문이 겨우 240쪽까지. 다른 책보다 시간을 두 배는 더 썼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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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21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엘레나는 알고 있다>
화요일. 쥴퓌 리바넬리, <마지막 섬>
목요일. 마이클 온다치, <기억의 빛>
금요일. 니콜 클라우스, <위대한 집>

은하수 2025-02-21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보코프 많이 읽으신거 맞네요~~
전 롤리타 한 권 집에 있는데...
안읽혀요...
정말 재미 있는거 맞나요???^^







Falstaff 2025-02-21 16:23   좋아요 1 | URL
나보코프는 평생 어떻게 하면 독자의 수명을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작가 같습니다. 심할 때는 막 멀미, 근육떨림 현상을 넘어 위경련, 뇌경색의 위험이 있겠다 싶거든요. 재미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어디가서, 나 이래 봬도 나보코프 읽은 인간이야, 비슷하게 잘난 척하기는 무척 좋습니다. ㅎㅎㅎ
 
목련정전
최은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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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강원도 인제 출생. 내 처 할아버지가 인제에서 면장을 해 자셨는데 어디인고 하면, 지금은 소양강 댐에 수몰된 남면이라 소위 잃어버린 고향이다. 그래도 처갓집 사람들은 인제출신이라 하면 쌍수를 들고 반가워하며 한바탕 주민등록과 가족관계 증명에 관해 침을 튀어야 나머지 정상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하여간, 어쨌든 반갑다는 말이다. 나는 인제 버스터미널 뒷골목 막국수 집 돼지 수육과 막국수가 내가 먹어본 모든 수육, 막국수 가운데 최고로 친다. 아직 하는지, 벌써 접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그게 언제야, 20년은 확실하게 넘은 이야기이니. 춘천에서는 장미촌 옆에 있던 전통의 실비 막국수와 요즘엔 뻘건 양념 안 올린 부안 막국수집이 괜찮았고. 웃긴다. 인제 출생, 터미널 막국수집, 막국수 하면 춘천. 이게 뭐라고? 의식의 흐름? 그래. 그까짓 것 아무거나 흐르기만 하면 되는 거다.

  1978년생이니 외환위기로 나라 전반에 마른 수건까지 쥐어짜던 시절에 정말 우울한 20대를 지낸다. 와중에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등 재난까지 골고루 목격하고, 심지어 노무현의 대미 자유무역협상과 이에 따른 후속조치인 이명박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느라 촛불까지 켠 시대를 고스란히 보내는 와중에 2008년이 와서 서른살이 되었고 단편소설 <울고 간다>가 현대문학 신인상에 덜컥 당선을 하여 등단을 한 최은미. 최은미에게 서른살은 작가로서의 복이 터지는 기점이었나 보다. 2014년에 (큰 돈은 아니지만)대산창작기금 받고, 2014년과 15년에 젊은작가상, 2017년에 또 젊은작가상, 2018년에 대산문학상, 2021년에 현대문학상, 같은 2021년에 한국일보문학상까지 수집했다. 햐. 이거. 준다는 거 안 받을 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다른 작가는 평생 하나 받을까 말까 하는 이들이 쌔고 쌨는데 혼자만 줄창, 거의 해마다 굵직한 상을 받으니 좀 미안한 감도 들고 그러면서 또 글을 쓰겠지.

  이 책 《목련정전目連正傳》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간 각 문예지에 발표한 것을 2015년에 모아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결실이다. 모두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다.


  이제 눈이 그리 좋지 않아 <지위 게임>의 책등spine을 <자위 게임>으로 읽어 인간의 정치와 도덕적 신념 체계 구축이 자위행위와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까 잠깐이지만 정말로 고민해본 적이 있을 정도라서 《목련정전》이라 한글로 제목 쓰고 바로 아래 작은 글씨로 한자어 目連正傳를 붙인 걸 까무룩 보지 못해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목련 꽃 그늘 아래”와 관련된 아주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작품의 모음집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되게 흔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최은미라는 작가를 기억하고 있어서 선뜻 골랐는데, 아오, 최은미보다 약간 아래 젊은 작가들과의 사이에 굵고 검은 선으로 줄을 긋고 “여기는 내 땅” 하면서 확실하게 자기 영역을 만든 작가였다. 그래서 반가웠다. 비록 내 스타일하고는 맞지 않아서 앞으로 자주 찾아 읽지는 않을 것 같지만, 다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해서, 언젠가 한 번 말했듯, 한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씨 다른 형제 자매 같은 등단 동기/동문들하고 차별되는 개성을 가진 작가인 것이 좋았다. 내 취향이 아닌 것이 아쉬웠다.

  굳이 스타일을 표현하자면, <피로 물든 방>, <매직 토이숍> 그리고 <써커스의 밤>을 쓴 앤젤러 카터 족族으로 나눌 수 있겠으나, 카터와는 동서양과 활동 세기century가 다른 만큼 가까운 친족으로 보기는 힘들다. 같은 DNA를 상당한 부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

  한 때는 나도 앤절라 카터 그룹에 가입한 것을 자축하고는 했건만, 카터의 책을 읽고나서 벌써 4년 가까이 됐고, 그동안 새로운 작품 번역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아 연속성이 끊어져 그랬는지 이제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공포스럽고 조금은 엽기 그로테스크 정도만 생각날 뿐 스토리는 싹 증발되어 버렸다. 물론 나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지금처럼 독후감을 쓰는데, 앤절라 카터를 읽지 않고도 책 읽는 걸 포함해 일상생활에 별로 불편함이 없이 지내니 그걸로 됐지, 구태야 다시 카터 독후감을 꺼내 확인할 필요까지 느끼지는 않는다.


  최은미는, 흠, 엽기다. 진짜 엽기. 마치 우화 속의 괴물이나 유령 또는 산 사람들의 악의가 한데 뭉쳐 만들어 생명을 얻은 집단 친절. 악의가 뭉쳐 친절을 만들었다고? 그렇다. 훗날 더 큰 복수를 위하여. 유럽 고딕 소설의 경우엔 이런 비정상을 위하여 중요 등장인물의 외모에 특이점, 예를 들어 키가 무척 큰 여자 아이, 난폭하다고 이름이 난 기사 같은 인간들을 무대에 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최은미도 간혹 그렇기는 하지만 굳이 특징으로 보이는 수준은 아니고 그들이 주인공도 아닐 경우도 많다.

  두 번째 실린 <라라네>의 주인공 라라는 키 110센티미터에 몸무게 17킬로그램, 분홍 파자마 차림에 맨발이며 금발머리 마른 인형을 안고 있다. 집이 아니라 바깥에서. 즉 도망간 거다. 라라의 머리카락 길이는 50센티미터 정도여서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있지만, 아뿔싸, 옆통수 쪽을 엄마가 가위로 난도질을 해놓아 쥐가 파먹은 것처럼 보인다. 라라는 유치원에 다니니까 만 다섯살 (그러니까 이 소설책이 나올 때는 여섯 살이라고 부르던) 정도 되겠다. 집에 엄마, 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가 함께 살던 전남편은 술만 마시면 강아지로 돌변해 처자식과 가재도구를 두드려 망가뜨리는 데 선수여서 깨끗하게 이혼해버리고, 이후 너무너무 자유스러워진 엄마는 이후 마흔살이 될 때까지 총 네 명의 남자와 약 320번의 섹스를 즐기며 살았는데, 다섯번째 남자와의 섹스에서 결정적으로 피임에 실패해 라라를 낳고, 일년에 두 번씩 다섯번째 남자의 조상을 위하여 조기와 산적을 굽고 전을 부치는 신세로 바뀌면서 몸도 퍼지기 시작했다. 엄마 이름은 전나경. 전남편 사이의 딸이자 사실 이 집안을 안에서 꾸리는 유리는 휴대전화에 엄마는 이름이나 ‘엄마’라는 명칭 대신 “전나”라고 써 놓았다. 전나 재수없어서. 집안 일도 나 몰라라 하고 대낮에 해가 뜨도록 “전나 쳐 자서.”

  씨 다른 동생 라라를 아침 먹이고, 이 닦이고, 세수 씻기고, 머리 빗긴 다음에 손잡고 유치원 셔틀에 태워 보내고, 오후에 시간 맞춰 셔틀 오기 전에 기다렸다가 집에 데리고 와, 손 씻기고, 밥 먹이고, 노는 거 보고, 같이 놀기도 했다가, 저녁 먹이고, 재우면 그게 언니 보다는 엄마-언니에 가깝지 않겠어? 고등학교 다니다가 고등학교부터 이게 도무지 인간 사는 집단 같지 않아 때려 치운 데다가, 라라하고 나이 차이가 무척 나니까, 유치원 학부모, 요새 학부모가 어딨어 다 학모지, 학모. 학모들이 엄마야? 아이고 그럼 몇 살에 임신해서 몇 살에 난 거야? 넘 그렇다. 뭐 이런 수다를 떠는 것도 다 알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만큼 애늙은이가 된 지도 오래다. 그런 거 다 반응하면 제 명대로 못 산다는 것쯤 벌써 통달한 유리. 근데 언젠간 유리는 깨지지 않나?

  이런 라라는 한 편으로 도시빈민이기도 하고, 엄마한테 정이 떨어져 집 짓는 일로 될 수 있으면 먼 지방으로 오래 걸리는 작업판만 쫓아다니는 라라의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지만, 늘 라라 곁에 있는 게 아니라서 그리 도움이 되지 않고, 엄마는 제쳐놓고 생각해야 마땅한 마당에 그나마 믿을 건 언니 하나인데 아무리 언니라도 한 다리 건너 언니면 아이가 바라는 엄마급 애정을 줄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라라는 늘 애정에 굶주려 있기도 하다.

  근데 라라의 유치원에 머릿니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라라도 유치원에서 머릿니를 옮아와 만날 유리와 유리 친구 도미가 라라의 머릿니 구제를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어디 그게 쉽나. 게다가 어린시절부터 주로 인형을 갖고 놀기 좋아한 라라가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머리카락이 길고 긴 라푼젤이었던 만큼 자신의 긴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빽빽 울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 라라는 당연히 유치원에서 왕따를 당했고, 그래도 인형 비슷한 캐릭터에 정을 주며 꿋꿋할 수 있었는데, 인형만 가지고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언제부터인가 책상 모서리나 의자 가로대 같은 것으로 자기 다리 사이를 마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끔 조금씩 이후 점점 자주, 그러다가 지금은 아이들이 다 보는 데서도 자주.

  머릿니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모른 척하던 엄마는 라라가 유아 자위에 몰두한다는 유치원 선생의 전화를 받고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올라, 너 벌써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래? 결국 일찌감치 남자 만나서 아무렇게나 아이 낳고 나처럼 살게 되는 거야! 집에 딱 하나 있는 재봉가위를 찾아 날 선 가위날을 라라 얼굴에 대고는, 전나 무섭게, 유리더러 라라의 몸을 누르고 있으라 해놓고 썩둑썩둑 라라의 오른쪽 옆통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어찌어찌 엄마의 전나 겁나는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던 라라는 맨발로 꼭대기층 빌라에서 뛰어내려 그길로 사라져버리고, 라라를 쫓아 내려간 씨 다른 언니 유리는 동네에 보이는 사람한테 마다 외친다:

  키 110센티미어, 몸무게 17킬로그램. 분홍 파자마에 맨발이예요. 이름은 라라고요, 못 보셨어요?”


  이 <라라네>가 그래도 좀 순한 맛이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죽어 지옥에 떨어진 엄마를 기어이 천국으로 올려보낸 목련目連을 비유한 현대물 <목련정전>은 불교적 의식을 오늘에 되살려 현대인의 집요한 복수 집념을 우화적으로 쓴 표제작이다.

  목련, 목련木蓮꽃 할 때의 목련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 138, 139번으로 낸 <목련구모권선희문目連救母勸善戱文>을 참고하시는 것이 좋겠다. 2025년에 출간한 따끈따끈한 책이다. 재미는 없다니까 알아서들 하시고.

  최은미는 나하고 맞지 않아서 비록 나는 높은 별점을 주지 못하겠지만, 이이와 합이 맞는 독자들은 기꺼이 최은미 클럽을 개설할 정도로 자기만의 영토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 나는 최은미의 땅을 기웃거리는 수준이겠지만, 진심으로 바라노니, 앞으로도 번창하시라. 번창하기 바란다.




다만, 아쉽게도 내 취향과 워낙 거리가 있어서 별점을 셋밖에 주지 못했다. 내가 불민한 탓이니 작가나 팬을 비롯한 주위 분들의 양해를 바라마지 않는다. (흠. 내가 점점 소심해지고 있군. 그래도 얻어 터지는 거보다는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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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02-20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려다 눈으로 만든 사람 먼저 봤는데 그것도 독한데 전 오별 줬을거예요 ㅋㅋㅋ

Falstaff 2025-02-20 15:48   좋아요 1 | URL
앗, 오별! ㅋㅋㅋ 기회가 닿으면 얼른 읽어보겠습니다!

stella.K 2025-02-20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눈이 안 좋아지니 진짜 잘못 보는 글들이 늘어나더라고요. 예전에 그렇게 눈이 좋았는데.ㅠ
제목이 좋아서 저도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는데 목련이 그 목련이 아니었군요. 저도 엽기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 볼 확률은 거의 없을 것 같네요. 누가 버린 책이 마침 발밑에 떨어지면 모를까. 큭

Falstaff 2025-02-20 15:47   좋아요 1 | URL
정여사가 전에 ˝눈이 지물지물해서 책을 못 읽겠다˝라고 얘길 하시고 그랬는데, 지금 당시 책을 들춰보면 아이고 세상에 당시엔 활자가 그렇게 작았더라고요. 종이가 귀한 시절이었으니까요. ㅎㅎㅎ
쇤네는 참 다행스럽게 눈과 책 사이의 거리만 잘 보입니다. 안경 쓰는 것보다 더 잘 보여요. 근데 5미터 앞의 사람 얼굴도 누군지 헛갈립니다. 이거 팔자, 맞지요? ㅋㅋㅋ

망고 2025-02-20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비막국수 부안막국수ㅋㅋㅋㅋㅋ다 맛집이죠 이 리뷰에서 이 맛집들을 볼 줄이야ㅋㅋㅋㅋ

Falstaff 2025-02-20 15:09   좋아요 1 | URL
쇤네 어린 시절에 춘천에 MT를 자주 갔거든요. 80년대 초에 춘고, 춘여고 출신 후배들이 입학해서 걔네들이 가르쳐 줘 실비집에 처음 갔었습니다. 쐬주에 감자전, 총떡이 을매나 맛있었는지... 그땐 주방이 아니라 홀 바로 옆에서 기계로 직접 국수를 뽑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처남이 춘고 출신 대학 1년 후배(서른 초반에 서울 살림 접고 춘천 가서 아직도 잘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춘여고 졸업생이라서 ㅋㅋㅋ 저는 춘천하고 강원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농담인 거 아시죠?)

은하수 2025-02-20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은미 작품 중에 이 책이 이젠 오히려 좀 어색해요.
다음 작품들이 더 좋더라구요. ‘마주‘, ‘눈으로 만든 사람‘ 등이요.
이 작품은 솔직히 호불호가 많이 갈릴 거 같아요^^

Falstaff 2025-02-20 15:49   좋아요 1 | URL
단행본으로는 처음 읽은 최은미라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는 게 아쉽습니다. ^^
작품을 보면 탄탄한 팬 층을 확보할 수 있는 내공이 있는 작가 같던데요.
 
체 게바라의 빙산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의석 옮김 / 창비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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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엘 도르프만을 처음 안 건 지난 세기를 몇 년 남기지 않았던 시절, 칠레 출신 소설가의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는 우리나라 새싹들의 교육수준 향상을 위해 될 수 있는 한 많은 교육세를 내기 위해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어?)날이면 날마다 너도 진로, 나도 진로, 야야야야야야야야 차차차! 취생몽사, 두꺼비 사냥하느라 이사벨 아옌데도 그저 이름만 알던 시기였는데, 내 청춘시절과 마찬가지로 ‘정치군인의 군홧발’로 일컫는 군사독재를 경험한 동병상련 입장에서 도르프만의 단편집 《우리집에 불났어》가 나오자마자 사서 읽은 게 그것이었다. 이후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을 거쳐 은퇴한 이후 동네 도서관에서 희곡집 《죽음과 소녀》, 그리고 <체 게바라의 빙산>까지 읽게 되었다. <체 게바라의 빙산>은 관심도서 목록에 넣어두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웃기게도 책장이 떨어져 나가기 바로 직전일 정도로 낡았기 때문이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책 좀 읽는 사람들 입장에서) 늦게나마 이사벨 아옌데를 겪어가며, 처음엔 전혀 생각을 못했다가 조금씩 덜 유쾌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라틴 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경제적 부의 편중에 시달린 칠레도 오랜 독재시절을 겪고 있었다. 그러다 거의 기적적인 1970년이 도래하여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살바토레 아옌데가 “비밀자유투표를 통한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 놀라운 정치적 발전을 매우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했다. 군부? 군부 이전 칠레 정도는 한 방에 보내 버릴 수 있는 범 세계적 권력을 쥔 미합중국이었다. 그들은 (라틴)아메리카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소위 “도미노 이론”이라 해서 한 곳이 공산화 되면 그 영향력으로 인해 이웃나라 역시 공산화되는 건 시간 문제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나도 중학교 시절에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배웠다. 그리하여 미국은 의도적으로 보일 만큼 국제 동copper 가격 하락에 영향을 미쳐 칠레 경제의 가장 큰 축을 이루는, 세계에서 가장 순도가 높고 경제성이 좋은 칠레 북부 (태평양전쟁을 벌여 볼리비아한테 빼앗은)사막의 동copper 광산의 사업성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혹은 그렇다고 의심이 들 만한 조치를 취한다. 아무리 피노체트가 막 돼먹은 깡패새끼라고 하더라도 배 부르고 등 따신 인민들 앞에서 무턱대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없는 법. 이렇게 칠레 경제가 무너지고, 직접적으로 인민들의 삶이 곤고해지는 것을 신호로 공포스러운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대통령을 대통령궁에서 사살해버리고 1974년 12월 드디어 스스로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면 이후에 칠레 사람들의 가정형편이 좋아졌느냐고? 정치적으로는 불행했을지언정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다. 또는 그렇다고 한다. 당연히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세계에서 가장 완고한 보수주의 나라 미국 정부가 아옌데의 실각 이후, 북한과 대치하던 남한의 박정희 정권시절에 했던 것처럼, 칠레의 경제발전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다고 하는데 내가 주워들은 출처는 밝힐 수 없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

  칠레와 우리나라가 달랐던 건 뭐냐하면, 칠레는 워낙 길고 긴 국경선을 가지고 있어서 피노체트가 재수없고 살벌한 공포정치를 펼치자마자 지식층과 부르주아들이 약속이나 한 듯 보따리를 싸서 칠레를 뜨기 시작했는데 그 수가 백만에 육박했단다. 우리나라는 바다와 휴전선이 가로막혀 극히 일부만 이민 또는 망명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과 다르다(극성맞은 정여사 치마바람에 묻어 나 소년시절에도 하마터면 미국으로 이민 갈 뻔했다). 그런데 비행편을 이용하지 못하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주로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관문에는 유럽인의 후예가 아닌 저 선사시대 얼어붙은 베링해를 걸어서 건너 북아메리카에 도착하고, 이후에도 계속 걷고 걸어 칠레 남부 파타고니아까지 진출한 아시아계 원주민 마을이, 원주민 마을만 있어서, 다수의 망명에 잔뜩 신경질이 난 피노체트 정권은 꿩 대신 닭이라고 국경 근방의 원주민 마을에서 아무 고민 없이 대규모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도르프만의 드라마 <과부들>에 나오듯이.


  세상의 많은 망명객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주로 미국에 머문다. 칠레의 망명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조국에서 떠나도록 등을 떠민 피노체트를 지지한 나라의 품에 머물러서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조국 칠레의 현 권력자 피노체트를 비난하고, 그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반정부 세력을 위한 모금을 하는 등 나름대로 반 독재 활동에 참가한다. 피노체트가 자유민주 선거를 통해 실각하고 다시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이제 피노체트 시절을 청산하기 위한 대규모 숙청을 요구한다.

  나는 이게 좀 그랬다. 자기들은 조국 칠레를 떠나 뉴욕, LA, 멕시코시티, 부에노스아이레스, 리우데자네이루, 파리, 런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서 사업을 벌여 차곡차곡 여전히 부를 쌓으며, 이 가운데 적은 금액의 달러를 찔끔 모금해 조국에 보냈던 것을, 칠레에 남아 자기 목숨과 고문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며 죽기 살기로 반독재 운동을 했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투쟁과 견주는 행위 아닐까 싶다. 입으로만 열나 칠레의 민주화와 독재권력의 잔인함을 폭로하고자 했지, 그거 말고 뭘 했는데. 그러나 마음씨 넓은 사람들이 이해하자. 그들도 도운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해외각지로 몸을 피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은 목숨과 고문을 걸어야 했던 조국에 남은 자들에게 적어도 스스로 창피함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권력은 여전히 총구에서 나오던 시절이었다.

  칠레의 이사벨 아옌데와 아리엘 도르프만. 이이들도 피노체트가 집권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나 그가 실각한 이후에 다시 돌아왔거나 여전히 사는 건 미국에서 살면서 칠레를 무대로 한 작품을 쏟아낸다. 아옌데와 도르프만 선생? 여지없는 에스파냐의 딸과 아들이다. 말로는 위에서 말했듯 빙하기에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까지 멀고 먼 여행 끝에 자리잡은 원주민의 세월을 노래하지만 스스로 에스파냐 후예의 자격으로 아메리카의 발견이라는 “아메리카의 탄생 5백년”을 입에 올리는 백인 부르주아이자 약탈자의 후예들.

  반면에 다음 주 금요일에 독후감을 올릴 니콜 크라우스가 쓴 <위대한 집> (문학동네 2020 출간) 또는 <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2011년 출간)에서 오직 과거시제로 등장하는 유대계 칠레 시인 다니엘 바르스키는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조국에서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칠레의 민주화를 위하여 기꺼이 귀국을 선택해 이후 행방불명된다. 작중 등장인물들이 고문 끝에 학살을 당한 수천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이라 여겼는데, 작품 후반에 접어들면 고문을 당하기는 했지만 목숨은 겨우 붙어있는 처지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크라우스는 칠레하고 관련이 없는 작가이다. 칠레하고 관련이 없어서, 그래서 작중 등장인물이 뉴욕에 잘 있다가 자진해 귀국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체포당하는 비극을 맞는 반면, 실제로 칠레 부르주아 출신인 아옌데와 도르프만의 주인공들은 서둘러 조국에서 탈출하고 죽자사자 글만 써서 칠레의 정치군인들을 향해 공갈포를 터뜨린 것일까? 뭐 그렇다는 거다. 사람 사는데 뭔 일인들 벌어지지 않겠나.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개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강남좌파라고 하거니와....


  여기에 우리나라 메이저 출판사 창비는 한술 더 뜬다. 원래 제목을 영어로 하면 “The Nanny and the Iceberg” 즉 “유모와 빙산”인데 2004년 초판 출간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던 체 게바라의 이름을 따 <체 게바라의 빙산>이라고 제목을 정했다. 체 게바라고 알려진 에르네스토 게바라Ernesto Guevara는 아르헨티나에서 출생한 낭만적 혁명가로 쿠바혁명, 알제리 독립투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한 이후, 볼리비아로 건너가 내전에 관계하던 중 체포되어 1967년 10월 9일에 처형당한 쿠바인이다.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인물로 체 게바라의 죽음은 당대 전 라틴 아메리카 청년들의 추모와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칠레도 마찬가지였다. 1967년 10월 10일, 체 게바라가 처형을 당한 다음날, 칠레 산티아고에서도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있었고, 군중 속에는 가출 청소년을 전문으로 찾아주는 사립 탐정이면서 심리분석가로 활약하기 시작한 끄리스또발 매켄지와 그의 은사 가야르도 교수의 딸 밀라그로스도 있었는데, 매켄지는 한 눈에 밀라그로스를 발견해 위험할 수도 있는 산띠아고 시내에서 가장 안전할 수 있는 호텔로 즉각 데려가서, 했다. 당시 끄리스또발의 나이 25세.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이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생물체였으니 25세가 되도록 동정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18세를 갓 넘은 밀라그로스는 지극히 정상인이라 당연히 처녀는 아니었고. 하여간 이 두 청춘이 한 명은 난생 처음으로, 다른 한 명은 별로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로, 경험이 있는 다 큰 사람이 보기엔 무모하게도 콘돔도 착용하지 않은 채로 조금은 서툴게 일을 치루었고,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콩을 깠”는데, 단 한 번 깐 콩으로 불과 며칠 후 밀라그로스의 자궁벽엔 ‘나’ 가브리엘 매켄지의 수정란이 착상을 했으며, 아직 착상도 하지 않은 밀라그로스의 상태를 찢어진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지닌 원주민 마뿌체 족 출신 유모는 한눈에 알아봤던 거였다.

  세월이 흘러 15세가 된 ‘나’ 가브리엘 메켄지는 당시에 첫 망명장소인 멕시코시티에서 살았는데, 썸을 타는 여자아이 재니스의 부모가 하루 집을 비운 사이 놀러가 재니스의 엄마가 새로 산 근사한 중고 소파 위에서 서로 홀라당 옷을 벗고 생전 처음 그걸 해보려 했다가, 아뿔싸, 다른 건 다 준비완료 상태이지만 딱 하나, 콘돔을 사오지 않아 결국 가브리엘 신체의 극히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게 재니스의 몸에 침투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여전히 하늘을 향해 벌떡 서 있는 물건을 그냥 달고 집에 온 아들을 바다보는 엄마 밀라그로스한테는 자신의 유모가 보여주던 관심법의 능력이 없어 드디어 아들이 딱지를 뗀 것으로 인식하고, 그동안 크면 알려주겠다던 가브리엘의 탄생 과정을 말해주기에 이른다.

  “1967년 10월 9일에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처형당하지 않았더라면 10월 10일에 산티아고 시위가 없었을 것이고, 시위가 없었으면 네 아버지 끄리스또발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니, 너 또한 만들 일이 아예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체 게바라가 죽었기 때문에 네가 사는 거다. 간단하게 말해서 네가 숨쉬는 것도 그 사람 덕분이란다.” 더 쉽게 말하자면 체 게바라가 아들 가브리엘을 위하여 죽었으니 가브리엘 한테는 체 게바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등학교 동창쯤 된다는 말씀. 이제 창비가 왜 제목을 <체 게바라의 빙산>이라 했는 지 이해하시겠지?

  이 정도로 독후감은 끝내자. 어차피 절판이라 읽고 싶으면 헌책을 사든지 도서관에 가야 한다. 끝내기 전에 딱 하나만 더. 주인공의 아빠 이름이 끄리스또발. 창비식 발음을 수정하면 크리스토발. 영어식 이름으로 크리스토프. 누구의 이름이라고? 맞다. 희대의 바람둥이 돈 후안과 함께 에스파냐 세비야에 잠들고 있는 신대륙의 발견자 크리스토프 콜롬버스. 끄리스또발이 총각 딱지를 떼고 25년이 더 흘러 50세가 되는 해는 크리스토프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해 “아메리카의 탄생 5백년”이 되는 해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라틴아메리카 인이기 이전에 그냥 에스파냐의 후예라니까.

  이크. 오랜만에 집에 온 작은 아이가 얼른 노트북 덮고 돼지갈비 먹으러 가자고 한다. 아무렴. 문학보다는 돼지갈비에 낮술 한 잔이 훨씬 좋지. 오냐, 간다 가. 독후감 얼른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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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18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이라면 ‘비(非)-’를 안 붙인다. 우리말이 아니라서 ‘非-’를 붙인다. 우리말이 아닌 쓰레기 ‘非-’는 먼저 옆나라 일본 우두머리가 ‘비국민’이라는 말을 지어서 퍼뜨리는 곳에서 싹텄다. 일본 우두머리가 일으키는 싸움짓을 따르지 않으면 “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야!” 하고 윽박지르면서 두들겨패고 사슬에 가두었고 죽였다. 일본 옆나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숱하게 ‘비국민’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어야 했고, 일본에서도 숱한 사람들이 ‘비국민’ 손가락질에 따돌림을 받으며 죽었다.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모든 일본놈’이 우리나라를 사슬터(식민지)로 삼지 않은 줄 안다. 제대로 안 읽는 사람이라면, ‘그저 일본놈’이라고 뭉뚱그린다. 그런데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얼뜬 일본 우두머리’하고 맞섰는가? 아니다. 일본총독부가 남긴 밑동(기초자료)을 보더라도 이 나라 ⅓쯤은 오롯이 ‘일본바라기(친일부역)’를 했다고 여긴다. ⅓쯤은 슬쩍 발을 담갔고, ⅓쯤은 일본에 맞서거나 시골에 숨었다.

한겨레라 하더라도 일본 우두머리보다 모질고 사납게 한겨레 등골을 파먹은 무리가 버젓이 수두룩하다. ‘일본놈’이라지만 일본에서도 ⅓쯤은 앞장서서 일본 우두머리를 나무라고 맞서다가 이슬 한 방울로 스러졌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백인 부르주아 약탈자’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데, 터럭만큼도 옳을 수 없다. ‘흰살갗(백인)’도 ⅓쯤이 힘꾼(권력자)이라면, ⅓쯤은 살짝 발을 담그고, ⅓쯤은 맞서거나 종(노예)으로 뒹굴었다. 나고자라기로는 하늬(유럽)이되, ⅓쯤은 시골과 들숲바다에서 맨손으로 논밭을 일구고 살림을 지었기에, 이들 살빛은 ‘까무잡잡’했다. 일본을 거쳐서 우리나라에서도 꽤 사랑받은 《초원의 집》이라고 하는 ‘로라 잉걸스 와일더’라는 ‘흰살갗 집안 시골 할머니’가 쓴 글이 있는데,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뿐만 아니라, 이녁 언니동생도, 이녁 엄마아빠도 그저 ‘까무잡잡한 살결인 흰사람(백인종)’이었다. 하루 내내 들에서 해를 쬐면서 일했으니, 적잖은 ‘흰사람’이라 하지만 ‘까무잡잡 살갗’인 사람이 많다.

겉모습(인종)만으로 사람을 가를 적에는 언제나 잘못 보면서 ‘안 옳은 말’을 ‘정치적 올바름’으로 외치게 마련이다. 모든 한겨레(한국사람)가 참하거나 착하거나 옳지 않다. 모든 일본놈이 끔찍하거나 멍청하거나 꾀바르지 않다. ‘겉모습으로 뭉뚱그리는 굴레’가 아니라, 낱낱으로 ‘사람’을 보고, ‘사람이라는 마음과 숨빛’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흰살갗이라서 모두 사납빼기(약탈자)이지 않듯, 돈꾼(부르즈아)이라서 모두 사납빼기이지 않았다. 가난뱅이(프롤레타리아)라서 모두 착하고 참했을까? 터럭만큼도 아니다. 가난뱅이여도 사납빼기인 사람이 수두룩하다. 가난뱅이여도 돈꾼보다 넉넉하면서 아름답게 살림을 지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겉모습이 아닌, 껍데기가 아닌, 허울이 아닌, 허깨비나 허수아비가 아닌, 이제는 그저 “일하는 나”와 “일하는 너”와 “일하는 우리”를 마주보고 이야기할 때라고 본다. “살림하는 나”와 “사랑하는 너”가 만나서 “푸른별을 푸르게 일구는 새길”을 이야기할 때라고 본다.

Falstaff 2025-02-18 08:18   좋아요 0 | URL
옳은 말씀입니다.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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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에서 작가의 바이오는 그리 필요한 것 같지 않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면 좀 섭섭하니 위키피디아를 한 번 뒤져봤다. 1967년 동베를린에서 물리학자, 철학자, 작가인 John 에르펜베크의 딸로 태어났다. 독일인 John을 ‘욘’이라 해야 하는지 ‘존’이라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알파벳으로 적었다. 예니의 엄마 도리스 킬리아스는 특이하게도 독일 내 아랍주의자이며 번역가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아기브 마푸즈의 작품 번역에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특이하다는 것이지 아랍주의자라고 해서 나쁘다는 의미는 1도 없다. 괜히 오해하지 마시라. 무슬림은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다. 그렇게 많은 인류가 숭상하는 종교가 나쁠 턱이 없다. 교리를 이상하게 해석한 종교인 몇 몇이 문제일 뿐. 하여간 예니 에르펜베크는 적어도 할아버지 시대부터 상당히 문화적인 가족 분위기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5년에 베를린 고급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제본공 견습과정을 마친 후, 수작업으로 책을 만드는 일이 도움이 되었는지 이후 1년 동안 극장에서 소품 및 의상 감독 일을 하다가 1988년에 유명한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 입학해 연극을 전공한다. 이후 과를 바꾸어 한스 아이슬러 음악원에서 음악극 연출을 공부해 벨라 버르톡의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의 성>을 졸업기념으로 연출한다. 이후 그라치 오페라하우스 조감독 등의 커리어를 쌓으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주요 오페라하우스에서 경력을 이어 나간다. 위키피디아에서 볼 수 있는 레퍼토리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핸델의 <아시스와 갈라테아>, 모차르트의 <자이데> 등 주로 바로크 쪽이다. 스무 살 많은 남편 볼프강 보지크도 오페라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레하르의 오페레타 <에파>를 녹음했다.

  1990년부터 작가로도 활동하기 시작해 2015년에 <엔드 오브 데이즈>로 영국 인디펜던트 신문이 영역 문학작품에 주는 상인 독립 외국 소설상을 받았으며, 2024년엔 <카이로스>로 한강이 받았던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아 이름을 전세계에 알렸다. 내가 에르펜베크의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를 고른 것도 <카이로스>가 우리말로 번역해 시장에 나와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놓고 그걸 기다리는 동안 예니 에르페베크의 문장이 어떤지 먼저 읽어보기 위해서였다.

  미리 이야기하건데, 알라딘의 <그곳에…>에 대한 고객 평점은 야박한 편이다. 아마 이이의 작품이 줄기를 이루는 서사가 거의 없이 풍경과 장소가 만들어내는 무형의 감상이 주를 이루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 팬들한테 얻어 터질 수도 있지만, 배수아의 번역으로는 예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집중해 읽는, 특별히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 그것 한 가지만 가지고도 만족했다. 배수아 팬께서는 너무 열 받지 마시라. 배수아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소설가의 번역을 좋아하지 않는다. 워낙 우리말 사용에 능숙한 이들인지라 (눈치로 봐서) 번역하기 까다로운 지점이 나오면 그럴싸한 우리말로 무질러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특히 배수아는 주로 서사보다 문장과 은유와 함의에 집중하는 사람인지라 조금 더. 그뿐이다. 하여간 나는 이 책을 읽고 희망도서 신청을 한 <카이로스>가 일찍 들어오기를 바라는,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이 생겼다. 이 기분 아시지?


  (역자 해설을 참조하면) “베를린 남동쪽 근교, 폴란드와의 국경에 있는 오더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 사이에 위치한 샤르무첼 호숫가의 한 장소.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은 바로 그 땅, 대지, 흙과 공기와 나무가 어우러진 자연, 사람은 가도 언제나 한자리에 남아 있는 그 ‘공간’ 자체일 것이다.” (p.282)


  약 2만4천년 전, 얼음덩어리가 흘러와 뒤덮을 당시 육중한 바위산이었던 완만하게 솟은 지형은 지금은 구릉으로 남아 있으며, 1만8천년 전에 녹기 시작한 이 얼음덩어리, 빙하는 1만3천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물이 되어 녹아내리기 시작해 샤르무첼 호수가 되었다. 이 호수의 풍광이 아름다워 1881년 <에피 브리스트>와 <마틸데 뫼링>을 쓴 독일의 소설가 테오도르 폰타네는 새로이 “메르키슈 해海”라는 별칭을 붙여주어 이후 사람들이 메르키슈 호수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아, 그렇다고 폰타네를 읽어보시라는 말은 아니다. 독일 후기낭만주의, 별로 재미없다. 하여간 이 호수는 메르키슈 언덕 한 가운데 자리잡은 채 하늘을 마주보고 있었는데, 호수 주변을 떡갈나무, 오리나무, 소나무의 숲이 장관으로 둘러싼 채 1만 년을 넘게 지탱해왔다.  이 조용한 야생의 지역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털이 별로 나지 않은 원숭이 무리. 인간들. 처음부터 이들이 이곳에서 터를 잡은 건 아니다.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 전은 1650년경. 30년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이니 신성로마제국 대부분의 영토가 거의 황폐화된 시절이었을 터. 당시 브란덴부르크 지역은 스웨덴부터 시작해 보헤미아, 신성로마제국 등의 군대가 거의 거덜을 냈고, 지역의 중심인 베를린과 근교인 메르키슈 호숫가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 그렇게 곤궁한 시절부터 무려 2백년이 넘는 동안 메르키슈에서 촌장의 자리를 이어간 부라흐 집안의 남자들은 마을을 잘 보존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할 터였다. 작품은 마지막 부라흐 촌장 시절부터 시작한다. 촌장은 네 딸, 순서대로 그레테, 헤트비히, 에마, 클라라를 두었는데, 아내는 막내 클라라를 낳고 거의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딸만 넷을 두어 이제 부라흐 집안은 촌장을 맡을 일이 없었고, 그저 네 딸이 잘 살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부라흐 촌장의 뜻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레테는 혼인 전날 약혼자가 상속권을 얻는데 실패해 파혼해 버리고, 헤트비히는 탈곡 일꾼과의 사이에 정분이 난 것을 아버지에게 들키는 바람에 핏덩이에 불과한 태아를 사산하며, 농장 일을 관리하는데 큰 몫을 하는 에마는 아들이었으면 당연히 촌장을 이어서 했겠지만 그러지 못했으면서도 누구 한 명 에마의 혼인에 관해 신경쓰는 일이 없었고, 막내 클라라는 젊은 어부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이 이탈하며 호숫가에 자신의 땅이 될 것이라 일찌감치 정해진 클라라의 숲을 가져보지도 못하고 생을 접고 말았다. 그리하여 부라흐 촌장은 클라라의 땅을 3등 분할하여 외지인에게 팔아버리고 말았으니 세월은 어느 새 20세기로 접어들었다.


  세월은 흘렀고, 3등 분할한 예전의 클라라의 숲의 한 필지를 구입한 건축가는 드디어 메르키슈 호숫가의 첫번째 집을 짓기 시작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집을 짓는 것이니 자신과 아내를 위한 최선의 작고 탄탄하고, 젊은 부부의 필요에 따른 다양한 장치가 내장되어 있는 편하고 아늑한 집을, 수도에서 조경업자를 불러와 메르키슈 촌의 정원사와 함께, 누가 봐도 아름다운 집과 정원과 숲이 될 수 있도록 조성한다. 앞에서 역자 배수아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호숫가의 땅, 대지, 흙 (사실 이 세 가지는 서로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공기와 나무가 어우러진 자연이라고 했으나, 건축가가 집을 지은 작품의 초기 이후로 진정한 주인공은 자연이 아닌 사람의 구축물인 이 집과 정원, 그리고 부속 숲이라 해야 맞을 듯하다. 결국 작품은 집의 소멸로 대단원을 이루니까.

  그렇다. 지금 나는 아주 예외적으로 작품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있다. 건축가가 집을 짓고 또 시간이 흐른 다음, 3등분한 클라라의 숲 가운데 건축가의 집과 이웃한 필지를 섬유업자 아르투르가 구입한다. 유대인 가족. 그의 아내는 헤르미네. 아들과 며느리는 루트비히와 안나. 딸 엘리자베스와 사위 에른스트. 이들 사이의 외손녀 도리스. 친손자와 손녀 엘리엇과 고모의 이름을 물려받은 엘리자베스. 독일이 낳은 걸작품인 아들러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부유한 아르투르 가족. 아르투르 부부는 베를린에 살면서 여름을 나기 위하여 1년에 한 번씩 독일에 다니러 오는, 남아프리카에 사는 아들 가족과 함께 매년 여름 동안 메르키슈 호수에 머문다.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시간은 흘러 1930년대가 되고,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키 작은 퇴역 육군 상병이 집권을 하고, 그가 통치하는 독일이 조국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독일을 떠나야만 하는 절박한 심정이 된 아르투르는 건축가에게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호숫가의 자기 땅을 팔고, 팔았지만, 기대한 것처럼 그 돈을 넣은 계좌는 즉시 동결되어 국경을 넘어가지도 못한 채 종말 수용소로 실려가 2분 동안 가스를 마시면서 죽었으며, 나이든 아내 헤르미네 역시 같은 가스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2분 동안 마시며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의 발목에 푸더덕, 똥을 싸고 말았다는 걸 생전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기며, 죽었다. 사위 에른스트는 강제 노역에 징발당해 티푸스에 감염되어 곧 죽었고, 딸 역시 종말 수용소에서 죽었으며, 외손녀 도리스는 게토에서 숨어 있다가 발각이 났으니 이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대인 가족한테 땅과 별장을 산 건축가는 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아 소련군과 대 타협 끝에 사업을 연장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일생일대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하여 자비를 들여 서독에서 놋쇠 나사못 5톤을 사온 것이 문제가 되어 숙청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집행 이틀 전에 이 정보를 미리 들은 관계자의 귀뜸을 받아, 마이센 도자기, 주석 맥주잔, 은제 식기 등 귀한 물건들을 정원의 귀퉁이마다 각 한 뭉텅이씩 따로 파묻고 서베를린 행 전철에 오를 것이다. 주말 동안에는 누구도 체포하지 않을 거라는 정보를 들어 적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겠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발적인 추방.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하여간 건축가는 자신의 귀중품을 정원에 묻기로 하고,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당연히 대부분은 모습을 드러나게 되고, 건축가는 서베를린에서 숨을 거둔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아내와 아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 장벽의 폐허 위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연주한 후, 독일 정부에 소송을 해 메르키슈 호수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저 멀리 남아프리카에 아직도 살고 있는 아르투르의 아들 루트비히 역시 소송을 진행해 오래, 오래 끌고 간다.

  이 와중에도 호숫가 집에는 다양한 일이 다양한 사람들한테 벌어졌으며, 벌어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끝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호숫가와 바람과 나무와 별빛은 영원하겠지만 사람이 만든 집은 언젠가 무너지고, 그렇게 철거하는 것이 보수해 사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는 판단을 내린다면, 판단을 인간이 내린다면 그걸로 집은 사라질 터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인간의 탄생 이전의 거대한 시간, 그리고 절멸 이후에 계속될 무한의 시간을 떠올리며, 겨우 2만4천년 전에 밀려온 빙하가 1만3천년 전에 녹아 생긴 호숫가에 기껏해야 250년 된 마을에서 겨우 백년 전에 지은 사람의 집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허허롭고 허허로웠다. 사람아, 문명아, 너는 얼마나 작으냐. 얼마나 보잘것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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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2-17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넘 예쁘네요. 제목만 보면 박완서스럽기도하고요. 우리나라 서사가 약하다는 지적을 받아 온터라 서사가 약하면 무조건 박한가 봅니다. ㅎㅎ 암튼 저도 함 읽어 보고 싶은데 이 책은 언제 나와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ㅠ

Falstaff 2025-02-17 16:31   좋아요 1 | URL
을유문화사가 광고를 거의 안 하다가 요즘에 와서 조금씩 하는 걸로 보입니다. 좋은 출판사인데 그게 좀 아쉽더라고요.
에르펜베크, 이 작자를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팍, 생겼습니다. <카이로스> 말고 다른 책도 계속 번역해 나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
 
겨울 여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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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분들, 카브레 작품이 나온 것만 가지고 득달같이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했거든요, 부탁인데요, 출판 연도 ˝2024년 1월˝은 바꾸지 말아 주세요. 정보가 달라서 안 사주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뭐 작년 초에 나왔는데 쇤네가 못 봤을 수도 있겠지요. 웃자고 하는 얘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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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2-14 1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정보 살펴본 후….) 단편집이라 조금 섭섭하긴 하네요…🤣

Falstaff 2025-02-14 18:42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래도 읽어봐야겠습니닷!

coolcat329 2025-02-14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작가 반갑네요!

Falstaff 2025-02-14 18:42   좋아요 1 | URL
저도 보자마자 팍 희망도서 신청했답니다. 뭘 따지겠습니까. ㅋㅋㅋ

페넬로페 2025-02-14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반갑네요~^

Falstaff 2025-02-14 19:19   좋아요 2 | URL
ㅎㅎ 먼저 읽으시고 알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