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이재진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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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의 정령: 地靈>과 <판도라의 상자> 2부로 되어 있는 연작 희곡 <룰루>. 희대의 팜 파탈 룰루와 그를 둘러싼 남녀들이 벌이는 엽기발랄한 잔혹극이다. 지난 세기 말에 알반 베르크가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 <룰루 Lulu>의 대본을 읽으면서 경악했던 경험이 있다. 역사상 가장 엽기적인 팜 파탈은 은쟁반 위에 다소곳하게 올라온 세례 요한의 목을 들고 피가 빠져 창백하게 변한 입술에다 대고 키스를 날린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일 것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팜 파탈로는 프로스페르 메르메가 쓴 <카르멘>의 타이틀 롤을 꼽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의 대본을 읽으면서 들은 이후 원본 희곡이 궁금하긴 했지만 희곡을 읽는 것보다는 실연을 보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우리라 생각해 여러 종의 DVD를 보았다. 그러나 세 시간을 훌쩍 넘기는 베르크의 미완성 오페라를 쇤베르크를 이어받은 현대음악으로 보고 듣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아서 DVD 감상마저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당시에 대본을 꼼꼼하게 살폈다면 <룰루>가 <땅의 정령>과 <판도라의 상자> 2부로 이루어진 작품이란 걸 알았겠지만 그저 베데킨트의 <룰루>만 열심히 찾아 다녔을 수밖에. <땅의 정령> 대신 <지령地靈>과 <판도라의 상자>라고 제목을 단 책이 성균관대학 출판부에서 나와 있는 것을 모르고 열심히 <룰루>만 찾았으니 이렇게 한심할 수가. 그러다 올 여름, 지만지 드라마 시리즈에서 <룰루>를 출간했음을 알았고, 득달같이 내가 사는 동네의 시립 도서관에 도서구입을 신청해 어제(09.24, ’22) 오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모두 읽었다. 확실히 영상물을 보는 것보다 머리 속으로 극을 “나 홀로 연출”해가며 읽는 재미가 훨씬 좋다는 것도 새삼 확인해가면서.


  프랑크 베데킨트의 바이오그래피는 전에 <카이트 후작> 독후감에 소개한 바 있어 작가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곧바로 <룰루>로 들어가자.


  우리나라에서 <룰루>는 겨우 두 번을 공연했다. 첫 공연은 1980년 서울 문화회관(세종 문화회관의 오기인 듯) 별관에서 <루루>라는 제목으로 원작을 김창우 드라마터지(혹은 드라마투르기)가 공연에 맞게 대본화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1999년 동숭 아트센터에서 올린 <룰루>였는데, 1979년 파리 공연의 짧은 오페라 대본, 오페라를 목적으로 작곡가 알반 베르크가 직접 고쳐 쓴 축약본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상적인 <룰루>를 한 번도 공연한 적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봐도, <룰루 – 괴기 비극>은 1988년, 희곡을 쓰고 거의 백 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수정 없이 원본 그대로 연출한 공연이 함부르크에서 막이 올랐다. 공연에 무려 다섯 시간이 들었다고 하니 제대로 무대에 올리기가 얼마나 힘든 작품인지 알 것도 같다. 우리나라에선 1999년 공연 당시 성균관대학에서 급하게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대본의 번역을 시도해 《지령, 판도라의 상자》를 출판부에서 찍었는데 이때 번역을 주도한 사람이 이 책의 역자인 이재진 단국대 명예교수이었으며, 나중에 보니까 당시의 번역이 하도 참담하여 이번에 다시 작업을 했다고 주장한다.

  독일에서도 독일어로 된 희곡의 정상적인 공연에 거의 백 년이 걸렸던 것은, 겉으로 보면 공연 전에 애초 희곡을 출간할 당시부터 문제가 됐던 비윤리성, 부도덕성, 성적 혼란, 음란함 등의 충격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심이다. 어떤 내용인지 간략하게 보자.


  모든 일은 그리 크지 않은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는 쇤 박사의 선행에서 시작한다. 몇 년 전 겨울에 쇤 박사는 길거리에 맨발로 서서 꽃을 팔고 있던 어린 소녀를 거두어 교육도 받게 해주고 잘 먹여 통통하게 살이 오르게 해준다. 당시에 이름이 없던 이 소녀가 룰루인데, 쇤 박사는 아이를 ‘미뇽’이라 불렀다. 아이가 성장해 십대 후반이 되고, 당시 십대 후반이라면 이미 완전한 여성으로 성장했다고 봐도 되는데, 그래도 쇤 박사가 미뇽하고 성적 접촉이 있었는지 아닌지 작가는 확실하게 밝히지 않지만, 쇤 박사는 미뇽을 배뚱뚱이의 늙고 자그마한 영감인 병원 원장 골 박사한테 시집 보낸다. 골 박사는 룰루를 새 이름 ‘넬리’라고 부르면서 아내이기 이전에, 혹은 아내이면서 귀여운 소유물 정도로 취급하며 룰루에게 피에로 복장을 입혀 화가 슈바르츠한테 초상화를 그리도록 부탁한다. 슈바르츠는 여태까지 보았던 모든 여성보다 흰 피부와 통통한 몸매에 환상적인 눈빛을 가진 룰루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림을 그릴 때조차 골 박사는 룰루의 곁을 비우지 않아 애만 태우던 슈바르츠는, 어느 날, 역시 화백 슈바르츠에게 쇤 박사가 부탁한 자기 약혼녀의 초상이 얼마나 완성되었는지 보러 와 골 박사-룰루 커플을 만났다가 골 박사만(룰루는 모델을 해야 하니까) 자기 아들 알바가 연출하는 공연의 시연회에 거의 억지로 데려가는 틈을 타 룰루에게 손을 대려 한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고 시간만 흘러 나중엔 마치 <배따라기>에서 쥐도 못 잡은 형수와 시동생 꼴이 되어버린 이들 앞에 허겁지겁 나타난 골 박사는 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먹어 뇌 깊숙한 곳의 혈관 하나가 퐁, 터져,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만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린 룰루는 슈바르츠 화백하고 두 번째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씨 좋은 쇤 박사가 자신의 배경을 이용해 슈바르츠가 그림 그리는 실력과 별 상관없이 대단히 유명한 화가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거의 백만장자의 자리까지 오르게 해준 결과였다. 이제 유명한 화가가 된 슈바르츠가 자신을 ‘이브’라고 부르며 계량할 수 없이 사랑하는 것도 아는 룰루. 그러나 룰루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육체적 첫 남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쇤 박사가 참의원 폰 차르니코프 씨의 외동딸 샤를로테 마리 아델라이데 양과 약혼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자신이 쇤 박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다음으로 하고 저 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질투를 어찌할 줄 모른다. 이 와중에 쇤 박사는 도덕적 기준이 높은 화가에게 자신과 룰루의 관계를 털어놓고 이를 들은 화가는 쇤과 룰루가 했네, 했어. 그것도 여러 번, 매우 많이 했네, 이렇게 생각해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골방으로 홀로 들어가 새파랗게 날이 선 면도칼로 자기 목을 스윽, 그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쇤 박사는 약혼을 취소하고 이제 본인이 룰루와 결혼해 살고 있는데, 결혼하면 좋을 거 같았지? 천만의 말씀. 쇤 박사는 앞에서 죽은 골 박사만큼은 아니지만 이미 많이 늙어 몸과 마음, 특히 몸의 특정 부분이 시들시들해지는 바람에 도무지 만족을 할 수 없는 룰루가 여러 남자, 그러니까 예스럽게 말해서 샛서방을 두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깟 샛서방들을 빼고 얘기해도, 쇤 박사와 룰루 사이에 젊은 남자가 하나 있었으니, 골 박사 죽기 전 잠깐 얘기했던 쇤 박사의 아들 알바. 시인인 것은 확실하고 작곡가인지 극작가인지 하여튼 극공연을 위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룰루를 아버지가 전에 부르던 애칭인 ‘미뇽’이라고 자기 새엄마를 부르는 거였다. 룰루가 보기에 알바가 참 딱해서 오래된 진실 하나를 고백한다. 자신이 알바의 엄마이자 쇤 박사의 아내를 독살했다는 거. 그럼에도 룰루에 대한 알바의 사랑은 식지 않는다. 이 둘의 이야기를 2층 난간에서 듣고 있던 쇤 박사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룰루 하나만을 위해 유력한 집안의 외동딸과의 약혼도 취소해버리지 않았는가 말이지. 자신은 룰루를 위해 큰 희생을 하나 했던 거였는데, 자기 전처가 죽은 내력은 귓등에도 들어오지 않고 알바와 하는 짓이 눈에 시어 권총을 들이밀고 그걸 룰루의 손에 쥐어준 다음 자살을 하라고 총구를 룰루의 가슴에 향하도록 만든다. 이러다가 집안 구석구석에 숨은 샛서방들이 도처에서 도망하려고 튀어나오는 찰나, 틈을 잡은 룰루는 총구를 쇤 박사 쪽으로 돌리고, 때마침 등을 지고 선 쇤 박사를 향해, 권총의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무차별 난사하기에 이른다. 죽어 늘어진 쇤의 머리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은 룰루, 이미 영혼이 떠나 창백해진 입술 위에 자기 입술을 포개며 1부 <땅의 정령>의 막이 떨어진다.


  2부 <판도라의 상자>까지 모든 이야기를 소개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할 듯하다. 그건 직접 책을 사거나, 빌리거나 해서 읽어보시기 바란다. 하여튼 이런 작품이 20세기 초반에 다른 나라도 아니고 독일에서 출간을 했다니, 나오자마자 곧바로 검열에 걸려 모든 책에 대한 회수조치 처분을 받았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 터. 위에서처럼 골 박사, 슈바르츠 화백, 쇤 박사, 알바 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참 다양한 인물이 추가된다. 생각해보시라. 공연 시간만 다섯 시간이 넘는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등장인물이 나올 지. 그런데 이들의 행동양식에 관해 이야기해보자면, 독후감이 너무 길어질 거 같아 망설일 수밖에 없다. 진짜로 책을 읽은 다음 든 생각은, 독일어 사용권의 스위스 사람인 베데킨트가 혹시 독일의 부조리 문학을 선도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오늘의 독후감을 접겠다.

  아무쪼록 많은 분들 역시 흥미진진한 독서생활을 경험할 특별한 기회를 잡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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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0-07 0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완전 빨려들어갈 듯 이 리뷰를 읽었네요. ㅎㅎ

Falstaff 2022-10-07 12:1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러셨습니까. 2부 <판도라의 상자>로 가면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요! 무대도 독일에서 시작해 파리를 거쳐 런던까지 옮아가고요.

그레이스 2022-10-07 1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배따라기 ...^^
흥미진진하긴 하네요.
광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Falstaff 2022-10-07 12:18   좋아요 2 | URL
화가하고 룰루가 숨바꼭질 하는 장면은, 읽자마자 배따라기부터 생각나더라고요. ㅋㅋ
베데킨트가 없었다면 독일 드라마는 무지하게 재미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을 거라고들 하더군요.
한 여자한테 넋이 빠져 난리가 나는 작품이 또 생각납니다. 카렐 차페크가 쓴 드라마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입니다. 열린책들 <곤충극장>에 실린 희곡인데요, 거기서는 소녀 티를 막 벗은 여자가 아니고 무려 3백년을 산 절세미녀 마르티 이야기. 읽어보셨을 듯합니다. ^^

mini74 2022-10-07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이 정신없는 집구석은 뭔가요 ㅎㅎ 룰루 몸에 꿀 발렸나요. 이게 무슨 ㅎㅎㅎ

Falstaff 2022-10-08 17:20   좋아요 1 | URL
ㅋㅋ 꿀 발라요? 나인 하프 위크. 명작입니다. 진짜 꿀 바르는 장면 나옵니다. ㅎㅎ

coolcat329 2022-10-08 14: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희대의 팜므 파탈이라니 이 자체로도 엄청 끌립니다.
저는 우선 카르멘으로 워밍업을 하고 룰루로 가겠습니다.😅

Falstaff 2022-10-08 17:21   좋아요 2 | URL
카르멘은 비제가 워낙 잘 만들어서 그런지 메르메 원작이 별로더라고요. ㅎㅎㅎ

coolcat329 2022-10-08 18:09   좋아요 2 | URL
그럴 거 같아요. 오페라 전혀 모르지만 카르멘은 정말정말 보고 싶어요.
노래, 의상, 내용 다 너무 좋아요~

독서괭 2022-11-09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아요 눌러놓고 자세히 못 읽었던 리뷰인데, 넘 재밌네요. 줄거리가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1부 마지막이.. 그럼 2부 내용은 대체?? 완전히 달라진다니 궁금합니다. 쇤 박사 골 박사 왠지 웃겨요 ㅋㅋㅋ

Falstaff 2022-11-10 05:30   좋아요 1 | URL
전 1부가 더 재미 있었습니다. 근데 스토리는 넘 흥미롭지요? ㅋㅋㅋ 기가 막힌다니까요. ^^

바람돌이 2022-11-09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막장 쇤박사님 집안에 진짜 룰루는.... ㅋㅋ 항상 다음 내용을 궁금하게 쓰시는 골드문트님이십니다.

Falstaff 2022-11-10 05:31   좋아요 0 | URL
하여간 스포일러는 좋지 않다고 믿거든요. ㅋㅋㅋ 이 책처럼 재미나 경우는 더 하고요. 그래야 새로 읽는 분이 더 재미나지 않겠습니까.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