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리아드 - 심너울의 사이버리아드 다시 쓰기 FoP Classic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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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두 권의 스타니스와프 렘을 읽었다. <솔라리스>와 <우주 순양함 무적호>. 내가 SF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거의 읽지 않는 편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솔라리스>를 읽고 뻑, 넘어갔다. 그리고 <우주 순양함 무적호>로 이어진다. 짧은 독서력에 한정해 말하면, 렘은 외계 생명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존재”에 대한 인간식 사고방식의 진지한 전환을 요구하는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제시하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진지한 작가. 이런 등식이 고정관념 비슷하게, 두 권밖에 읽지 않았으니까 아직 정식 고정관념이 아니고 고정관념 비슷한 생각을 가진 상태에서 <사이버리아드>를 읽었고,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또 한 번, 뒤집어졌다. 행성의 거대 바다가 통째로 한 생명체이며 이 생명체가 우주선에 탑승한 인간의 뇌에 환상이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솔라리스>, 인간이 아닌 유기물 생명체가 한 행성에 두고 온 기계의 부품들이 자체 번식을 통해 진화한다는 <우주 순양함 무적호>, 이런 발상을 한 1960년대의 폴란드의 천재가 이런 코미디 메들리, 희극 연속작품도 썼다는 말이지?

  아주 오래 전에 오페라 좋아하는 사람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순전히 가벼운 마음으로 “러시아 오페라는 무겁기만 하고 코미디도 재미없어.”라고 썼다가 (지금은 오페라 평론가 또는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은) 모 씨한테 심각한 유감의 글을 받은 이후 찍소리도 못한 적이 있는데(앗다, 드럽게 지랄하데), 이 기억이 불쑥 되살아났다. 정말 SF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가 “스타니스와프 렘은 진지한 작가”라는 내가 그동안 품고 있던 유사 고정관념을 들었으면 그 양반처럼 나하고 온라인 상에서 절교했을 수도 있겠다. 당시엔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수도원에서의 약혼>을 듣고 보기 전이었고, 지금은 <사이버리아드>를 읽기 전이었으니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불쌍한 어린이들은 조금 어엿비 봐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뭐,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지.


  스타니슬라프 렘이 보는 세상은 인간보다 기계로 이루어진 세상이 훨씬 아름다운 것처럼 보인다. 그의 세계관에 입각한 인간과 기계의 탄생을 알아보자. 이오니드 왕좌의 계승자 펠릭스 왕자에게 이오니드 왕이 말한다. 이오니드는 금속 이온의 세계를 뜻하고, 펠릭스는 행운Felix가 아니라 철Fe, ferric을 변형시킨 고유명사이다.

  “우주의 종족 창백얼굴(인간)은 역겨운 만큼이나 신비로운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니, 어떤 천체가 통째로 오염된 결과 그 종이 생겨난 까닭이니라. 유독한 휘발성 기체와 고약한 이상 생성물이 생겨났고, 여기에서 창백얼굴이라 알려진 종이 나왔다. 태초에 그들은 태양에서 육지로 주르륵 올라온 기어 다니는 흙덩어리였고, 서로를 잡아먹으면서 살아갔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 잡아먹을수록 더 늘어났고, 그런 다음 질척한 삶(살)을 석회질 골격(뼈)으로 받치며 일어났으며, 마침내 기계를 만들었다. 이 원형原型 기계로부터 지능이 있는 기계가 나왔고, 그것을 지적 기계를 낳았는데, 지적 기계는 완벽한 기계를 고안했다.” (p.468~469)

  이오니드 왕은 아들 펠릭스한테 지구상 생명체의 기원에서 시작해 수중생물의 육지 상륙에 이어 인간까지 진화를 간단하게 설명한 다음에, 인간이 만든 기계가 최상의 생명체라고 단언한다. 이 기계는 급기야 지능을 갖게 발전하고, 이후 기계적 진화를 거쳐 완벽한 기계 상태가 등장하니 이를 “가가발단” 족이라 한다. “가능한 한 가장 발전한 단계.” 이 가가발단의 구성원들이 뭐할 거 같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모래밭처럼 보이는 곳에 누워 몸을 긁거나 코를 후빌 뿐. 그러나 사실 이들은 신의 경지까지 도달한 ‘생명체’이다. 이들은 안다. 다른 지성체 로봇을 억압하는 불행과 불운을 사라지게 하여 모든 로봇을 행복하게 만들어봤자 아무 간섭을 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100배에서 많게는 800배까지 더 큰 고통을 주게 된다는 것을. (p.441)

  하기야 인간 등의 유기물을 만든 조물주가 특히 에덴 동산에 인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놓자마자 곧바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들들 볶아댈 뿐이었지 않은가. 그것 보다 그냥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코나 후비고 있는 것이 훨씬 낫기는 낫다.


  어쨌거나 <우주 순양함 무적호>에서 한 번 소개했던 기계의 진화가 이 책에 와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의 첫번째 주인공은 트루를, 트루를보다 등장 횟수가 약간 못미치는 또다른 주인공이 클라파우치우시. 이들은 로봇이다. 서로 절친한 친구 사이이자 우주 전체로 봐도 막강한 지능을 소유한 라이벌 ‘제작자’이다. 항성과 행성을 재배치해 우주 광고판을 만드는 일도 밥 먹듯 해치우고, N으로 시작하는 것은 뭐든 만들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지만 이것 때문에 세계를 파멸시키기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미 있는 정보를 그러모으는 ‘제2종 악마’를 창조해내고, 적국의 공주와 사랑에 빠진 왕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슈퍼 에로티즘 증폭기 ‘팜므파탈라트론’을 만들기도 한다. (p.7 “들어가기에 앞서” 요약) 이런 능력이 있는 우주 최고의 AI를 장착한 로봇을 ‘제작자’라고 칭한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AI는 어쩌면 사람보다 더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서, 둘이 서로에게 귀여운 수준으로 실패를 맛보게 하기 위해 예민한 신경전을 펼치기도 한다. 한 에피소드만 소개한다. 앞 문단에서 소개한 N 기계.

  제작자 트루를이 어느 날 N으로 시작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다. 시험적으로 만든 것이 바늘needle, 난징산産 무명바지nankeens와 네글리제를 만들라고 명령하니까 기계는 탁, 만들어냈다. 이어서 좀 더 어려운 과제로 주문하기를 “슬픔을 잊게 하는 약nepenthe, 다른 마취제narcotics들로 채운 물담뱃대narghile에 그 물건들을 전부 처넣고 못질해버리라고nail 했다.” (p.42) 나는 이게 잘 해석이 되지 않는데, 물담뱃대의 작은 사이펀 같은 곳에 바늘과 무명바지를 다른 것과 함께 쑤셔 넣으란 얘기인가 싶다.

  하여간 명령을 착실하게 다 완수하니까 이번엔 후광nimbuses, 국수noodles, 핵nuclei, 중성자neutrons, 나프타naphtha, 코nose, 님프nymph, 물의 요정naiad, 나트륨을 만들게 했더니, 다 만들어내고 마지막 나트륨은 만들지 못하겠다고 딱 거절을 해버렸던 거다. 열을 받은 트루를은 왜 소금을 못 만드느냐고 타박을 하니, 기계가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나트륨은 모르고 소듐sodium만 아는데, 하여간 자기 기준으로 영어로 N에 화학기호 Na, Sodium은 능력 밖이란다. 그냥 넘어간 트루를. 그럼 밤night을 만들어보라고 하니 정말 세상에 밤이 깔리는 거 아닌가 말이지.

  기분이 좋아진 트루를은 친구이지만 경쟁자인 클라파우치우시를 부른다. 트루를이 친구 앞에서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은근히 심통이 나버린 클라파우치우시가 허락을 받아 기계한테 명령을 하기를, 자연nature을 만들어봐. 스타니스와프 렘이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무신론자이다. 그래서 기계가 만들어 낸 것은? 순식간에 자연사학자naturalists들로 가득 차서 자기가 출판한 책을 흔들며 남의 책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먼 곳에서는 불타는 장작더미가 보이는데 그 위에는 조물주Nature에 대한 순교자들이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천둥이 치고, 이상한 버섯구름 기둥이 피어올랐다. 모두 동시에 떠들어대고 아무도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온갖 계약서, 항소장, 소환장 같은 문서들이 날아다니는데 이런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한다.

  열받은 클라파우치우시. 이제 또 명령을 하기를 부정negative를 만들어보란다. 그러니까 기계는 반전자, 반중성자, 반중성미자 등등을 만들었다. 이제 꼭지가 돈 클라파우치우시는 그러면 무nothing을 만들어 보란다. 어, 좀 이상한 생각이 드는 트루를. 도대체 뭘 만들라는 거야? 말 그대로 무無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모든 것을 지워야 하는 것. 그리하여 기계는 세상의 것들을 차근차근 사라지게, 멸절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없어진 것들이 곤심, 포각, 타갈뱀, 슈뻥, 타타품, 이거뜰, 쇗불과 냥자 등등. 도대체 이것들이 뭐냐고? 없어진 것이니 내가 알 수 있나. 그러나 트루를과 클라파우치우시는 없어진 것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온화했던 것인지 안다. 그런 것들이 없어져버렸다.

  이들은 N으로 시작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기계에게 더 이상 작동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는 이미 없어진 것들을 통탄하게 아쉬워하고, 그렇게 넋이 나가 서 있는 동안 먼저 정신이 슬며시 돌아온 클라파우치우시는 슬쩍 트루를의 집을 나와 그길로 뺑소니 쳐버린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스타니슬라프 렘은 1964년부터 1979년까지 15년 동안 썼다. 모두 15 편으로 되어 있으며, 전부 독립적이라 단편집/작품집 읽는 기분으로 한 편씩 즐길 수 있다. 책 소개에는 ‘사이버’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합쳐 <사이버리아드>라고 제목을 지었다고 했으나, 읽어보니 ‘사이버리아드’보다는 <사이버라자드> 즉 ‘사이버’에 ‘세헤라자드’를 합친 것에 더 가깝다.

  하여간 스타니스와프 렘은 천재 맞다. 머리 속의 뇌활동이 인간과 지구에서 벗어나 우주 공간과 모든 생명 그리고 생명 수준에 근접하거나 초월한 기계까지 확장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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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05-14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에스에프 안 좋아하는데 백작님 영업에 넘어가서 그 연두색 책 솔라리스 손 닿는 회전 책장에 소장중이란 말이지요...(살아있다면 팔백작님 연세되어 읽을지도?!?!ㅋㅋㅋㅋ)

Falstaff 2025-05-15 05:19   좋아요 1 | URL
천천히 읽으셔요. 언젠가는 읽으실 겁니다. ㅋㅋㅋ

바람돌이 2025-05-16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사랑하는 스타니스와프 렘!!!! 느낌표 백만개요. ㅎㅎ
근데 이 책 저는 구판으로 읽었는데 읽다가 너무 힘들었어요. 번역이..... 무슨 말인지 못알아들을 지경... ㅠ.ㅠ 새 번역이 나왔으니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사이버리아드를 좋아하신다면 저는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를 강력하게 권해드립니다. 진짜 웃다가 죽는줄 알았어요. ㅎㅎ 저는 사이버리아드보다 이연 티히가 더 좋았거든요. 물론 새 번역본 읽고 다시 판단해야겠지만요. ㅎㅎ

Falstaff 2025-05-16 15:51   좋아요 1 | URL
렘을 좋아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ㅎㅎㅎ
넵. 저도 이욘 티히, 목록에 올려 놓았습니다. 기대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