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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성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7
나탈리 사로트 지음, 위효정 옮김 / 민음사 / 202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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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사로트의 소설. 생각만 해도 멀미난다. 그러나 이 책은 1939년 작품. 책이 나오자마자 독일이 폴란드 국경 너머로 탱크를 몰아 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나탈리 사로트는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의 누보 로망의 대표선수. 그러나 1939년에는 누보 로망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으며, 누보 로망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알랭 로브그리예는 열일곱 살, 미셸 뷔토르가 열세 살이었다. 내가 읽은 사로트의 소설은 <황금열매>와 <어린 시절>. 각각 63년과 83년 작품이다. 사로트가 1900년생이라 작품을 썼을 때의 나이도 금방 계산이 된다. <황금열매>는 예순세 살, <어린 시절>은 무려 여든세 살에 썼다. 두 작품 다 진땡 누보 로망 작품이며 이때는 특히 로브그리예처럼 미분적 묘사를 사용하는데, 로브그리예보다 훨씬 강력한 배율의 현미경으로 사물과 현장을 탐색하는 바람에 그걸 읽는 독자는 (못 믿으시겠지, 믿는 자에게 복이 있으니 믿으시라) 까무러친다.
나도 사로트의 소설을 읽는 중에 멀미를 하다가 까무러쳐서 그냥 홱 내팽개치고는 몇 해가 지난 다음에 아무래도 책값 본전이 생각나 다시 읽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멀미 나는 건 여전했다. 근데 사로트나 로브그리예나 하여간 이 누보 로망 작가들이 낸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면 읽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나, 언젠가 흉내까지 내보고 만다니까 글쎄. 이게 말이 되느냐는 말이지. (희곡은 빼고) 사로트의 소설도 그렇게 죽을 똥을 싸며 읽었으면서도 또 다른 번역서가 나오기 무섭게 얼른 찾아 읽는 것을 보시라. 뭐 내가 이쪽 방면으로 병이 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읽고 나서도 내 입에서 결코, 재미있게 잘 읽었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을 번히 알면서 또 읽게 되는 거. 이게 누보 로망이고 나탈리 사로트다.
이번에도 멀미 났다. 근데 저번보다는 덜했다. 아무래도 작품을 쓴 시대가 본격적으로 현미경 관찰을 시작하기 전이라서 그랬던가 보다. 실제로 물체의 미분적 분쇄는 없다. 그래도 누보 로망의 누군가와 닮았다. 누보 로망이란 건 어떤 특별한 작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로 로망이라는 기치 아래 모여 쓴 반소설적 전위적 작품을 일컫는 것으로, 꼭 물체의 미분적 분쇄만 말하는 것은 아닐 것. 훗날 중국의 찬쉐도 <오향거리>의 주인공 X여사가 사물을 거울에 반사된 모습이나, 현미경을 통해 보는 것이 이 전위적 표현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향성>에는 적어도 이런 ‘봄watching’은 존재하지 않아 덜 피곤했다는 말이다. 이들과 같은 패거리로 불리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후기 작품에 더 가깝다고 할까?
그래서 이해하기 좋았느냐고? 천만의 말씀. 이번에도 나는 사로트를 제대로 오해했다.
처음에 좀 헷갈리더니, 읽어가다 보니 한 여성의 시각으로 가족 구성원을 묘사한 것으로 읽혀, 아무리 사로트라도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1939년에 사람 뇌 저리게 만들 수 있었겠어? 이렇게 자만하려고 할 즈음부터 또다시 오리무중의 첩첩산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스스로 알아서 이런 책을 고르는 (나 같은)인간이 문제다.
나는 가끔 만들기 쉬운 순두부 계란탕이나 아욱국, 콩나물국, 매운탕 같은 것을 끓인다. 대개 아침 5시 경부터 멸치, 다시마를 끓여 육수를 내는 것부터 시작해 나름대로 ‘제대로’ 끓이려고 한다. 이렇게 그나마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밥을 퍼 먹으려는데, 마누라쟁이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럼 기분이 어떻겠어? 예전에 어머니가 식탁을 차리면 할머니는 걸레들고 마당의 수돗가로 나간다. 어머니는 입이 댓발 나와서 밥상 차리면 꼭 저렇다고(아마도 속으로는, 저 지랄이라고) 지청구를 넣고. 이거 우리나라만 그러는 게 아니다.
“방에서 방으로 다니며, 부엌을 뒤지며, 누군가가 들어가 있는 욕실 문을 맹렬하게 두드리면서, 그녀는 간섭하고, 지도하고, 닦달하고, 내처 한 시간을 거기서 있을 작정인지 그들에게 묻고, 혹은 늦었다고, 전차나 기차를 놓치게 되리라고, 너무 늦었다고, 되는 대로 무신경하게 있던 그들이 뭔가를 놓쳤다고, 혹은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식었다고, 두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고, 다 얼어붙었다고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 (후략)” (p.21)
위 인용문을 읽어보면, 아직 한 문장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가정주부가 일찍부터 아침식사를 마련해 식탁에 차려 놓았건만 자식새끼들과 남편이란 작자는 내쳐 자빠져 있다가 다 늦어서 허겁지겁 세수하고, 면도하고, 개인위생 처리하는 바람에, 엄마가 열이 빡세게 돈 모습으로 보인다. 나도 소설책 읽은 세월이 있고 페이지 수가 있는데 이런 정도라면 뭐 껌이지, 안 그래? 이런 마음이, 자만심이 들었다는 말씀. 그럴 만하지? 내가 지금 읽어도 그럴 만하다.
게다가 이런 문장이라니. 가족 가운데 누가 욕실에서 물을 틀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
“팽팽한 침묵 속의 돌연한 물소리, 그것은 마치 하나의 신호, 그것들을 향해 울릴 호출, 막대기 끝으로 건드린 해파리를 역겨워하면서 그게 불현듯이 소스라치며 곤두섰다가 다시 움츠러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으리라. / 그녀는 그것들을 그렇게 느꼈다. 벽 뒤에, 늘어앉아, 부동 상태로, 소스라칠 태세를, 요동칠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p.19)
사로트는 남성들의 행위에 관한 묘사도 좋다. 그는 어린 아이와 산책을 간다.
“그는 길을 건널 때마다 자신의 뜨겁고 끈적한 손으로 그들의 작은 손을 꽉 붙들면서, 그러나 그 작디 작은 손가락들을 짓뭉개지지 않도록 자제하면서, 한없이 신중하게 왼쪽 그다음에는 오른쪽을 살피면서 그들이 지나갈 겨를이 있는지 확인했고, 자동차가 오지 않는지 잘 보았고, 그의 작은 보물, 귀여운 그의 어린애, 그가 책임진 그 살아있고 보드랍고 순순한 작은 것이 짓뭉개지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p.27~28)
문장 속에 지시대명사 ‘그’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들어가 읽기 불편하고, 한 문장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우나 그렇다고 줄줄이 인용할 수도 없어서 그렇지 이 챕터 역시 괜찮다. 나는 당연히 아빠가 두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줄 알았다. 앞 챕터, 밥 차려 놓았는데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별 짓을 다 하던 식구들일 것으로 당연히 생각하고 읽었으나, 아이고, 갑자기 이 남자 어른이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이전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숱한 ‘그’와 ‘그녀’는 누구를 특정하는 그와 그녀가 아니라 단순하게 챕터를 쓸 때 작가가 떠올린 여자와 남자에 관한 소묘라고 생각해 마땅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뇌가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아오, 내가 지금 틀림없이 오독하고 있는 중이야. 오독오독한 오독뼈 씹는 게 아니라고. 또다시 죽을 똥을 싸며 오리무중의 첩첩산중으로 자진해서 기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탈리 사로트는 자신이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힌다. 소설이라는 픽션의 형식을 통해서 말하기 때문에 이게 진실인지 아닌지 독자는 판별할 수는 없지만 사로트의 소설을 읽기 위하여 큰 힌트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클리셰들, 복제품들, 발자크,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로 말하자면, 오, 그들은 아주 잘 알았고, 그 모든 것에 훤했고, 하지만 그들은 겁내지 않았고 ― 그들은 그녀를 상냥하게 바라보았고, 그들은 미소 지었고, 그녀 곁에서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고, 또 그들은 그 점을 아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하략)” (p.69)
사로트는 여태까지 지속해온 소설을 답습하지 않겠다, 그리하여 신 소설을 쓰겠다는 선언이다. 아무도 겁내지 않고 무심결에 쓰는 저 왕년의 거장 발자크, 플로베르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그리하여 탄생하는 작가군을 그들은 누보 로망이라 불렀던 거디었던 거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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