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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니와 애니 ㅣ 창비세계문학 12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백낙청.황정아 옮김 / 창비 / 2013년 1월
평점 :
D.H. 로렌스는 좀 이상한 작가다. 어느 하나 읽으면서 독자를 열광시키지 못한다. 그냥 그렇다는 감상만 남기고 책꽂이에 꽂아 놓는데, 그런데 앙금이 많이 남는다. 대표적으로 나한테는 <아들과 연인>이 그랬다. 저 먼 시절, 소싯적에 소위 육체파 여배우 실비아 크리스텔이 타이틀 롤을 한 영화 <차타레 부인의 사랑>을 구경하기 남사스러워 영화 대신 소설책을 읽은 적이 있어, <아들과 연인> 역시 비슷한 분위기일 것이라 짐작했건만, 작가 로렌스가 출생한 탄광지역을 배경으로, 아들을 의지하고 살던 여인 앞에서 며느리자리가 들어오는 복잡한 심경을 그린 심리소설이었던 거다. 당연히 완고한 잉글랜드 중부의 탄광지역 사람들도 총출동해서 당시 지역사회를 반영하기도 했다. 하여간 다 읽고 그저 그렇다 싶은 작품, 정도로 그냥 넘어갔다. 근데 뭐가 씌웠는지 이어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 <무지개>, <사랑에 빠진 여인들>을 일년에 한 편 씩을 독파해 나간다. 이번에 《패니와 애니》를 읽은 것은, 어떤 작가의 어떤 책하고 헷갈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읽었다고 지레짐작을 했다가, 초라한 DB를 검색해보니 읽지 않고 읽은 듯한 느낌만 가지고 지나쳤던 거였다. 로렌스가 그렇다. 강하게 흥미를 끌지는 못하지만 눈에 띄기만 하면 당연히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거. 하여간 이제 4년 만의 로렌스, 《패니와 애니》를 읽었고, 이걸로 판매중인 로렌스의 ‘소설 작품’은 완독을 하는 셈이다.
1991년에 백낙청은 《목사의 딸들》이란 제목의 로렌스 단편선을 창비에서 찍는다. 이후 10년이 지난 2001년에 창비는 책의 5쇄를 찍을 생각을 했고, 말이 10년이지 10년 동안의 인플레이션을 생각하면 가격을 팍 올려야 하는데 5쇄를 찍으며 값을 올리려니 벼룩도 낯짝이 있지 소위 말하는 ‘개정판’ 즉, 중판을 찍으면서 정가를 8천원으로 책정했다. 이후 12년이 다시 흘러 2013년이 도래하고, “세계문학 독서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자” 창비 세계문학의 12번을 《목사의 딸들》로 하긴 조금 찔렸는지 8천원짜리 《목사의 딸들》에다가 황정아가 번역한 세 단편, <패니와 애니>, <눈먼 남자>, <해>를 포함시켜 1만3천원의 정가를 때린다. 22년 전에 번역한 작품에 단편 소설 세 편을 보태 가격을 63퍼센트 올렸다. 22년 전 번역, 63퍼센트 가격인상. 단편 세 작품 추가. 읽고 싶으면 사고, 비싸다 생각하면 읽지 말거나 도서관 가면 될 일. 책장사한테 뭐라할 일 아니다. 책장사한테 함부로 시비하지 마시라. 여차하면 코피 터진다.
《패니와 애니》는 단편소설 일곱 편이 312쪽에 걸쳐 실려 있고, 역자후기, 작품해설 및 초판, 개정판, 개정증보판 서문과 작가연보, 발간사가 33쪽에 걸쳐 들어있다.
일곱 편을 차례로 읽다보면 처음 네 편과 뒤에 황정아가 번역한 세 편의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백낙청이 번역한 <국화 냄새>, <목사의 딸들>, <프로이센 장교>, <당신이 날 만졌잖아요>는 초기, 황정아 번역의 <패니와 애니>, <눈먼 남자>, <해>는 중기 작품이라고 한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국화 냄새>는 탄광 지하에서 갱이 무너졌지만 상처 없이 갇혀 질식해 죽은 남편, <목사의 딸들>은 하필이면 탄광촌에 박봉 봉급쟁이 국교회 신부로 부임했지만 노동계급인 탄부와 직공 가족들에겐 가오잡고 싶어하는 속물 신부 가족과 이에 반항하는 딸, <프로이센 장교>에서는 제대를 앞둔 당번병 병사를 괴롭히는 진급 포기한 늙은 대위, <당신이 날 만졌잖아요>에선 도기 제작소로 입양을 온 고아원 출신 양자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1차 세계대전 끝나고 집에 들러 벌어지는 사달 등 무대가 전부 탄광지역이나 공장지대 또는 그곳 출신이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가 태어난 곳이 저 먼 옛날 로빈후드가 리틀존과 함께 셔우드 숲에서 눈썹을 휘날리던 노팅엄의 탄광지대 출신이라 다분히, 특히 <국화냄새>와 <목사의 딸들>에선 이이의 초기 장편 <아들과 연인> 속에 하나의 에피소드로 쑥 집어넣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무지개>하고도 어울릴 듯하고. <당신이…>는 <사랑에 빠진 여인>하고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뭐 그렇게 이야기해도 크게 틀린 것 같지 않다. 아니, 그럴 듯하다.
반면에 중기 단편들, 특히 <눈먼 남자>와 <해>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씨앗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작품들이 단편이라 줄거리를 여기에 소개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지만, <눈먼 남자>에서 눈이 먼 남편은 1차 세계대전 중 플랑드르 전투에서 두 눈을 실명하고 이마에 큰 상처를 입은 채 그레인지 저택으로 귀환한 모리스 워넘 씨고, <해>의 주인공 줄리엣은 의사가 옷을 모두 벗고 일광욕을 하라고 처방을 받아 아들과 함께 정말로 모든 옷을 벗은 채 일광욕을 해 피부가 가무잡잡하게 탄 상태다. 이이의 앞에 하루는 서른다섯 살 먹은 농부가 등장하고, 줄리엣의 벗은 몸을 정면에서 바라본 농부는 순간 줄리엣이 보기에도 확실하게 욕망이 솟구쳐 갈증이 가득한 눈길을 뚝뚝 흘리게 된다. 두 작품을 얼키설키 섞어 놓으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대강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즐길 만한 소설집이다. 이젠 로렌스의 매력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힌다. 그러고보니 주위에 로렌스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제 내가 말하리라. 나는 D.H.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작품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