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링 오에 겐자부로 장편 3부작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일본을 방문한 외국 대통령에게 영어 좀 하는 일본 국회의원이 다음 선거가 잘 되기 바란다고 덕담을 했다. 그걸 들은 외국 대통령은 일본 국회의원의 말이 자기가 여태 들었던 최고의 덕담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일본 국회의원이 자기한테 분명하게 “다음 번 발기에 성공하기 바란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영어 election을 혀 짧은 일본인이 erection으로 발음해서 생긴 범 세계적 농담이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잠깐 보자. 한도우 경금속의 경리부 과장, (한)반도 출신 기노시다 히데요는 알루미늄Aluminium을 자연스럽게 ‘알루미늄’으로 발음하지만, 부장 다나카 슈지를 비롯한 내지 출신들은 이를 ‘아루미니우무’라고 고통스럽게 발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렉션을 일렉션이라 하지 못하고 겨우 ‘이렉션’이라 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체인지링>은 changeling, 우리 같으면 ‘체인질링’이라고 했을 것을 역자 서은혜가 일본어 가타카나를 소리나는 대로 우리말 제목으로 했다. 그래서 미리 사소한 지적질을 하고 넘어가자면, 서은혜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애매한 일본식 한자어를 그냥 그대로, 우리도 흔하게 쓰는 단어인 것처럼 옮긴 경우가 왕왕 있다. 글쎄, 내 생각으론, 이해하기 힘든 일본식 한자어를 알아듣기 편한 우리말로 바꾸는 것 같은 번역상의 불편함을 극복 또는 무릅쓰는 것도 역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 아닐까 싶다. 출판사 잘 못 만나서 계속 쇄를 찍지 못하고 절판된 것도 열불이 날 터인데 이런 타박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지만.

‘체인질링’이란 것부터 알아야 쉽게 이해가 될 터. 나무위키에는 “요정이 인간의 아이를 납치하고 대신 놓고 간 아이” 라고 나와있다. 여기서 말하는 요정이란 우리가 아는 nymph나 fairy가 아니라 고블린에 가깝다. 고블린이 두고 간 아이가 원래 인간의 아이처럼 예쁘기를 기대할 수 없어서, 체인질링은 대개 장애가 있거나 사납거나, 하루 종일 울고 짜고, 징징대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원래부터 극우 애국주의자들이 유독 많은 일본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이는 노벨 문학상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열일곱 무렵부터 친하게 지낸 절친이자 손위 처남이기도 한 이타미 주조가 자살해버린 일을 계기로 이 작품을 쓴다. 이미 만년에 들어선 오에는 평생의 소설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최후의 작품으로 삼부작을 구상한다. 첫째가 <체인지링>이고 두번째가 <우울한 얼굴의 아이>, 마지막으로 <책이여, 안녕>. <체인지링>은 말한대로 이타미 주조, 작가의 처남을 위한 조종일 터. 나머지 두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두 권의 독후감을 포스팅 하는 것으로 2021년을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상당한 부분 작가 자신을 포함한 가계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 <개인적인 체험>, <익사>, <만엔 원년의 풋볼>,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이들이 내가 읽은 오에의 장편소설이다. 물론 각각이 대단히 진지하고 독립된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작품들이 서로 촘촘한 얼개를 지니고 있어서, 물론 아니어도 좋겠으나 출간 순으로 읽는 것이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체인지링>에서 애초 내가 예상했던 것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이야기 한, 뇌헤르니아 상태로 태어나 평생 지적 장애를 앓아야 하지만 작곡가의 삶을 살고 있는 아들 오에 히카리에게 헌정하는 작품일 줄 알았다. 그러나 <체인지링>에서 뻗은 거미줄은 오히려 <만엔 원년의 풋볼>과 더 긴밀하여 폭력이 어떻게 한 인간을 말살할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

 오에 겐자부로 본인이 틀림없는, 그러나 소설이라서 확정할 수는 없는 주인공 나가에 고기토는 서재 간이침대에 헤드폰을 낀 채 청소년시절부터 친구이자 처남이기도 한 하나와 고로, 이타미 주조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스타 영화감독이 보낸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있다.

 “…… 그렇게 된 셈이지. 나는 건너편으로 옮겨가네.” 하더니 쿵,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난다. 이어서 “하지만 자네와 교신을 끊은 건 아냐.”라는 말이 들려오고, 생전 서재엔 발걸음을 하지 않는 아내 치카시가 다가와 말한다. “고로가 자살했어요.”

  고기토는 유력 일간지 거물급 기자에게 10년 이상 받아온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심신이 지쳐 있었다. 사실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일본 사회에서 좀 유난스럽다고 알려진,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태클이, 세계적으로 큰 상을 받은 고기토에 집중이 되고 있었던 것. 일본인에 대한 편견 가운데 하나가, 특출하거나 돋보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고기토는 이것을 일종의 폭력으로 받아들여 나름대로 적절한 대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은 자신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해 우울증으로 성가셔 했다. 이때 처남 고로가 카세트 테이프 50개와 플레이어가 든 두랄루민 트렁크를 선물한 적이 있고, 이것을 들고 고기토가 시내버스 안에서 작동을 시켰다가 작지 않은 소리로 포르노 녹화방송이 터진 적이 있었다. 우울증의 곤경에 상응하는 저열한 ‘인간다움’으로 대항하라는 취지에서 한 선물이었다고. 수년 후 테이프를 폐기했을 때 고로가 다시 30개 정도의 테이프를 보내와, 서로 “물장군”이라 부르는 큰 녹음기에서 재생을 시켜 듣고 있었던 것. 물장군에서 들린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고로가 건물에서 떨어져 났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다. 3부작의 두번째 작품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 나오는데, 사람의 몸무게와 같은 중량의 트렁크를 밧줄에 묶어 대들보에 매고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는 소리였다. 목 매달아 자살하는 예비실험으로.) “나는 건너편으로 넘어가네.”는 죽겠다는 뜻이고, 그렇다고 “자네와 교신을 끊은 건 아니야.”라니 사후에도 서로 의사소통을 하겠다는 거였다. 쿵, 소리가 고로의 죽음이 낸 것이라면 테이프는 특정인의 편집을 거쳐 만들었을 테니 말이 되지는 않는다.

 의사소통? 어떻게? 그리하여 고기토, 아니, 오에 겐자부로는 물장군이란 특별한 장치를 설명하는데 한 챕터를 다 사용한다. 고기토가 테이프를 통해 고로가 남긴 녹음의 한 구절 또는 한 단락, 하여튼 일정 부분을 듣고 재생을 멈춘 다음, 고로가 한 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아무도 없는 방에서, 서재 밖에 예민한 아내 치카시와 더 예민한 작곡가 아카리가 있는 걸 무시하고, 주절주절 늘어놓는 식이다. 이것도 물론 의사소통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위 문단에서 쿵, 하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독자는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그냥 믿어주는 편이 바람직하다. 이 물장군 의사소통을 통해서 고기토는 효과적으로 패전 후, 자신의 하이틴 시절, 고향 시코쿠 산골에서 있었던 ‘그것’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 그렇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 책에서 제목으로 쓴 체인질링을 거론한 사람은 주인공이자 작가 오에 겐자부로 본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고기토가 아니라 아내 치카시다. 치카시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외모에 다양한 방면으로 만발하는 재능을 선보인 오빠 고로가 청소년 시절의 한 순간에 망가져버린 것을 보았다. 바로 그날, 고로는 지금은 남편이 된 고기토와 함께 밤이 거의 다 새는 시간에 들어와 찬물로 온몸을 씻은 걸 기억한다. 틀림없이 그날을 기점으로 날이 선 인간으로 변한, 마치 진짜 고로는 누가 훔쳐가고 빈 자리에 가짜 고로, 얼음조각으로 만든 가짜 고로를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을.

 고로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야쿠자의 칼을 맞은 적도 있다. 부상당한 몸을 하고도 방송국 카메라를 향해 승리의 V자를 날리며 여유작작하게 미소 짓던 고로가 왜 죽음을 결정했을까. 물론 노년기 우울증이 돋았겠지만 혹시 한 개인에게 가해진 폭력의 후유증은 아니었을까? 과거 한 시절 고로와 고기토가 서로 오랫동안 교통하지 않고 지내게 만들었던 ‘그것’과 비슷하게. 오에 겐자부로는 이렇게 진중한 은유를 써가며 폭력에 반대하고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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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2-24 08: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부스터 맞아 오늘 휴가입니다. 아, 이 한가함이라니. 느므 편하군요.

바람돌이 2021-12-24 09:13   좋아요 1 | URL
부러움요. 부스터 맞으면 휴가라니....ㅠ.ㅠ 이쪽은 부스터 맞아도 출근..

stella.K 2021-12-24 12:14   좋아요 2 | URL
오늘은 약주 안하실 거죠?
해피한 크리스마스되시길~!^^

Falstaff 2021-12-24 12:30   좋아요 2 | URL
어제 부스터 맞았는데, 1차, 2차에 없었던 부작용이 좀 있는 거 같네요.
팔 근육통, 주사 맞은 반대편 뒷목 근육통과 경미한 두통.
오늘까지 술 마시지 말래요. 산타 오시면 마주 앉아 고스톱이나 한 판 두드려야겠습니다. ^^
스텔라 님도 온 가족과 함께 즐거운 성탄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1-12-24 0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 꼭 읽어야지 하면서 지금 계속 미루고 있는 작가. 저는 내년에 꼭 만나렵니다. ^^
주말이자 크리스마스, Falstaff님 메리메리 하세요. ^^

Falstaff 2021-12-24 09:21   좋아요 1 | URL
ㅋㅋㅋ 부러워 마세요.
부스터 맞고는 아직 하나 남은 ˝하기 휴가˝ 쓴 겁니다.
2차 까지는 백신 휴가 썼고요, 부스터 휴가는 지금 노조하고 협상 중입니다. 나중에라도 쓸 수 있으니 일단 하나 남은 하기휴가부터 없앴습죠. ㅋㅋㅋ
오에는 제가 좋아하는 극히 드문 일본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평화주의자고 실천운동가이기도 하고,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하고 글도 잘 쓰고 다 좋은데, 솔직히 이 양반 책 읽어보면 인간적으로는 재수 없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ㅋㅋㅋㅋ
오에 읽으시려면 <만엔 원년의 풋불>은 꼭 읽으셔요!!
바람돌이 님도 즐거운 성탄과 연말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1-12-24 09: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장면 생각나네요^^
복거일은 그런 필력으로 왜 그런 글을 쓰는걸까 생각했던 기억도...! 제가 너무 어려서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제 옆엔 <일상생활의 모험>과 <개인적인 체험>이 있네요. ㅎ

Falstaff 2021-12-24 10:35   좋아요 3 | URL
<비명을 찾아서>가 데뷔작이잖아요. 초기 복거일은 정말 매력 만점이었습니다. <비명..>도 최인훈의 <태풍>, 가상 역사라는 장르를 더 재미나게 만들어서,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고, 조선인들은 역사왜곡으로 일본을 모국으로 알고 산다, 근데 이상하게 섬 사람들은 반도 사람을 좀 우습게 알고, 경금속 같은 공해산업은 전부 반도에 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파란 달 아래>는 통일된 조선이 달 기지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옛 남북조 시대를 회상하는 장면도 재미났고요.
특히 <시간 속의 나그네> 3권까지 정말 죽여주는 SF, 과거로의 시간여행이었는데, 일흔 살이 넘어서 완결판을 내 세 권을 더 내는 바람에 망쳐버렸습니다.
ㅋㅋㅋㅋ 복거일이 잘 나가다가 극우, 꼴보수로 선회해서 x랄이지, 그의 초기 작품들은 괜찮은 걸로.... 그저 사람은 잘 늙어야 해요.

그레이스 2021-12-24 13:13   좋아요 2 | URL
^^
이미 비명을 찾아서에 자조적이고 패배적인 역사의식을 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얄라알라 2021-12-24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l과 r!!!!!이런 외교 결례가 가능하군요 역대급입니다.

Falstaff 2021-12-24 10: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농담입니다. ^^

coolcat329 2021-12-24 10: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해 독서는 오에 겐자부로 삼부작으로 마무리하시는군요. 한권도 안 읽어봤지만 책은 두 권 가지고 있습니다.
폴스타프님 메리 크리스마스되세요~

Falstaff 2021-12-24 10:41   좋아요 3 | URL
옙. 독후감은 오에 겐자부로가 마지막이고요, 31일에는 언제나처럼 페이퍼가 올라올 겁니다.
쿨캣님도 즐거운 성탄 보내세요!

새파랑 2021-12-24 1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체인지링이 체인질링이었군요 ㅋ
어느 외국대통령이었는지 검색해봐야 겠어요~!
몇일 안남은 올해이지만 삼부작으로 즐겁게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Falstaff 2021-12-24 12:30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 세계적인 ˝농담˝이라니까요!

청아 2021-12-24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느낌이 들어요! 말씀하신것처럼 일본인들은 튀는걸 싫어한다고 책에서도 읽었는데 그런것 때문에 정부의 무능이나 부패에 대해서도 우리와 다르게 국민들이 크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더라구요.
폴스타프님 휴가 잘 보내시고 유쾌한 성탄절 보내세요🎅🎄🌟

Falstaff 2021-12-24 18:00   좋아요 1 | URL
아휴, 심오하긴요. ㅎㅎㅎ
일본인들이 좀 그렇다고 하지요? 그게 천 년을 이어온 무인시대의 결과라고 합니다. 힘 센 놈들 눈밖에 나면 걍 죽여버려서, 자신이 뛰어나도 그걸 과시하는 걸 천 년 동안 참다보니 어느새 국민성이 된 걸로요. 자기보다 낮은 계급에겐 가차없고, 조금이라도 높은 계급에겐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이 그저 굽실굽실 하는 게 다 이유가 있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