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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 검은 머리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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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의 후기작을 읽으려면 일단 긴장을 좀 해야 한다. 그럴 필요 있다. 내가 읽은 뒤라스, 그러니까 취미로 책을 읽는 일반 독자 수준에서 말하자면 1950년대 말에 출간한 <모데라토 칸타빌레> 이후 작품은 뒤라스가 누보 로망 작가군에 합류하면서 말한 대로 독자가 직접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란다. “독자가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는 것이 말이 쉽지, 이제 작품 속에 서사는 사라지고 피상적이라서 애매모호한 이미지만 툭 던져 놓는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 작품에 대한 해석도 독자가 개별적으로 알아서 해야 한다. 드디어 골 아픈 뒤라스 시대를 맞는데, 웃기게도 이때부터 뒤라스는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라 소설이면 소설, 영화(연극)이면 영화(연극)에서 성공가도를 달린다. 우리나라에서도 50년대 말, 60년대 초에 발표한 작품으로 점점 성가를 높이다가 1980년 작품 <연인>이 92년에 영화화되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단박에 ‘뒤라스’는 대중적인 이름이 된다. <연인>은 1980년에 단편집에 실렸다가 84년에 단행본으로 다시 찍어 공쿠르상을 받는 기염을 토한다.
근데 위의 말을 믿지 마시라. 문단 속에 말했듯이 완전히 아마추어 입장에서 쓴 글일 뿐이다. 우리나라 전문가들, 특히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소위 프로방스 학파들의 말마따나 나는 “오독을 마다하지 않는 다양한 독자층”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 뒤라스가 우리나라 책가게에 풀릴 때부터 읽어온 오랜 독자라서 이이의 후기작품부터 읽기 시작은 했지만 정작 전기 작품을 더 좋아하는, 문학적 시야가 트이지 않아 기껏해봤자 딜레탕트에 머무는 수준이다. 다 알면서 오늘도 뒤라스의 독후감을 쓴다. 어쩌랴, 잘난 척하는 게 재미있는 걸. 조금만 더 봐주시라.
뒤라스는 일흔 살에 <고통>을, 일흔두 살에 <파란 눈 검은 머리>, 그리고 일흔여섯 살 때 <여름 비>를 출간한다. 물론 이전에도 그랬고,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늙은 뒤라스가 말하는 고통은 사랑의 고통이고, 일흔 살 때의 고통은 일흔두 살의 <파란 눈 검은 머리>에서도 이하동문이다. 다만 다른 것은 2년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호출하는 전화벨을 울려주기를 기다리는 고통이고, 이 책은 나 말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옆에 두는 고통이다.
1944년에 뒤라스와 함께 레지스탕 활동을 하던 남편 로베르 앙텔므가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감금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45년 6월에 다하우에서 돌아오는데, 딱 12개월만에 우리보다 체격이 큰 유럽 성인 남자가 38킬로그램의 몸무게였단다. 뼈에 피부를 살짝 코팅한 수준이었겠지. 오랜 세월이 지나고 뒤라스는 전남편으로 대표하는 레지스탕 포로의 고통 대신 작품 속에 2차 세계대전을 동시대에 겪었으면서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파란 눈 검은 머리>도 예외가 아니지만 <여름 비>에서는 이게 심화 확대하여 일견 엉뚱하다, 뒤라스가 혹시 망령이 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마추어인 내가 읽기에 그랬다는 것이니 신경쓰지 마시라. 그러니까 이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고통>과 <여름 비> 딱 그 사이에 있어서, 사랑의 고통과 개연성을 의심할 만큼 난데없이 유대인 또는 유대 정서가 등장한다는 말이 하고 싶어서 떠들어댄 거다. 쓸데없이 말 길게 하는 거, 이거 쉽게 고쳐지지 않네 그려.
장소는 프랑스 북부 해변. 시간은 여름부터 겨울까지. 해는 넘기지 않는다.
여름 어느 저녁녘이 이야기의 중심이라고 딱 금을 긋고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저녁, 석양 무렵이 주요 시간대이다. 등장인물은 그와 그녀. 첫 장소. 호텔 데로슈의 로비. 호텔 안에는 아이들과 여자들이 모여 있고, 밖에는 테라스의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며 몰려 있다. 이들은 여름 저녁 북부 해변의 예외적인 아름다움에 관해 수다를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가 호텔 창가에 도착했다. 여자는 이미 그곳에 있다. 창에서 몇 미터 떨어져 다른 여자들 사이에 있어서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흰 운동화를 신은 젊은 여자. 길고 유연한 몸. 하얀 피부. 흰 반바지. 허리에 검은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이 검정 실크 스카프는 책을 덮을 때까지 중요한 소도구로 계속 사용한다. 나중에 그와 함께 밤을 보내는 방에서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그리고 파란 눈.
여기에 젊은 외국인 남자가 들어온다. 주인공 ‘그’가 아니다. 막 로비에 발을 딛은 그는 파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이며, 키가 크고 피부가 희다. 그녀처럼. 앞 문단에서 말했듯이 후에 유대인이라고 정해진다. 근데 탁 읽는 순간부터 외모에 관한 묘사가 여자, 그녀와 매우 유사하다. 큰 키와 흰 피부, 파란 눈에 검정 머리카락. 뒤라스는 이 유대인 청년과 그녀의 경계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다. 그녀가 유대인 남자가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독자는 그러나 아닌 것으로 읽힌다.
그리고 잠깐 독자는 헛갈린다. 여기서 등장하는 3인칭 대명사 ‘그.’ 그녀는 그가 놓쳤던 사람이란다. 그녀를 되찾았다는 기쁨으로 가득하지만 다시 그녀를 놓칠 수밖에 없다는 절망에 빠져 있다. 잠시 긴장을 놓은 사이에 파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의 유대인 남자와 그의 장면이 휙 지나갔을까?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작가가 그렇게 유도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도 우아하고, 마르고, 키가 큰 남자이다. 값비싸고 예쁘장한 옷차림을 했다. 탁 떠오르는 것이 동성애자 같다. 조금 후에 추리가 맞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동성애자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한다.
그는 호텔에서 나와 카페로 간다. 카페에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벌써 와 있다. 여기에 특징적인 문장이 있다.
“그녀가 파란 눈 검은 머리의 젊은 외국인과 함께 이 카페에 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도 파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한 키 큰 유대인을 찾고 있는 거다. 먼저 젊은 외국인이 눈에 들어오고 이후에 그녀도 카페에 있으면 알아차린다는 거니까. 그는 게이가 맞다.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가 그의 테이블로 가 마주 앉는다. 그녀는 누구일까? 혹시 매춘부? 그럴 듯하다. 이들은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머물다가 도시 깊숙한 곳의 술집으로 향한다. 동이 틀 때까지.
그는 그녀에게 자기 방으로 오라고, 그러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녀는 응한다. 침대도 없는 방. 방의 한 가운데 흰 시트가 깔려 있고 그녀는 거기 눕는다. 그는 그녀와 거리를 두고 누워 몸의 어떤 부위도 닿지 않는다. 처음엔 그냥 이렇게. 날들이 지나면 둘 다 옷을 다 벗고. 그럼에도 피부의 접촉은 없다. 그가 게이라서? 어쨌거나 그녀는 욕망한다. 그녀가 그에게 키스한다.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지금 그에게 키스하는 거라고. 그 사람. 그 모르는 사람에게. 누구일까? 그녀의 가슴과 팔과 허벅지에 멍을 들게 난폭한 섹스를 하는 남자. 유대인 청년?
겨울이 오고 테라스에 선 그는 유대인 청년이 흰 크루즈를 타고 해변을 떠나는 모습을 본다.
이런 것들을 뒤라스는 마치 연극으로 만들 때 출연자와의 토론으로도 읽히기 바란다. 그래서 작품의 첫 문장은 이렇다.
“여름 어느 저녁녘이, 배우가 말한다, 이야기의 중심이라고 해볼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연극이라면 드라마투르그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보다, 우리말 문장이다. 많이 과장해서 말하면 작품 속 전체 음절의 15퍼센트는 ‘그’이다. 3인칭대명사 ‘그’와 ‘그’녀, 지시대명사 ‘그’가 많아도 너무 많다. 짜증나는 건 당연하고 책을 읽는데 많이 지장을 받을 정도. 나중에는 문장을 읽으며 어느 ‘그’를 빼고 읽으면 더 자연스러울까, 이걸 생각하면서, ‘그’자를 빼는 걸 재미로 생각하니까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 역자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을 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지. 그러나 글쓰기 교본 2장 1절에도 나오듯이 ‘그’는 좋은 문장 쓰기로 가는 지옥의 길이다. 읽는 사람은 멀미난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었으니 나도 참 독종이다. 이 책이 역자의 첫 번역서인 것 같은데, 건필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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