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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와 생명의 불 - 살만 루슈디 장편소설 ㅣ 문학동네 청소년 15
살만 루슈디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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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우리말로 번역해 나온 살만 루슈디의 픽션 단행본은 다 읽었다. 자서전 한 권이 또 있지만 자서전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영 손에 안 잡힌다. 책값이 오지게 비싸기도 하고.
<루카와 생명의 불>은 동화라고 하기에도,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어중간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를 대상으로 한 소위 ‘청소년 소설’로 분류할 수 있겠다. 중학교에만 올라가면 당연히 읽어야 하는 외국소설로 <제인 에어>나 <전원교향악> 같은 걸 꼽으니 암만해도 이 책을 중학생에게 권하기는 조금 미안할 정도다. 역시 초등학교 고학년이 좋겠다.
루슈디는 1988년에 출간한 <악마의 시> 때문에 1989년에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파트와’라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이 파트와는 절대적인 명령 비슷하게 받아들여진다고 들었다. 이어서 그의 목숨에 백만 달러의 현상금까지 붙었으니 루슈디는 세상의 어느 외진 곳에서 자신의 소재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게 하고,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하루, 한 주, 한 달을 연명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열 살 먹은 아들 자파르와 작년에 결혼한 두번째 아내 마리엔 역시 루슈디와 함께 거의 구금상태에 달하는 보호조치를 받아야 했다. 안가에서 지루한 생활을 보내면서 친구 없이 소년시절을 보내야 하는 아들 자파르를 보기가 딱해 루슈디는 십대 초반을 위한 청소년 소설 <하룬과 이야기 바다>를 써서 자파르가 열두 살이던 1990년에 출간한다.
세월이 흘러 1998년에 모함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은 루슈디에게 내려졌던 파트와 선고를 취소해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생명의 위협은 없어졌지만 어려서부터 무슬림 환경에서 자란 루슈디는 파트와 취소 결정에도 불구하고 마음 놓고 생활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조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여간 <하룬과 이야기 바다>를 출간하고 20년이 지난 2010년, 루슈디는, 힘도 좋지, 두번째 아내 마리엔과 두번째 이혼을 하고 둘 사이에 난 열두 살짜리 둘째 아들 밀란을 위해 또 한 편의 청소년소설을 써 출간하니 바로 <루카와 생명의 불>이다. 이 책이 나올 때 둘째 밀란은 열두 살, 첫째 자파르가 서른 살. 열여덟 살 터울이고, 당연히 이복 형제다. <루카와 생명의 불>에서도 루카보다 열여덟 살이 더 많은 형 하룬이 등장한다. 이야기 폐색증에 걸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오래 전에 지구의 두번째 달에 가서 큰 모험을 한 적이 있는 바로 그 하룬이 맞다. 이 나이든 형은 열두 살짜리 어린 동생을 바라보더니 씽긋 웃으면서 “너도 이제 모험을 떠날 때가 됐다.” 라든지, “이럴 줄 알았어. 너도 우리 집안 사람으로 마법의 세계로 들어갈 나이가 됐어.”라고 동생의 모험을 부추기는데, 실제 생활에선 형이 첫째 엄마, 둘째가 둘째 엄마, 그리고 지금은 셋째 엄마, 몇 년 있다가 넷째 엄마하고 사는 반면, 소설에선 아빠 라시드 칼리파가 오직 조강지처인 ‘소라야’ 엄마하고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았다는 거다.
다양한 생각이 펼칠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임을 감안하시어, 내 의견과 다른 분께는 미리 양해를 당부하건대, 나는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살만 루슈디가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흔을 훌쩍 넘은 노인네가 당연히 글도 무지 재미나게 쓰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상력으로 무장을 한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받을 만한데다가 올해 8월에 테러를 당해 팔의 신경 절단, 간 손상, 한쪽 눈 실명이라는 험한 꼴을 당했으니 이왕 밥 딜런도 받고, 가즈오 이시구로도 받고, 화장실, W.C, 즉 윈스턴 처칠도 받았으며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도 수상 대상자였던 그까짓 노벨 문학상 하나 주면 안 되겠나 했었는데 아니, 아니 에르노라니,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았다. 뭐 그랬다. 못 받을 줄 알았고 아마 앞으로도 못 받겠지만 진짜 받았으면 싶었던 작가는 메릴린 로빈슨이었고.
힌두스탄 어로 문자라는 뜻을 가진 ‘알리프바이’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에 또 ‘카하니’라는 도시가 있단다. 루카가 사는 곳이다. 루카의 아버지 라시드 칼리파 씨는 이야기꾼으로 이름이 난 사람으로 웬일인지 루슈디는 칼리파 씨의 직업을 특정하지 않는다. 돈을 받고 이야기해주는 만담가나 스탠딩 코미디언이라기엔 힌두스탄이라는 지역과, 이미 21세기도 10년이나 지난 시절이라 컴퓨터 게임이 일상이 된 시대에 아직도 자기집을 보유하고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안정된 직업이라고 보기 힘들기는 한데, 주요 독자층이 아직 먹고 사는 문제에 깊은 생각이 없는 십대 초반의 아동일 터에 이이의 직업이 뭐냐, 하고 야박하게 따지진 않겠다. 하여간 칼리파 씨는 20년 전에 큰 아들 하룬과 함께 이야기 바다로 어려운 모험길에 나선 적이 있었다. 이이가 벼락을 맞는다. 카하니에 “거대한 불고리” 서커스단이 들어왔다. 이 서커스단에는 주로 길들인 야생동물의 멋진 쇼로 유명하지만 동물들 꼬락서니 하나는 정말 가관이었다. 암사자는 충치, 암호랑이는 눈이 멀었고, 코끼리는 굶주려 뼈가 앙상하고 다른 동물들도 지독하게 비참한 상태였다.
어느덧 62세가 된 칼리파 씨가 학교를 마친 막둥이 루카의 손을 잡고 서커스 단 옆을 지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동물들을 보더니, 서커스가 동물들에게 못할 짓이라면서 자신은 서커스를 보러 가지 않겠다고 결정을 한다. 루카도 동물들을 보니까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덩치가 크고 무서운데다가 성미가 급하고 화를 잘 내며 좀처럼 웃지 않는 ‘불꽃단장’ 아아그를 향하여 이렇게 저주를 퍼붓는다.
“동물들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고리가 당신 천막을 활활 태워 없애기를!”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왜 그거 있지 않은가, 학생들의 종알대는 떠드는 소리가 갑자기 한 순간에 싹 사라지며 조용해지는 찰라, 바로 이 비슷한 마술적 침묵의 짧은 시간이 발생했으며, 루카의 말이 널리 퍼져 하늘을 채우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여신들의 집에까지 도달한 것 같았는데, 하여튼 루카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그날 공연에 어떤 동물도 조련사와 단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으며, 서커스단을 몽땅 뛰쳐나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버렸고, 밤에 천막에서 불이 났다는 거다. 동물 중에서 ‘멍멍이’라는 곰과 ‘곰돌이’라는 이름의 진갈색 래브라도 종 개가 루카의 집에 나타나 이후에 루카의 가장 충직한 보호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에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카하니 시 위의 하늘, 실실라 강과 그 너머 바다 위에까지 별들이 유난히 찬란히 빛이 나서 도시에서도 은하수 흐르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던 날, 루카의 아버지 칼리파 씨가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이튿날이 밝아도, 사흘이 지나도. 의사들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그저 누워 있다가 근력이 빠지면 세상을 뜰 수밖에 없다는 소견만 밝히는 마법의 병환.
마법의 세계에는 천상에 지혜의 호수가 있고, 호수의 물은 ‘시대의 새벽빛’을 받으며 ‘시간의 강’으로 흘러 ‘지혜의 호수’를 이룬다. 지혜의 호수는 ‘지식의 산’ 그늘에 있으며 이 산꼭대기에서는 ‘생명의 불’이 타오르고 있단다. 이제 아버지 칼리파, 위대한 이야기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지식의 산 위에 타고 있는 생명의 불을 훔쳐와 그걸 아버지의 벌어진 입에 넣는 것뿐. 아무도 깨울 수 없는 아버지를 위하여 루카는 ‘멍멍이’ 곰과 ‘곰돌이’ 개를 데리고 이미 생명이 다한 신들의 고향인 마법의 땅으로 길고 험한 모험의 길을 떠난다. 연말연시에 이제 청소년기에 돌입하려는 소년들을 위한 좋은 읽을 거리를 소개하는 포스트로 2022년을 마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소년 만세! 그대들에게 21세기의 축복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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