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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인칭의 자리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평점 :
윤해서의 첫 번째 단편집 《코러스크로노스》를 읽고 벌써 3년이 지났다. 단편집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어 이이의 다른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단박에 읽어봤을 텐데 그간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동안 세 권의 책이 더 나왔다. <그>라는 중편소설과, 짧은 장편 혹은 긴 중편 <암송>.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에서 2019년 9월에 출간한 이 책 <0인칭의 자리>.
나는 《코러스크로노스》의 독후감을 쓰면서 “내 독서목록에 이 작가를 보탠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했을 정도로 전작에 열광했다. 그래 이번에 장편소설이 나오긴 했는데, 소설의 음악성과 회화성, 그리고 읽기 쉽지 않은 문장을 장착한 작가가 어떻게 장편소설을 썼을지 궁금한 바가 작지 않았다. 기대가 컸다.
<0인칭의 자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단, 내가 문학적으로 소양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라는 점을 잊지 마시라.
야박하게 말해, 윤해서가 틈틈이 메모해놓은 것들을 모아 짜깁기 하듯 얼기설기 추려놓은 것을 내다 판 거는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첫 작품이 《코러스크로노스》라면 후속 작품은 앞의 것을 능가하거나, 성공 혹은 실패일지라도 적어도 진화된 작품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껏 독자로 하여금 기대치를 올려놓고 후다닥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고 떨이를 시도,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읽으면서 느끼기에 그런 시도를 했다면 곤란하다.
원래 윤해서의 소설은 경계가 없거나 애매하거나 아니면 혼동스럽다. 시간과 공간, 소설과 음악, 소설과 그림 등등. 이번엔 산문과 운문, 즉 시와 소설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혹은 넘나드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한 거 같은데, 이 정도의 왔다 갔다 가지고 독자에게 참신한 매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착각일 듯하다.
단, 내가 문학적으로 소양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라는 점을 잊지 마시라.
사람들이 항상, 적어도 한 시절에는 생각해보는 의문 가운데, 왜 나는 나일까, 하는 것이 있다. 60억 인구 가운데 왜 나는 나고, 이 모습이고, 저런 부모 사이에서 나왔을까. 즉 직접적으로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인칭의 혼동은 한 시절 겪어보았을 터. 윤해서는 꼭 이런 기분, 느낌이 아니더라도 인칭, 1인칭, 2인칭, 3인칭이 아니라 예컨대 183인칭, 54인칭, 그리고 0zero인칭을 꺼내놓음으로 해서 나와 너와 그의 혼돈상태를 보여주기 위하여 다양한 사람들, 거의 공통분모가 없는 많은 주인공들을 묘사한다. 파독 간호사와 독일 남성 부부의 아들은, 책가게 ‘미리보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윤해서의 다른 작품 <암송>에서도 출현하기도 하고 뭐 그렇다.
소설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① 열흘 전 카페에서 보험을 든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 ② 영하 15도의 추운 날 지하철 6번 출구로 나와 영종도에 들어설 오피스텔 모델하우스에서 상담을 당하는 젊은 여자, ③ 아침부터 순댓국에 소주 반 병 마시고 취한 채 창덕궁과 비원의 문화재 해설사에게 되도 않는 질문을 하는 중늙은이, ④ 새벽 네 시에 사람을 밀어 넘어뜨려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필름이 끊겨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기러기 아빠, ⑤ 오랜 세월이 지나 바다 위에서 한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하는 그녀, ⑥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진작가의 전시회 2층에 마주보고 걸린 사진 속 여자와 남자, ⑦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앞에서 구두 수선 컨테이너를 운영하는 신기료장수, ⑧ 인도의 더러운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의 재회를 위해 잠실야구장에 온 그녀, ⑨ 아침에 가장 먼저 창문을 여는, 환멸을 가장 멋있게 견디는 사람을 아는 나, 등등,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는 거의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리하여 이들 사이의 인칭은 183인칭일 수도 있고, 54인칭일 수도 있으며 0인칭 그리고, 성의 없는 후기, ‘작가의 말’에서처럼 0과 1 사이의 어디쯤일 수도 있다.
위의 ①부터 ⑨까지, 연관 없는 이야기들. 이건 작가가 <0인칭의 자리>를 구상하면서 쓰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이의 창작 노트 또는 랩탑에 저장해놓은 단편斷編의 집합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을 소지가 생기기도 한다. 이 책 한 권으로 윤해서에게 실망하기에는 《코러스크로노스》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지금 책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두 권, <그>와 <암송> 말고 다음에 나올 책을 한 권 더 읽고, 윤해서의 팬을 계속 할까 말까를 결정하겠다.
단, 내가 문학적으로 소양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라는 점을 잊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