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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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츠바이크를 읽는다고 기분이 설랬다. 제목 <우체국 아가씨>만 보고, 속으로 <어느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같은 소품을 기대했는데 어라, 430페이지 짜리다. 음. 만만하지 않군. 이렇게 생각하고 첫 페이지를 열었다. 역시 츠바이크. 작가 특유의 쓸쓸한 문장으로 사람의 정서를 살살 긁어내린다. 오전에는 거의 할 거 없는 우체국 여직원. “여직원”이라고 했다 해서 성차별 운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체국은 관료주의의 특권계급이 신성시 하는 사무공간에서는 눈에 띄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성장”과 “쇠퇴”의 법칙 미 적용 지대라고 하면서, 교체할 수 있는 “정부 비품”은 여성이 유일하다고 썼다. 본문을 읽어보면 한 15년에서 20년 정도 여직원이 근무하다가 그만 두면 다른 젊은 여직원이 바로 그 자리를 물려 받아 다시 15년에서 20년 정도 똑같은 일을 한다는 의미다.

  수도 빈에서 기차 타고 두 시간 거리, 크렘스 시에서 멀지 않은 곳의 보잘것없는 마을 클라인-라이플링 우체국의 여직원 크리스티네 호프레너. (여기서 처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림. 츠바이크가 크리스티네라는 이름의 여성을 흠모한 적이 있었나? 혹시 첫사랑이야?) 궁정고문관을 했던 삼촌이 우정사업부의 고관한테 청탁을 해 조카에게 얻어 준 일자리로 1926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공황의 고난 속에 그래도 억지로 먹고 살아가고 있던 크리스티네의 권태가 뚝뚝 떨어지는 우체국 오전, 정말로 오랜만에 황동 전신기에서 모스 부호가 울리기 시작하고, 원통형 수신기에 용지를 가져다 댄 크리스티네가 전보을 읽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  “크리스티네 호프레너. 클라인-라이플링. 오스트리아.

  너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든지 날을 정해 와라. 오기 전에 미리 도착시간을 알려다오. 클레르-안토니.”


​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게 살고 있는 스물아홉 살의 크리스티네에게 이게 웬 전보. 그러다가 클레르라는 이름이, 30년 전에 지역에선 제법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키고 집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건너간 이모, 클라라인 것을 알아챈다. (나도 이제는 확실히 알아챘다! 그래서 별 하나 뺀다.) 미국 남부에서 목화 중개 사업을 크게 성공시킨 이모부 안토니 반 볼렌, 네덜란드 출생으로 이름의 ‘반’은 독일의 폰von처럼 귀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흔하게 반 고흐처럼 두 번째 이름으로 쓰는 것뿐인 이모부가 이제 사업을 두 아들에게 맡겨놓고 부부동반 해서 스위스 남동부 중에서도 최남단, 풍광 좋은 알프스의 엥가딘 계곡에서도 가장 비싼 팰리스 호텔에서, 크리스티네의 엄마이자 이모의 친언니한테 한 번 놀러 오라고 했던 것이고, 엄마는 전쟁 중에 병원에서 일하다가 얻은 다리 부종 때문에 꼼짝 못한다면서 괜찮다면 크리스티네를 두어 주 휴가 겸해서 보냈으면 좋겠다 했던 것.

  크리스티네의 가족은 오스트리아에서도 가장 유명한 박제 장인 집안이었으나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오빠가 전사하고, 전시에 무슨 사치 장식품인 박제, 집안 경제도 거덜이 나, 그래서 아빠도 몸이 아프건만 의사한테 한 번 보여줄 생각도 못한 채 와중에 최절정의 젊음을 향유하려던 크리스티네는 바로 그 젊음이 흐지부지, 시새푸새 빠져나가 버렸다. 살면서 휴가다운 휴가를 지내보지 못한 크리스티네는 그리하여 등나무 가방에 간단한 짐을 챙겨 넣고 알프스 행 기차에 오르고,


​  여기까지 읽은 다음, 나는, 책을 덮어버렸던 거디다.

  왜? 이미 읽은 책이거든.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라는 제목으로. 이게 원래 제목이 Rausch der Verwandlung, “변신의 중독”이다. 독일어 제목만 그대로 우리말로 고쳤어도 애초에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우체국 아가씨>라니, 거 참. 우리나라에 츠바이크 팬이 많아 나같이 덜 떨어진 독자라면 책을 또 사서 후회하고 자빠지지 않겠나 하는 출판사가 뇌를 좀 굴렸는지 모르지만, 진짜 그랬으면, 지옥 간다, 지옥 가.


  내가 이렇게 거품 문다고 해도, 이 책은 읽어보시라. 진짜 츠바이크, 소위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반전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니. 어쨌든 나는 츠바이크 말고, <Rausch der Verwandlung> 또는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가 아닌 <우체국 아가씨>라는 책을 읽다가, 더 읽을까, 하다가, 이만큼 읽어준 것만 해도 충분히 성의는 보여준 거다, 싶어 덮어버렸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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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0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작품이 형편없어 덮었다는 건줄 알았네요. 그리고 말씀하신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 집에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갖고 있었는데 <우체국 아가씨>를 또 샀지 말입니다? 그게 같은 작품인줄 전혀 모르고요. 하아- 출판사들 너무해요 ㅠㅠ
아주,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8-09 11:06   좋아요 0 | URL
ㅎㅎㅎ 다락방님이 그러셨다고요? 저는 정말 사려고 하다가 다행히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눈에 띄었답니다.

건수하 2023-08-09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다락방님이 사셨고 누가 얘기해주셔서 전 안 읽었지만 알고 있었는데....
골드문트님 이번엔 사서 읽으셨군요. 안타깝습니다 ;ㅁ;

어쨌든, 매력적인 반전의 마무리... 읽어볼 책에 추가했습니다 :)

Falstaff 2023-08-09 11:06   좋아요 0 | URL
사기 바로 전에 안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요. ㅋㅋㅋ
안 읽으셨으면 돈 들여 구입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책입니다!

Jeremy 2023-08-09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독일어 직역본이 아니라 영어판의 번역본인가 봅니다.

이 책의 영어판 제목이 <The Post Office Girl>이라서
원래의 책 제목, 독일어로 <Rausch der Verwandlung> 를 영어로 직역하면
아마도 <The Intoxication of Transformation> 쯤,
즉 님 말씀대로 <변신의 중독> 정도 되겠지만
이렇게 평범하고 직관적인 책 제목, <우체국 아가씨> 도
나름 받아들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어쨌든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가난에 시달리던
Vienna, Austria-Hungary 오스트리아-헝가리 비엔나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우체국 여직원으로 일하던
크리스틴 호플레너 Christine Hoflehner 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요.

영어권에서는 Stefan Zweig 를 <시작>하기에 좋은 소설로 평가받고 있답니다.

Falstaff 2023-08-09 11:0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럼 이 책이 중역본일 수도 있겠군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3-08-09 09: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는 당연히 골드문트님이 이 책이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인줄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체국 아가씨> 리뷰 쓰신다고 해서, 아니 왜 이 책을 또 읽으셨지 했더랍니다..... 미리 귀띔해 드릴걸....

츠바이크는 국내에서 이미 나왔던 책을 제목만 살짝 바꿔서 다시 내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주의해야 합니다.

Falstaff 2023-08-09 11:09   좋아요 0 | URL
윽, 또 있어요? 저도 속으로, 츠바이크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썼네... 의아해 했던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그런 것이 있었구먼요. ㅎㅎㅎ 돈 되는 정보,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3-08-09 11:41   좋아요 4 | URL
<연민>(넥서스, 2007년) 도 <초초한 마음>(문학과지성사, 2013년)으로 다시 나왔잖아요. 이 두 작품 원제는 <Ungeduld Des Herzens>입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단편은 이렇게저렇게 조합을 달리하고 제목 살짝 바꿔서 발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저도 츠바이크 좋아해서 신간 나오면 살펴보는데, 사기 전에 검색해보면 예전에 다른 제목으로 나온 경우가 많더라고요.

stella.K 2023-08-0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좀 빡치셨겠는데요? 저도 예전에 크리스티네 읽은것 같은데 전 언제부턴가 츠바이크를 잘 안 읽게 되더군요. 근데 책이 저러고 나오니까 사 볼까하는 생각이 들긴하던데 그런걸 좀 출판사 측에서 미리 알려주면 헷갈리지도 않고 좋을텐데 왜 그걸 공지하지 않을까요? 어찌보면 그것도 범죄라면 범죄일 수도 있을것 같은데. 출판 산업이 취약하다보니 이리봐주고 저리봐주고 하니 그런거쯤 이런들 어떠하리 가볍게 생각하는가 봅니다. 글고 츠바이크의 원제를 좀 존중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원작자는 하난데 출판사에서 책 낼 때마다 제목을 바꿔치기하면 엄한 독자 열받죠.😡

Falstaff 2023-08-09 15:17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라 빡치지는 않았습니다. ㅎㅎㅎ
저도 츠바이크의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같은 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근데 안 읽기엔 글이 너무 좋은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트레버하고 비슷한 정서도 있는 거 같고요. 근데 제가 뭘 알아야지요. ^^

레삭매냐 2023-08-09 1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호곡... 하마터면 살 뻔했에요.
안 그래도 서점에 갈 때마다 만지작
거리던 책이었는데.

기록을 뒤져 보니 <크리스티네>는
12년 전에 읽은 책이었더라구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08-09 15:18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이게 문제예요. 책 좋아하시는 분들, 관심 저자 등장하면 일단 지르고 본 다음에 후회할 거 있으면 후회하는 거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3-08-09 1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당연히 북플의 고수님들은 이 책이 <크리스티네...>와 같은 작품으로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어요. ㅎㅎ
저는 이 책이 새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 드디어 나왔구나! 하고 샀는데 고수님들이 모르고 또 사셨다니 놀랍네요.

Falstaff 2023-08-09 15:19   좋아요 1 | URL
에휴... 저는 고수 아닙니다.
당연히 몰랐습니다. 오히려 쿨캣 님 같은 분이 매사 꼼꼼하셔서 실수가 없을 거 같은 걸요. ㅎㅎㅎ

bitsogul 2023-08-09 14:5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빛소굴 출판사입니다.

저희 출판사의 책 <우체국 아가씨>에 관심 가져주시고 이렇게 리뷰를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말씀 올립니다. 일반적으로 원제 <Rausch der Verwandlung>로 알려진 이 작품은 츠바이크 사후인 1982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된 작품입니다. 상기한 원제는 츠바이크가 직접 지은 것은 아니고, 원고를 편집했던 편집자 Knut Beck가 지은 것입니다.
츠바이크의 유고 원고에 등장한 가제는 Postfräuleingeschichte이고 이것이 영문판 <The Post Office Girl>의 제목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컨대 이 책을 출간한 발행인은 <변신의 중독>으로, 츠바이크는 집필 중에 <우체국 아가씨 이야기>로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이 상황에서 빛소굴 출판사는 츠바이크가 집필 중 고려한 제목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더욱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여 <우체국 아가씨>를 최종 제목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영문 중역본이 아니고, 옮긴이 남기철 교수님은 독문학 박사입니다.

늦었지만 바로잡기 위해서 한 말씀 더 올립니다. 이 책이 개정판임을 알리는 내용을 포함한 서지정보를 온라인 서점에 동일하게 전송했습니다. 예스24에는 정보가 제대로 반영되었지만 알라딘과 교보문고에는 이 정보가 누락되어 있음을 파악했습니다. 미리 파악하지 못하여 혼란을 드린 점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서지정보를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이런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서지정보란뿐만 아니라 출판사에서 배포하는 상세페이지에도 복간 사실을 뚜렷이 명시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착각으로 책을 구매하신 고객님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립니다. 만약 환불이 가능하신 상황이라면 다소 번거로우시더라도 환불 진행해주시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시면 빛소굴에서 나온 다른 책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미진한 보답이라도 드리려 합니다.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연락주실 이메일은 아래에 적어두겠습니다.

bitsogul@gmail.com

Falstaff 2023-08-09 16:01   좋아요 6 | URL
ㅎㅎㅎ 제목에 관해서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크리스티네 변신에 중독되다> 보다는 <우체국 아가씨>가 훨씬 좋다는 의견입니다. 출판사가 원 제목을 직역해서 번역서를 내야 한다는 법도 없잖아요. 제 오랜 인터넷 친구 말마따나 로버트 테일러, 비비안 리 나오는 영화 <Waterloo Bridge>보다는 <애수>가 훨씬 매력적인 제목인 것과 같이요.
다만 이 책이 나오기 전에 <크리스티네...>가 있었으며, 그것의 새로운 번역이라는 것을 독자가 미리 알 수만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말씀입지요.
제 독후감의 요지는 다 각설하고, 이미 전 번역을 읽은 분은 선택에 주의하시고, 안 읽은 분은 매력적인 작품이니 읽어보시라는 거....라는 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독자들끼리 노는 곳에 저자, 역자, 출판사께서 말씀을 보태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빛소굴 출판사처럼 진솔하게 말씀하시는 회사를 여태 경험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친절한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번창하시기 바랍니다.

stella.K 2023-08-09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일이 말복인데 골드님 계 타셨네요.
출판사에서 저런 댓글도 보내주고. 축하해요. ㅎㅎ
근데 빡친다면 알라딘에 쳐야지 출판사는 아니었네요. 이런...ㅉ

Falstaff 2023-08-09 16:23   좋아요 2 | URL
윽, 내일이 말복입니까? 아휴... 세월이 참.
글쎄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 그냥 그렇다니까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