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즈워스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0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평점 :
.
1885년에 미네소타의 작은 도시에서 출생한 싱클레어 루이스는 스물아홉 살이 되던 1914년에 <우리의 미스터 렌 – 어느 신사의 낭만적 모험>(레인보우퍼블릭스, 2019)을 발표하면서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린다. <우리의 미스터 렌>의 주인공 윌리엄 렌 씨는 월급 19달러를 받는 내근직 영업관리 사원으로, 증기선을 타고 세계 곳곳을 일주한다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박봉을 쪼개 정기적금을 붓고 있지만, 상사가 어이, 빌, 이라 부르기만 하면 3초 이내로 그의 책상 앞으로 달려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여차여차 해서 정말로 증기선을 탄다. 만약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는 망상을 지닌 영국인들을 위해 그들의 정찬 테이블에 오를 운명이지만 엄연히 살아 있는 소를 항해 중에 배 안에서 돌보는 임무를 띄고 영국행의 꿈을 이루는 것으로 시작한 작품.
윌리엄 렌 씨 이야기가 나오고 15년이 흐른 1929년, 싱클레어 루이스는 이른바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여 대표작품 <배빗>을 내고 연달아 <에로스미스>와 <엘머 갠트리>를 출간한 여세를 몰아 <도즈워스>까지 발표하여 이듬해인 1930년에 미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받기에 이른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마흔다섯. 루이스는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했단다. “이걸로 나는 끝이야. 이 상에 부응해서 살 수가 없어.” 역자 후기에 나오는 얘기다. 그만큼 루이스에겐 노벨상의 부담이 엄청났던 거고, 이후, 꼭 노벨상의 저주 때문에 그랬겠는가만, 두 번의 결혼생활이 비극으로 끝나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게 됐으며, 그저 그런 작품들만 쓰다가 1951년에 로마에서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후기 작품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있을 수 없는 일이야>(현대지성, 2018)는 지난 세기 중후반에 히트했던 미국 드라마 <V>의 원작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읽어보면 파충류 외계인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대신 파시즘화 되어버린 미국에서 반 정부운동이 벌어지는 광경을 쓴 작품이다. 그러나 싱클레어 루이스는 <우리의 미스터 렌>부터 시작해서 <배빗>(열린책들, 2011)을 거쳐 이번에 읽은 <도즈워스>처럼 그렇게 크지 않은 이야기에 강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같은 본격적 가상 정치소설은 아무래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도즈워스>의 주인공 새뮤얼 도즈워스는 작가 루이스보다 딱 열 살이 많은 1875년생이다. 데뷔작의 주인공 빌 렌 씨와는 다르게 크고 당당한 체구에 갈색 콧수염을 기른 큰 머리의 사나이였다. 예일 대학의 1896년 졸업생으며 당시엔 실력 있는 풋볼 선수로 특히 하버드와의 시합에서 두각을 나타낸 스타였단다. 무대는 가상의 제니스 시인데 매사추세츠와 함께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도시. 문명의 전성기인 1903년에 이야기는 시작한다. 새무얼, 샘 도즈워스는 학창시절의 룸 메이트이며 훗날 제니스 시의 유력한 은행 회장이 될 토머스 J. 피어슨 등과 함께 파티에 참석을 하는데, 현대 과학의 총아이지만 전통적인 마차에 밀려 3년 안에 사라질 유행 장난감인 자동차를 타고 마치 권력을 쥔 느낌을 향유하면서 우주를 지배하는 기분으로 무려 시속 32 킬로미터로 질주해 도착했다. 샘은 20년이 지나 1924년이 되면 자동차가 마차만큼 흔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의 우상인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가 회장으로 있는 레벌레이션 자동차회사로 이직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때 파티장에 나타난 열아홉 살의 귀엽고 아름다운 프랜시스 볼커. 유럽에 오래 체류하며 이것저것 공부한 덕에 온갖 외국어를 섭렵하고 있는 아가씨로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허먼 볼커의 외동딸이다. 허먼 볼커로 말하자면 제니스에서 가장 큰 집에서 살며, 시의 자금조달과 상품판매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계 이민자의 대표격이었다. 샘은 프랜시스, 프랜을 차에 태워 시속 32 킬로미터의 놀라운 속도로 자동차를 몰아 이날 자정에 호숫가에 앉아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고, 그해 11월에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한다. 열아홉, 혹은 스무 살이 된 프랜은 당혹해 한다.
“오, 샘. 하지만 난 너무 욕심이 많아! 제니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갖고 싶어! 좋은 아내와 엄마가 되어 예쁘장한 모습으로 카드놀이나 하고 싶진 않아! 난 찬란한 걸 원해! 거대한 지평선들! 우리 함꼐 그런 걸 찾을 수 있을까?”
샘은, 당근이지, 대답을 하고, 그해 안에 결혼해버리고 만다.
이후 정말로 샘은 레벌레이션 자동차회사에 입사해 자동차에 특별한 비전을 갖고 있는 터라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을 하면서, 마차 비슷하게 생긴 지금까지 자동차의 모양을 기다란 직선, 즉 유선형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 그러나 당시 사고방식에 의하면 ‘헛소리’를 발의하게 된다. 게다가 극히 일부 부르주아 계급만 마치 특권처럼 가질 수 있는 자동차마저 최대로 싼 가격으로 많은 고객에게 파는 것이 최대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하니 이런 창의적 도라이를 좋은 시각으로 봐줄 회사는 당시 미국에서도 없었다.
여차하면 잘릴 위기를 맞은 샘. 샘은 한숨 돌리면서 이 시간 동안 재무기술을 배우는 데 사용하며, 장인인 허먼 볼커의 재산을 활용해 레벌레이션 자동차회사 주식의 23 퍼센트를 확보해 부사장 겸 생산관리자, 요새말로 COO 자리에 올라, 최초로 문 네 개 모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제품이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켜 이후 20년간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는 바람에 샘은 너무도 바쁜 생활을 하느라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어느 새 쉰 살이 됐고, 돈 계산과 자동차 생산과, 기술 혁신과, 새로운 아이디어 개발과, 주식 동향과 골프 핸디캡에 신경쓰느라 환갑이 넘은 외모를 갖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1925년. 어느새 프랜도 마흔한 살. 프랜은 그동안 취미생활과 피부관리와 쇼핑에 힘써 얼핏 보기엔 서른한 살 또는 이십대 후반의 외모를 지니게 됐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은 생기는 법이라서 스무 살 난 딸 에밀리는 열네 살 연상으로 1차 세계대전에 대위로 참전한 전직 테니스 선수, 현직 밴더링 볼트와 너트 사(社)의 부지배인 해리 매키와 결혼 날짜를 잡았고, 아들 브렌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예일대 3학년에 재학중이다.
샘 도즈워스는 이제 흠잡을 데 없는 미국의 실업가로 공화당원이며, 높은 관세와 금주법, 미국 성공회를 지지하는 레벌레이션 사의 회장 자리에 앉은 백만장자다. 저택은 가장 세련된 지역인 리지크레스트에 있으며 아내 프랜에게 비아냥을 받기는 하지만 동판화에 안목이 있고, 가끔 베토벤을 들으러 음악회 나들이를 하기도 하고, 인상적인 연설을 할 줄도 안다. 반면에 이제는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거나 비극적으로 패배하거나, 열대 섬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흘러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유닛 자동차 회사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레벌레이션의 주식을 모두 양도하고 은퇴는 시기가 도래한 것.
독자는 22년 전에 샘이 프랜에게 청혼할 당시, 프랜이 당황하면서 샘에게 한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22년 동안 프랜은 인디애나 주의 어떤 정치인도 자신보다 솜씨 좋게 적을 회유하고, 친구에게 조언하고, 하는 일 없는 정치기구를 만들지 못할 입담 실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런 솜씨로 이제 은퇴해서 가진 거라고는 여차하면 깔려 죽을지도 모를 백달러 지폐 뭉치와 시간밖에 없는 샘을 요리해 샘에게 유럽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유럽에서 돌아오자는 말로 부부를 얽매지 말기. 넉달 뒤에 돌아오자고 정하지 말기. 4년이라도 마찬가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꼭 거기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기. 당장 배 타고 돌아오기. 원할 때 돌아오고, 내킬 때 내키는 곳으로 떠나자는 거 말고는 아무 계획 없이 지겨운 미국의 도시를 떠나기.
어떠셔? 그럴 수 있겠지? 일찍이 유럽에서 교육받은 부잣집 외동딸을 꼬여 결혼을 하고, 어쨌든 장인 덕에 회사 임원을 거쳐, 비록 자기 실력과 역할이 제일 큰 역할을 했지만 회장의 자리에까지 올라 이십 년 넘게 미국 땅을 떠난 적이 없으니, 퇴직을 기념하여 정처없이, 계획없이, 무한정으로 그러나 말처럼 정말로 4년은 되지 않을 것이 확실할 정도로 유럽, 런던, 파리, 베를린, 로마와 반도의 여러 도시, 스페인과 그리스 등을 다니면서 넘쳐나는 돈을 바탕으로 미국엔 단 한 명도 없는 공, 후, 백, 자, 남작들과 교류해보자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그랬다. 그래서 이 행복해 보이는, 또는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부부는 맏딸 에밀리가 결혼하고 3주 후인 1926년 2월, 3만2천 톤급 S.S.얼티마호를 타고 뉴욕항을 떠나 영국의 사우샘프턴으로 향하면서 드디어 한 부부의 개인사적 일대 로망의 막이 올라간다. 즉,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얘기. 본론은 직접 확인하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