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링크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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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라뇨의 초기작. 이전에 시집은 몇 권 출간했지만 이 작품 이전의 소설은 친구 안토니 가르시아 포르타와 함께 쓴 것 하나만 볼라뇨의 연표에 나와있다. 물론 그렇다고 자기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책이 내가 읽은 몇 번째 볼라노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꽤 읽은 편이라 생각하는데, 눈에 힘주고 이이의 연표를 들여다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내가 이전에 읽은 책을 보면 작품의 주인공들이 멕시코시티에서 10대 후반의 나이로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전위 문학, 특히 시 장르에 깊이 빠져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멕시코시티를 벗어나 북아메리카와 유럽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범죄에 연루되는 스토리가 이이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명이 길어 라틴 아메리카에 잠입해 살아남은 나치 잔당과 하여간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이 되는 작품들. 이 두 이야기가 서로 얽히고 설킨 것도 있었겠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볼라뇨는1953년에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났다. 이이의 작품 속에서 칠레 출신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바람에 작가 또래의 칠레 사람들이 항용 그러했듯이 피노체트에 의한 쿠데타 전후로 멕시코를 거쳐 유럽 각지에서 살다가 같은 언어를 쓰는 스페인에 정착한 작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1968년, 열다섯 살 때 가족 전부 멕시코시티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후 다시는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는 한편 이 또래들이 왕왕 그러하듯이 입에서 젖내가 가시지 않은 전위시를 지었나 보다. 1973년에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건설을 지지하기 위하여 조국 칠레에 갔다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생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빵에 들어갔는데 어릴 적 친구를 만나 74년에 풀려났다고. 이후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아방가르드 문학운동에 가담했다. 이런 경험들이 볼라뇨의 책 속에 다 들어가 있다. 책을 웬만큼 읽은 다음에 연보를 읽는 것도 재미있구나. 아, 볼라뇨가 이런 경험이 있어서 <야만스러운 탐정들>, <칠레의 밤> 같은 걸 썼구나, 이런 걸 알아채는 재미.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를 어느 정도 읽은 후에 첫번째 작품 <루공가의 치부>를 읽을 때 각 등장인물의 족보가 눈에 훤하게 들어오는 것과 유사한 잔재미가 있다.


  <아이스링크>는 한 건의 살인사건을 놓고 세 명의 화자 ‘나’가 각기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플롯이다. ‘나’의 서술이 아니라 ‘나’의 내레이션.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나’가 아니라 ‘저’이고 따라서 존칭을 사용한다.

  레오 모란, 가스파르 에레디아, 그리고 엔리크 로스켈리스.

  레오 모란과 가스파르 에레디아는 각각 열아홉 살과 스무 살 때 멕시코시티 부카렐리가街에서 패기 넘치는 시인들이 상주하던 모호하고 수상쩍은 청춘의 공간에서 처음 만난 사이로, 전위 시를 써서 서로 돌려 읽고 비평하는, 요새 말로 합평이란 걸 했던 동아리 멤버였다. 모두 새파란 청춘이었고 겁 없는 십대 시인이었으며 전부 자기들이 천재인 줄 알았던 시기.

  레오는 일찌감치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시작해 스페인으로 건너와 팜플로나, 사라고사, 바르셀로나에서 노점상으로 푼돈을 벌다가 우연찮게 Z시로 굴러왔다. 해변 관광도시 Z시에서 장신구 가게를 열고 수완을 발휘해 돈을 조금 모아, 이어서 ‘카르타고’라는 옥호의 술집을 인수하고, ‘델 마르’ 호텔, ‘스텔라 마리스’ 캠핑장, 그리고 다섯 개에 이르는 상점도 접수하는 수완을 보여, Z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시청 사회복지과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과 불 같은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해서 아들을 낳았으나 3년만에 점잖게, 여전히 우정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갈라섰다.

  레오가 사업차 바르셀로나에 가서 피로를 풀려고 불타는 돼지 껍데기에 쐬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우연히 노점상을 하는 칠레 여자 모니카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젊은 시절, 아니, 어린 시절에 같이 전위시를 쓰던 가스파르 에레디아가 바르셀로나에서 거지꼴을 못 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럼 Z시로 와서 자기를 찾으라고 말하고는 잊어버렸다. 근데 정말로 모니카가 가스파르를 만나 이야기를 전해 Z시에 도착해, 사람 사이에 척지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업가답게 가르시아에게 ‘스텔라 마리스 캠핑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5월부터 9월까지 일하라고 했다. 반년 일하면 멕시코시티로 돌아가 몇 달 버틸 수 있게 괜찮은 급여를 주고 밥도 하루 세끼 먹을 수 있게 해줄 터이라고. 가스파르는 만족한다. 스페인 체류 허가증도, 취업 허가서도 없는 외국인이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다.

  “스텔라 마리스” 캠핑장. 이건 실제로 로베르토 볼라뇨가 야간 경비원으로 일했던 캠핑장 “에스트레야 델 마르”의 라틴어 식 이름이라고 역자해설에 쓰여 있다.


  세번째 화자 엔리크 로스켈러스는 163센티미터의 키에 뚱뚱한 몸집의 카탈루냐 남자이며 사회주의자다. 노동과 정의와 진보를 믿는다. 이렇게 말하면 노동, 정의, 진보가 한 뭉텅이로 다 옳은 거 같지? 착시 현상이다. 이에 관해서는 길게 쓰지 않겠다. 세상에 “다 옳은 건 하나도 없는 법이다.”라는 한 마디로 넘어가자. 전직 사회당 Z 시장 필라르 빌라마르 여사의 최측근으로 Z시의 사실상 최고 권한을 휘둘렀다. 22세에 대학에서 심리학 학위를 취득하고 한때 부적응 아동시설에서 심리상담원으로 일한 적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사회당 동지 필라르가 불러 진취적 열정과 야망, 그리고 인생의 목표를 위하여 Z시로 와서 지난 2년 동안 시청을 움직이는 동력이자 근육이요 두뇌였다고 자부한다. 이런 인간이 꼭 당하는 것이 있다. 다른 직원들의 질투와 원한을 샀다. 스스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알 수밖에 없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마르고 비관적인 인간이 된 것 같다. 이이의 사무실 벽을 차지하고 있는 수료증 액자의 종류를 쓰려 해도 A4 반 장은 너끈히 채울 듯하여 여기에 옮기지 못할 정도.

  그런데 한 행사에서 누리아를 만난 것이 사달을 만들었다. 누리아 마르티. 코펜하겐에서 열린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서 스페인의 위상을 높인 스타. 스타인 것도 모자라 여태 엔리크가 본 여자 가운데 난생 처음 보는 미인이었다.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엔리크는 누리아를 만나서 친분을 쌓기 위하여 시청 관광축제과에 작업을 해 낙농업 박람회에 홍보대사직을 만들고 초대 홍보대사로 누리아 마르티를 위촉하려 시도했다. 당연히 거절할 것임을 알면서도. 예상대로 누리아는 난색을 표했고, 그래도 홍보대사 건을 계기로 저녁 식사를 갖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간혹 만나 식사를 하고, 점점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 엄마와 여동생이 사는 누리아의 집에도 자주 들르는 관계로 발전했다. 당연히 엔리크는 누리아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랑의 정도도 점점 증가했다. 사랑이란 것이 점점 증가해? 웃기네. 사랑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 폭발적으로 사랑의 농도가 커져버렸다. 카탈루냐 지역에 대한 불평등이랄 수도 있을까, 싶게 누리아는 어처구니없게 국가대표에 포함되지 않는 불상사를 만났고, 따라서 코치와 연습장 및 장비 대여 같은 온갖 혜택이 하루 아침에 물 건너 가버렸다. 누리아를 위하여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이걸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엔리크 로스켈레스.

  Z시에는 몇 십년 전 미국에 이민가서 떼돈을 벌고 돌아온 거부가 저택을 짓고 산 적이 있다. 이제는 시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폐허로 변해버린 괴상하게 생긴 저택을 눈여겨보던 엔리크, 그는 실제로 저택에 가보고, 거대하게 지은 실내 수영장을 유심히 살피더니 시청으로 돌아가 엽기적 기안을 쓰기에 이른다. 이 저택을 대대적으로 수선해 관광시설로 쓰자는 제안. Z시의 실력자요 시장의 최측근에 정말로 능력도 막강한 인간이 하는 일이라 일사천리로 작업을 시작했고, 엉뚱하게 지하실의 실내 수영장을 아이스링크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제목이 <아이스링크>가 되는 것. 그리고 공사는 1~2년 후에야 끝난다고 보고한다. 그동안 누리아가 연습에 매진하면 다시 국가대표로 발탁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누리아의 키스 한 번 받지도 못하는 엔리크는 그렇게 불법을 저지른다.


  그런데 밖에서 보면 여전히 폐허이며, 유령이 나올 거 같은 삭막한 장소의 깊고 깊은 곳. 그곳의 아이스링크. 거기에도 두 발 달린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다. 다만 엔리크와 누리아가 모를 뿐이지. 누군가가 피겨 스케이팅을 연습하고, 다른 누군가는 음악이 든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주고 동시에 자기 업무를 위해 서류를 검토하는 장면. 그것을 보는 눈이 있는 것.

  날들이 지난 어느 날 밤. 우연히 전처의 심부름으로 저택에 가서 사람을 찾으러 건 레오 모란은, 그날따라 찾는 사람이 없어 아직 포장 박스가 널려 있는 저택을 훑다가, 아이스링크를 발견하고, 아이스링크 위에 백여 군데 칼에 찔린 여인의 시체를 발견해 단박에 일이 커지는데….

  죽은 여인이 누구냐 하면, 안 알려줌. 그러면 누가 죽였냐고? 그것도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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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5-05-15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가 죽었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누가 죽였는지는 기억이 날랑말랑.. 엔리크 다시
보니 참 안쓰럽군요.

Falstaff 2025-05-15 16:02   좋아요 1 | URL
살인범은 본문에 콧배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시면서....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