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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연습 ㅣ 위픽
김지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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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생 김지연은 “거제도에서 조선노동자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대학은 (가족이 이사를 했는지 혼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애초 시를 쓰려다가 소설로 바꾸어 2008년에 단편 <작정기>로 등단,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그리고 70회 현대문학상을 받아 상금 천만원, 세금 제하고 989만원을 현금으로 받았다. 이 정도면 잘 나가는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데도, 오, 우리나라의 출판 문학이여, 아직 (지금부터 석 달 전까지) 집도 없고 차도 없었단다. 하기는, 적수공권으로 서울에서 시작했으면 마흔둘에 집 사기 쉽지 않지. 뭐 요즘 사는 게 다 그렇다. 마음 넓은 김지연 씨가 이해하고 지나가자.
2008년 데뷔 치고는 출간한 책 권수가 적다. 그동안 소설집 두 권, 중편 한 권, 장편 한 권. 이렇게 네 권이다. 단편 꼴랑 하나 실은 <새해 연습>은 책으로 세지 않으면 그렇다. 나는 <새해 연습>이 처음 읽은 김지연이다. 근데 마음에 든다. 내가 좀 까다롭다. 특히 단편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차분해서 좋다. 튀려 하지 않는다. 웬만하면 쓸 거 같은 자극적인 장면도 없고 따라서 과장도 없다. 맛이 없어서 좋다. 아니, 맛이 약하고 순해서 좋다. 당연히 할 말은 다 한다. 새해면 제일 추운 겨울인데도 춥지 않아서 좋다. 날이 안 추운 게 아니고 글이 안 춥다.
홍미의 부모는 일찌감치 갈라섰다. 그리고 각기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해 살았다. 홍미는 이쪽 저쪽을 오가며 살았다. 이쪽에 씨다른 형제, 저쪽엔 배다른 형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기숙사 있는 공장에 취직해 들어갔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어머니는 폐암으로 갔다. 홍미는 누구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가봤자 찬밥이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작가 김지연은 하지 않는다. 대신 거기 갔더라면 혹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을까, 라고 잠깐 생각한다. 싸구려 작가들의 경우, 장례식장에 나타난 전남편, 전처 소생이 찬밥이란 말을 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독자는 거기까지 염두에 둘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조금씩 김지연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다.
할머니가 죽었다. 목을 맸고, 죽고 일주일이 지나 독거노인 관리 담당 공무원이 발견했다. 세상에 오롯이 홍미 혼자 남았다. 올 사람도 없어 빈소 없이 장례를 치뤘다. 할머니가 살던 집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낡은 집. 이제 그 집은 홍미 것이 될까? 아니다. 왜 아닌지는 나오지 않는다. 할머니 소유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집이 이제 자기 것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세상에 나서 뭔가 제대로 된 걸 가져본 적이 없으니 뭐 그런가 보다 했다. 외로우면 빨리 깨는 법이라서.
할머니 이름은 ‘양지.’ 이름처럼 바닷가 언덕바라지라서 바람은 많아도 햇빛 또한 많은 곳에서 살다 갔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1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일기장 더미만 빼고. 18년치의 일기장이 이불장에 차곡차곡 재여 있었다.
“그냥 버리셔도 돼요. 이제 전적으로 임홍미 님 소유니까요. 마음대로 하시면 돼요. 종이니까 그냥 밖에 내다 놔도 다 수거해 갈 거예요.”
홍미는 그럴 수 없다. 누가 볼까봐. 일기니까. 그래서 담배도 한 대 피울 겸 옥상에 올라간 김에 조금 태워본다. 근데 유일한 친구 민석에게 전화가 온다. 이런저런 얘기하다 옥상에서 무엇을 태우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홍미는 불법을 저지르기 싫다.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고 싶은 홍미.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법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홍미는 발로 밟아 불을 끄고, 태우는 대신 조금씩, 한두 권씩 회사에 가지고 가 파쇄하기로 하고, 그렇게 한다. 순백의 파쇄지 사이에 누렇게 변색한 할머니의 일기. 그 작은 파편들.
할머니 양지의 일기가 보통 수준을 넘는다.
“덥지도 않은데 선풍기를 틀었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있으면 바람이 불어서 화장대 앞에 있는 휴지가 팔랑팔랑 움직인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으면 갑갑하다는 기분이 들어서 무언가라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느껴진다. (후략)” (p.15)
이처럼 쓰기 쉬울 것 같지? 결코. 홍미가 할머니를 닮았으면, 유전자 좀 물려받았으면 소설가가 될 뻔했는데, 엉뚱하게도 DNA는 홍미 대신 김지연에게 가버렸다.
홍미는 유일한 친구 민석과 함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할머니 옛집에 들러본다. 철대문은 누가 떼어갔고 마당의 시멘트 갈라진 땅에서 잡초가 돋았다. 방과 부엌에는 갖은 쓰레기가 넘쳐있다. 이거나마 내 집이었으면. 잠깐 생각한다.
할머니가 죽어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홍미가 법을 지켜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지금 경리로 일하는 작은 기념품 회사의 사장 경식은 홍미에게 터치하며 일종의 연애를 제안하고 홍미는 당연히 거절한다. 사장 경식은 유부남이며, 아내가 아닌 여자와 연애 경험이 있다. 홍미가 거절하고 며칠 후, 경식은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져 인원을 줄여야 하니 퇴사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하는 홍미. 하지만 곧 구인광고를 발견한다. 세상은 그렇게 흐른다. 여차하면 나올 거 같은 202X년의 성추행 장면을 김지연은 묘사하지 않는다. 경식의 차 안에서 홍미는 말을 듣지 못한 듯 “내일 뵐게요.”하고 내리는 것으로 마감한다. 세상을 둘러봐도 자기 혼자인 홍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생각할 때가 더 많았고 그날도 그랬다.” (p.60)
반지하에 살고 있는 빌라도 경매에 넘어가 전세금 되돌려 받기가 쉽지는 않을 거 같다. 꼭 없는 사람들한테만 일은 엎친 데 덮친다. 홍미는 덤덤하다. 덤덤하게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 민석에게 말한다.
“민석아, 우리 결혼할래?”
저번에 먼저 결혼하자고 했던 민석은 안 된다고 대답한다.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친구가 한 명은 결혼식에 와야 할 것 같아서. 너 말고는 친구가 없거든.”
민석도 부모가 다 돌아가고 세상천지에 자기 혼자다. 사는 게 다 그렇다.
그래도 이들은 꿀꿀하지 않다. 속으로 곪아도 겉으로만 그러는지, 아니면 속도 정작 얹힌 것이 별로 없는지 이들은 어쨌거나 나쁘지 않게 인사한다.
“해피 뉴 이어!”
물론 이게 끝은 아니다. 끝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은 새해가 되면 아주 잘 살아보고 싶다.
이게 끝은 아니다.
김지연의 책을 좀 더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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