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서울연극제 희곡집
손기호 외 지음 / 서울연극협회 / 202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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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으로 일단의 서울연극제와 희곡우체통 연속 읽기가 끝난다. 우리나라 현대 희곡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2021년 서울연극제는 2021년 4월 30일부터 5월 30일까지 대학로와 명륜동 일대의 극장에서 총 8편의 공식선정작과 두 편의 단막 스테이지를 공연했다. 이 가운데 저작권 문제로 네 편의 공식선정작을 제외하고 모두 여섯 편의 희곡을 실어 연극제 기간 중인 2021년 5월 15일 초판 발행했다. 실린 작품과 포스터는 아래와 같다.


  공식 선정작

  손기호 작, 극단 이루, <나는 지금 나를 기억한다>

  이우천 작, 극단 대학로극장, <노인과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김수정∙원아영 작, 극단 신세계, <생활풍경>

  이금구∙박일석 작, LP STORY, <허길동전>


  단막 스테이지

  김지선 작, 창작공동체 아르케, <구멍>

  김희연 작, 창작집단 지오, <악셀>



  <나는 지금 나를 기억한다>는 극중 극중 극 형식으로 되어 있다. 처음엔 구도가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금방 익숙해진다. 처음엔 연극 <나는 지금 나를 기억한다>를 보러 온 연출가와 여배우, 교수이기도 한 연출가의 여성 제자들이 등장하고, 두번째 극엔 화장실 세면대 위에 휴대폰을 놓고 온 학생 휴대폰녀가 ‘중년 여인’이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갔다고 주장하는 장면, 세번째 극엔 연출가와 젊은 연출가, 작가를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모두 유혹한 여배우 이야기가 벌어진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휴대폰녀-중년 여자의 에피소드가 별로 유쾌하지도 않은데 너무 길게 이어져 불만스러웠다.

  두번째 작품 <노인과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난데없이 저격용 소총으로 무장한 살인청부업체를 등장시킨다. 이 회사의 전설적인 직원 1948은 파월 맹호부대 출신의 저격수로 베트남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해 21세기가 도래했음에도 베트남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 처분을 받았을 정도이고, 이제 혜성처럼 등장한 신세대 저격수 1995는 올림픽 사격 국가대표 출신으로 예쁜 얼굴에 잘 빠진 몸매의 소유자라서 청부 일을 하되 저격이 아닌 미인계를 통한 비밀스러운 암살자로 육성하고자 했으나 1995 본인이 성차별에 극단적인 알러지 반응을 일으켜 저격수를 고집하고 있다. 회사는 이 두 명을 한 팀으로 구성해 일을 시키고 있지만 첨단 시대에 맞게 킬러 로봇을 채택해 필요하지 않게 된 이들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처한다는 연극 무대에 적용하기엔 좀 황당한 내용이다. 영화라면 모를까.

  <생활풍경>은 장애인 학교 건립을 하고자 하는 교육감과 이에 찬성/반대하는 주민들 간의 토론회 현장을 그리고 있다. 상당한 부분은 팩트다. 장애인 학교를 짓고자 하는 동네 한강시 수리구가 하필이면 작은 면적의 임대 아파트가 촘촘하게 지어진 이른바 빈촌이며, 장애인 학교가 이미 한 곳에 들어서 있다. 서울에 장애인 학교가 없는 구도 여덟 곳이라고 하고,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면 땅값, 아파트 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으로 꽉 찬 지역민들이 부잣집 장애 아이를 위한 공간을 내주기 꺼려하는데, 매스컴이나 교육감 등은 이것을 님비 현상 아니냐 지적하기도 한다. 급기야, 장애 아동을 둔 엄마들이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서 단체로 무릎을 꿇고 제발 학교를 짓게 해달라고 탄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건 팩트로 알고 있다. 이 작품은 실제 공연에서는 모르겠지만, 너무 장황해서 도무지 읽을 맛이 나지 않았다.

  <허길동전>은 광해군, 이이첨, 허균, 당대의 명기인 매창 등이 등장하여 홍길동이 찾아간 율도국을 운운하며 조선과 새 조선으로의 율도국의 자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퓨전 희곡이다. <홍길동전>은 우리가 아는 작품과 당시에, 정말로 그랬는지 허구인지 몰라도, 일반 백성들이 관람하라고 시장터에서 공연하던 것과 달라, 시장 버전은 길동을 병조판서에 제수한다는 미끼로 궁에 들게 해 목을 치려 하는 순간, 칼을 뺏은 길동이 칼로 임금의 목을 베는 장면으로 끝난다고 설레발 친다. 광해군을 둘러싼 이야기가 하도 많아 새삼스러운 건 하나도 없고, 광해군의 왕권주의와 이이첨의 신권주의가 부딪는 장면도 신선하지 않다. 광해군의 꿈꾸던 조선의 모습이 그러면 율도국에서 만들어졌는가 하면 율도국 역시 현재의 조선과 같은 이념에 젖어 있다는 것. 그러니 토마스 토어 <유토피아>의 어원이라 하는 율도라고 지상 낙원일 턱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네 편의 공식 선정작 가운데 한 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점. 극중 극중 극은 사색이 결여되어 있고, 살인청부업에 종사하는 저격수 이야기는 차라리 만화였으며, 장애인 학교 건설을 둔 주민간의 다툼은 재미도 없이 장황하기만 했고, 허균과 이이첨 그리고 광해군의 이야기도 새롭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읽기로는 공식 선정작이 아니라 “단막 스테이지”라고 해서 2021년에 처음 시도한 짧은 단막극이 더 재미있었다.

  김지선의 <구멍>은 어느 날 유치원 다니는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아이와 함께 아내를 잃은 남자의 이야기다. 갑자기 무슨 구멍이 생겨 아이가 구멍 속으로 빠졌고, 이를 바라보던 엄마도 순식간에 한 구멍 속으로 미끄러졌던 것. 여기서 구멍이라 함은 죽음의 입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처자식을 잃은 남자는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 마셨는데 물이 아니라 다른 액체가 들어 있어서 회사에 사표를 내고 액체의 정체를 밝히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이 액체 역시 삶 속에 숨어 있는 또다른 구멍이 아닌가 싶어서.

  김희연의 <악셀>은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어 썼다가 벌써 이자로 원금의 열 배를 물어준 남자가 연인과 함께 사채업자가 얻어준 구형 벤츠 차량을 타고 거대한 느티나무에 고의로 사고를 내 보험금을 뜯어내기로 한, 동트기 전의 새벽이 무대고 시간이다. 연인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보육원으로 들어가 거기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라 남자를 만났고,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황. 이를 하필이면 이 새벽에 알게 된다. 남자는 사고를 내기 전에 여자와 아이가 다칠 것을 염려하여 차에서 내리라고 하지만 여자는 결코 그럴 마음이 없어서, 결국 두 남녀가 탄 고물 벤츠는 느티나무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한다.

  <구멍>과 <악셀>이 더 좋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장이 없고 간결하다. 그러면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다. 공식 선정작들은 장황하거나 황당한 이야기만 난무할 뿐 독자 혹은 관객들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바람에 뭐 생각을 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우리나라 희곡이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최고다, 아니면 적어도 쳐지진 않는다 라고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 연극 공연을 보러 자주 가지 않는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기가 민망하더라도, 어쩌랴, 공연 말고 희곡을 읽으면서 그렇게 느끼게 되는 걸. 좀 더 힘을 내서 분발해주면 좋겠다.



* 이것으로 우리 현대 희곡 읽기 1차 미션이 끝났다. 하여튼 속은 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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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4 1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골드뮨트님. 우리 희곡을 이렇게 읽어주는 것도 연극을 위한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해요. 저는 희곡을 잘 못 읽어내서 골드문트님 글만으로 만족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우리나라 희곡의 세계를 잠시 엿볼수 있었습니다. ^^
우리 현대 희곡 읽기 1차 미션 완수 축하드려요. ^^

Falstaff 2022-06-25 11:15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우리 희곡의 맹점은, 창작 희곡의 경우, 연극을 올린 후에 희곡을 출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간한 ˝인기˝, 작품성은 다음으로 하고 ˝인기˝가 없는 연극의 희곡은 아무리 좋아도 그냥 묻혀버리는 일이 많다고 들었어요.
앞으로도 희곡 읽기는 계속됩니다. ^^

공쟝쟝 2022-06-24 11: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일단 골드문트님 반가워서 댓글달고 ㅋㅋㅋ 읽고 다시 돌아올게요! 😆

Falstaff 2022-06-25 11:16   좋아요 1 | URL
아이고, 저도 반갑습니다!!

그레이스 2022-06-24 14: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멍>! 생각할 지점이 많은 듯,,,
관심이 갑니다.

Falstaff 2022-06-25 11:17   좋아요 1 | URL
이른바 단막 스테이지.... 단막극이 간결하면서도 찡할 때가 왕왕 있습지요.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잠자냥 2022-06-24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머 걸드문트다!

Falstaff 2022-06-25 11:17   좋아요 1 | URL
와, 잠자냥 님이닷!

mini74 2022-07-08 17: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한동안 뜸하시더니 ㅎㅎ 뭔가 탕자의 귀환같습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

Falstaff 2022-07-08 18:16   좋아요 2 | URL
ㅎㅎㅎ 쑥쓰럽게도. 고맙습니다. 미니님! ^^

이하라 2022-07-08 18: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주말되세요.^^

Falstaff 2022-07-08 19:07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근데 좀 쑥쓰럽습니다. 잘 쓰지도 못했는데 말입죠. ^^;;

그레이스 2022-07-08 18: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려요 ~~

Falstaff 2022-07-08 19:07   좋아요 2 | URL
아이고, 그레이스 님도 축하합니다! ㅋㅋㅋㅋ

새파랑 2022-07-08 19: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다시 쓰셔도 바로 당선되는 골드문트님 축하드립니다~!!!!

Falstaff 2022-07-08 20:57   좋아요 1 | URL
아이고, 이거 참 쑥쓰러워서리... ㅋㅋㅋㅋ 고맙습니다. 새파랑님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