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의 유대 여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리온 포이히트방거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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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온 포이히트방거(이후 “포이히트방어”로 표기)는 1884년에 뮌헨에서 부유한 유대인, 이라기보다 독일 시민으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 보충병으로 징집당했다가 병명 불상의 이유로 의가사 제대를 했다. 포이히트방어 본인은 20세기 두 번의 불행한 큰 전쟁을 겪은 다음 유대인 말고 세계인으로 삶을 지속했지만 태어날 당시엔 ‘유대인을 위한 마가린’ 제조공장의 사장이었던 부친 지그문트 포이히트방어, 모친 요한나 네 보덴하임머 부부의 전통적 유대교를 지키는 집안 장남이었다. 뮌헨과 베를린의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1907년에 하인리히 하이네의 작품 <바하라흐의 랍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위가 취소를 당하기도 하고, 1920년대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나치의 핍박을 받은 경험 등,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겪어야만 했던 온갖 신난의 경험이 그를 종교와 민족 등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끌었을 수도 있겠다.

  1940년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에 머물던 포이히트방어는 독일이 서유럽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미국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여장을 한 채 마르세유로 탈출에 성공한다. 당시 유럽을 탈출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경로인 독일-프랑스-피레네 산맥–스페인–리스본–뉴욕1이라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그는 그곳에서 후기의 대표적 장편소설인 <미국을 위한 무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그리고 <톨레도의 유대여인>을 발표한다. 우리말로 번역해 발매하고 있는 포이히트방어의 책은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문학과지성사, 2018)과 오늘 소개하는 <톨레도의 유대 여인> 두 권 뿐이다. 후기 작 뿐만 아니라 그의 초기 역사소설이자 작가로 명성을 날리게 해준 <유대인 쥐스>도 이른 시일 내에 소개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쉽지는 않을 듯.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함>은 “18세기 말 무렵 서유럽의 거의 모든 곳에서 중세는 말살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무대는 이런 서유럽의 분위기와는 관계없이 세르반테스 시절과 비슷하게 여전히 “완고한 중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이었다. 옆나라에는 대혁명이 발생하면서 근대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역사의 격변기 속 스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식민지 전쟁에서 판판히 무릎을 꿇기는 했으나, 여전히 중세의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축복받은 자연의 나라’ 스페인이었다면, <톨레도의 유대여인>의 무대는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를 여전히 무슬림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의 이베리아 반도, 이 가운데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톨레도를 배경으로 한다. 자우메 카브레의 말에 따르면 “지구가 편평했던 시절” 이야기. 이제 고대가 끝나고 바야흐로 중세가 시작하려하는 때.

  특별하게 주인이라고 내세울 것 없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초로 통치권을 쥔 건 한니발로 대표하는 카르타고였다고 포이히트방어는 주장한다. 카르타고의 짧은 통치 시기가 지나가고 이어서 6백년 간 로마인의 지배를 거쳐, 서고트족 기독교도가 3백년간 통치한다. 이때 로드리고라는 이름의 멍청한 왕이 있었는데 최고의 영웅이자 명장인 쥴리아노 장군이 북 지중해 해안선을 지키러 출정하고 없는 사이 장군의 딸 플로린다를 무책임하게 자빠뜨리고 만다. 플로린다의 배는 불러오지만 돈 로드리고는 이혼할 수 없는 가톨릭 유부남①이었던 것.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쥴리아노 장군은 눈이 뒤집혔을지언정 명장답게 완전하게 가면을 쓴 채 왕을 접견해, 무어족의 씨를 말리기 위해 병력이 더 필요하다면서 왕의 군사를 빌려, 용감하게 무어족을 향해 전선으로 떠난다. 그러나 장군은 무어족과 연합해 거꾸로 창을 거꾸로 쥐고 스페인을 침공해서 돈 로드리고 부부를 참살, 이베리아 반도를 무어족에게 고스란히 가져다 바친다.2 무려 4백년 동안. 작품이 시작하기 백 년 전쯤, 산악지방의 험한 지형에 기대 생존한 마지막 서고트 족이 험한 자연에 의하여 단련된 야성으로 이베리아 수복 전쟁을 시작했고, 무려 4백년에 이르는 평화로운 시간 동안 화려한 면모를 자랑했지만,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유약해질 대로 유약해진 무어족은 전쟁에 패해 순식간에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가 싶었는데, 이들은 지중해 남쪽 아프리카 무슬림에게 구원을 요청해 주로 사하라 남부의 거센 무슬림이 주축이 된, 수를 셀 수도 없는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부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지역, 세비야, 그라나다, 코르도바에서의 지배를 유지하게 된다.②

  ①을 귀찮게 왜 썼느냐 하면, 이 로드리고 왕의 멀고 멀고 또 먼 후손이자 <톨레도의 유대 여인>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카스티야의 국왕 돈 알폰소 역시 이혼할 수 없는 가톨릭 국가의 왕이면서 표제 “톨레도의 유대 여인”인 라헬 이븐 에스라와의 사이에 사생아이자 외아들인 산초를 생산한다. 이걸로 봐서 스페인에서는, 나중에 헨리 2세의 웬수 같은 아내 엘레오노르3의 말을 참고하면 전 유럽의 이혼할 수 없는 왕들에겐 사생아를 만드는 전통이 내려온 듯하기 때문이다. ②는 작품의 시대를 작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허구의 특권으로 약간 조정해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가 아빠 헨리 2세가 죽자마자 잉글랜드 군사를 이끌고, 당시엔 가히 세계대전이었던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철없이 호전적이기만 한 카스티야의 왕 돈 알폰소 역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수십만의 무슬림 군을 격멸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어떻게 해서든지 톨레도의 유대 여인 라헬에게 그녀의 고향이기도 한 세비야를 선물해주려 한다.

  마호메트 사후 80년에 안달루시아를 침공한 무슬림은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전 이베리아 반도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유럽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우수한 무슬림 문화를 들여와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정돈된, 인구가 제일 많은 나라로 만들었다. 코르도바는 서방 칼리프의 관저 소재지로 전 서방의 수도로 여겨졌으며, 관개시설을 개선하고, 이에 따라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토지가 비옥해지고, 고도로 발달한 무슬림의 광산, 제련기술, 정교하고 훌륭한 양탄자와 직물기술을 들여왔다. 코르도바 시에 학교가 무려 3천개가 있었으며 모든 대도시에 대학을 설립하고, 당연히 유명한 무슬림 도서관4을 만들었다. 그리스 철학을 새로운 사상 체계로 인정한 것은 당연히 피지배민족에게 온정을 베풀었다는 증거라서 기독교도를 위해 복음서를 아라비어로 번역한 것은 물론이고 유대인에게도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산악 서고트족의 침공으로 유입한 아프리카 형제국이 집권하자 사정이 바뀌어 자유로운 정신의 문명화된 무슬림 군주 역시 추방을 당하게 되었으며, 무수한 인구의 유대인에게는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두 가지 선택을 강요했다. 무슬림으로 개종을 하거나 떠나라고. 유력 유대 가문 가운데 하나인 이븐 에스라 가문에서는 아들 한 명을 이브라힘으로 개명을 하고 무슬림으로 개종시켜 그들의 재산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친척들은 기독교 이베리아 국가들로 떠났다. 이후 세월이 흘러 이브라힘은 대단히 총명한 중늙은이가 되었고, 원래 적지 않았던 재산이 유대인의 유전자를 타고 흐르는 셈법5에 의하여 세상에 몇 번째 되지 않는 거부를 쌓았다. 이런 이가 세비야가 아닌 톨레도의 옛집, 멀고 먼 과거 한 시절에 자신의 조상이 직접 지은 폐허 우물가에 앉아 고민에 빠진다. 카스티야의 제1 장관 돈 만리케 데 라라가 국왕 돈 알폰소에게, 패전으로 인한 경제적 피폐를 극복하고 다시 이베리아 반도의 수복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능력있는 재무장관으로 이브라힘을 추천했기 때문에.

  이브라힘은 제의를 받고 숙고를 해도 결정을 하지 못해, 오랜 무슬림 친구이자 의사이며 역사가, 철학자, 모든 지혜의 결집, 정신적 자유의 소지자라 할 수 있는 무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맏딸 레히야, 아들 아흐메드, 친구 무사와 함께 세비야에서 톨레도로 이사를 결행한다. 이브라힘은 열세 살 이전에 쓰던 자신의 본명 예후다 이븐 에스라를 다시 사용하게 되며, 따라서 딸 레히야와 아들 아흐메드도 유대식 이름인 라헬과 알라자르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한다.

  아직 어려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타나지 않았던, 비록 상대가 왕이라도 조금은 거만한 성격의 라헬이 세월이 조금 흐르면서 어떠한 기독교도가 바라보아도 그의 입을 통해 “라 페르모사” 즉, “아름다운 여인”이란 단어를 뱉게 하고야 마는 미모를 갖게 되면서, 이 길고 긴 비극은 시작한다.


  대단히 재미있다. 본문만 750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이지만 밤을 밝히게 만들 정도. 당신의 온전한 즐거움을 위하여 스토리의 거의 전부를 언급하지 않았다. 치밀한 구성에, 구태여 숨기지 않는 포이히트방어의 평화를 위한 주장이 가볍지 않다. 완전한 유대인 작가라서 실제 주인공 예후다 이븐 에스라에 과한 방점을 찍은 듯 하긴 해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의 인간적 약점이 오히려 작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포이히트방어의 다른 작품을 빨리 더 읽고 싶다.


  1. 독일-프랑스-피레네 산맥–스페인–리스본–뉴욕의 경로를 다룬 대표작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가 쓴 <리스본의 밤>이 단연 돋보인다.
  2. 이 일화가 본문에 소개되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를 동화라고 선언한다. 서고트 족의 멸망은 망할 때가 돼서 망했다는 거다. 무슬림이 이베리아 반도를 6백년 동안 다스리다보니 유약해진 것과 비슷하게. 핸델의 오페라 <로드리고>의 스토리가 이 사건이다.
  3. 매우 복잡한 엘레오노르의 생애는 그냥 넘어가자. 매우, 매우 매우 복잡하다. 사실과 관계없이 이 책에선 엘레오노르가 질투에 눈이 멀어 헨리 2세의 애첩을 살해해 열받은 왕이 왕비를 15년 동안 유폐했다가, 왕이 서거하면서 자유의 몸이 된 것으로 설명했는데 뭐 그럴 수도 있고, 작품의 매우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만드는 엘레오노르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는 한다.
  4. 무슬림 식 중세 도서관과 필사본에 관한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깜짝 놀랐었다.
  5. 유대인 작가 누군가가 그랬다(솔 벨로든가?). 유대민족이 세계에 남긴 탁월한 두 가지 업적이 악기 연주하는 거하고 고리대금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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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2-09-27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리뷰도 “대단히 재미있”어요.

Falstaff 2022-09-27 13:44   좋아요 0 | URL
ㅋㅋㅋ 고맙습니다. 책은 훨씬 더 재미나요!!

coolcat329 2022-09-27 0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저도 읽고 싶지만 스페인 역사를 모르니 자신이 없네요.
우와 근데 책값이 놀랍습니다! 도서관에 신청하기도 눈치가 보이는 금액이에요.😬

Falstaff 2022-09-27 13:45   좋아요 2 | URL
세금 많이 내셨잖아요. 그냥 신청해버리세요!

그레이스 2022-09-27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야는 제게 인상적인 화가라 장바구니에 넣어놓았구요
이 작품도 재미있을것 같네요

Falstaff 2022-09-27 13:46   좋아요 1 | URL
고야도 재미있는데요, 이 책이 좀 더 재미납니다.
참, 그림 좋아하시면 고야도 읽으셔야지요. ^^

바람돌이 2022-09-27 1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톨레도 제가 좋아하는 도시.
그래서 더 재밌어 보인다는... 골드문트님 서재는 항상 새로운 작가와 책이 가득입니다. ^^ 그런데 정말 책값이 사악하네요. ㅠㅠ

Falstaff 2022-09-27 13:47   좋아요 1 | URL
ㅎㅎㅎ 톨레도 가보셨군요. 혹시 산티아고 순례하시는 김에?
지만지 책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고보니까 도서관에 구입 신청한 책의 거의 대부분 지만지 책이군요. 이러다 사서한테 찍히는 거 아닌지 몰겄습니다. ㅋㅋㅋ

바람돌이 2022-09-27 16:16   좋아요 1 | URL
산티아고는 아니고 스페인에 고야 보러 갔어요. 그때 톨레도도.... 얼마전에 지만지 책 한권 샀는데 살때는 가격 보통 책하고 비슷해서 뭐 그냥 샀는데 온 책 두께보고 경악했어요. 진짜 비싸...ㅠㅠ

잠자냥 2022-09-27 1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격 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허탈해지네요.
100자평 보니까 골드문트 님이 심지어 도서관을 이용하셨군요! ㅋㅋㅋㅋㅋ
저희 도서관에서는 받아줄랑가 모르겠네요. 책 값이 너무 비싸도 안 받아주더라고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2-09-27 10:0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망설여지는 가격이죠?
적립금 부자 잠자냥님만 주저없이 사실듯요 ㅋㅋ

잠자냥 2022-09-27 10:13   좋아요 2 | URL
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참 비싸네요.
그리고 살 책이 왜케 많은지;;;; 아껴써야 해요...;

독서괭 2022-09-27 10:35   좋아요 2 | URL
지만지 책은 정말 다 비싸네요;; 이 책은 특히나 헉 하는 가격이군요;;

Falstaff 2022-09-27 13:48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있는 분이 더 무섭다니까요? 적립금 말입니다. ㅋㅋㅋㅋ
근데 적립금도 돈이니까, 비싼 건 비싼 거고, 너무 비싼 것도 너무 비싼 거예요.
아이고, 정말 책값은 하품 나와서리.....

stella.K 2022-09-27 1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격이 넘 비싸 대신 예비 독서로 <리스본의 밤>이라도 먼저 읽어 볼까
했더니 악명 높은 범우사. 그나마 절판이네요. ㅋ
그럴 리는 없겠지만 중고샵에 나오면 그때...^^

Falstaff 2022-09-27 13:50   좋아요 2 | URL
리스본의 밤은 레마르크의 대표작 세 작품하고 비교하면 좀 덜 재미있기는 하지만 ㄱ래도 썩 좋습니다. ㅎㅎㅎ 약 올리는 겁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