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초 대산세계문학총서 57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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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2년 1월, 뉴욕시 23번가 브라운스톤 14번지에서 조지 프리더릭 존스와 루크리셔 스티븐스 라인랜더의 딸로 태어난 이디스 뉴볼드 존스는 가족들로부터 ‘고양이 존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4월에 침례교 세례를 받고, 네 살이 되는 해에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가서 유년시대를 지내고 열 살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온다. 이후에도 별일이 없는 한 가족은 매년 유럽에서 몇 달씩 체류하는 전형적인 미국 부르주아의 소비성향을 과시한다. 스물세 살 때 테디 워튼과 결혼을 해서 이디스 워튼으로 이름을 바꾼 작가는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을 구대륙에서 생활하거나 여행하는 데 정열을 바쳤다. 그의 작품 <순수의 시대>에서 보면 구대륙에서 놀러 온 갓끈 떨어진 늙은 남작 나부랭이에게 최고의 대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이의 여러 작품을 보면 신대륙 부르주아들은 구대륙 상류계급 인간들에게 무슨 열등감이 있는지 한 수 접히는 듯한 인상이 들거나, 열등감을 만회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돈 지랄 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 한 명의 대표적인 작가가 나중에 정말로 여권까지 바꿔, 대표적인 영국 소설가 네 명 가운데 한 명의 자리를 깔고 앉게 되는 헨리 제임스.
  헨리 제임스와 여러 가지 방면에서 뜻을 같이한 이디스 워튼은 19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제임스와 돈독한 우정을 나눈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1908년 어느 날, 헨리 제임스는 마흔여섯 살이 된 이디스 워튼에게 모튼 풀러튼이라는 양성애 성향의 극심한 바람둥이 하나를 소개해주고, 이디스는 풀러튼을 통해, 하여튼 역자 손영미의 해설에 의하면, 1년 후, 난생처음으로 낭만적 열정과 육체적 쾌락을 경험했다니, 헨리 제임스, 정말 장한 일 한 번 한 거다. 1989년에 민방위 훈련을 받으러 여성회관 대강당에 간 적이 있는데, 강사가 나와서 하시는 말씀이, 여성의 순결은 성경험의 유무와 관계없이 육체적 쾌락, 알아듣기 쉽게 말해 오르가슴을 체험한 것이 기점이 된다고 아주 그럴듯한, 아직도 머리에 콕 박혀있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이디스 워튼의 순결성, 즉 첫 경험은 남편 테디가 아니라 헨리 제임스의 소개 덕택에 풀러튼과 함께 할 수 있었을 터, 보답의 의미로 선물 하나 사 보냈을까? 이 부분에서 침을 튀는 이유는, 홧김에 핀 바람인지는 모르겠으나, 1912년에 남편 테디 워튼이 확 외도를 저질러버리는데, 이를 알게 된 워튼 여사는 3년 전인 1909년에 자기가 풀러튼에 의하여 난생처음으로 오르가슴을 경험한 기억을 떠올리며 외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눈치를 보아하니, 이 경험이 워튼 여사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암초>를 들먹인 사연이 되지 않았나 싶어서다.
  작품의 뒷이야기, 이거 언제 들어도 재미있지? 특히 허리 아래 이야기라면 더욱.

 

  애너 서머스라는 여성의 성의 없는 전보 한 장 때문에 일은 벌어진다. 조지 대로우는 미국 뉴욕주에서 보낸 유년기부터 애너 서머스와 동무로 지냈고, 나이가 차서는 은근히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이 이렇게 단계를 착착 밟아가며 진행되는 일은 세상에 거의 없듯이, 애너는 아들 하나 달린 홀아비 프레이저 리스와 결혼해 딸 에피를 낳았다. 프레이저 리스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 전형적인 미국 부르주아의 일원으로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인데, 예술을 위해 유럽에 사는지, 유럽에서 살 핑계를 만들기 위해 예술을 하는지 도무지 판단하기 힘든 미국인의 전형으로 어떤 방면으로든지 전문성을 띠는 경향을 경멸하는 신사다. 즉, 속물이라는 얘기. 돈이 얼마나 많은지 파리 북역에서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가야 도착하는 ‘지브레’라는 곳에서 벽돌과 누런 돌담으로 둘러싸인 고가, 즉 샤토, 성에서 살았다. 살았다고? 그렇다. 지금은 죽었으니까. 왜 죽었는지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
  아직 상복을 입고 있던 애너 리스는 책이 시작하기 석 달 전에 런던의 미국대사관에서 아직 장가들지 않고 홀로 사는 조지 대로우를 12년 만에 우연히 만났다. 대로우의 직업이 외교관이고 런던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때부터 은근히 군불을 때기 시작해, 둘은 어느덧 결혼을 약속하고, 대로우의 집은 미국에 있으니 다음으로 하고, 프랑스 지브레의 성에 거주하고 있는 로스 부인의 시어머니와 의붓아들, 딸에게 공표하는 것만 남았다.
  애너 로스의 부드럽지만 꼬장꼬장한 성격을 가진 시어머니는 프랑스 샹텔 후작의 청혼을 못이긴 척 받아들여 졸지에 로스 부인에서 샹텔 후작부인이 된 몸으로, 평소에 완강한 겸양의 덕을 발휘해 주위의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휘어잡는 특기가 있는 양반이다. 남편과 전처 사이에서 난 훌륭한 외모의 아들 오언 리스는 미국에서 하버드를 졸업하고 열렬한 연애에 빠졌다가 걷어차여 사람 꼴이 아니었다가 계모 리스 부인의 권유로 옥스퍼드에서 일 년 동안 공부하기로 했었다. 바로 이 새엄마와 의좋은 의붓아들 오언을 보살피기 위해 한 해에 한두 번 영국을 방문하는데 이때 대로우를 만난 것. 나머지 기간 애너 로스는 프랑스에 있는 딸의 옷과 가정교사를 구하고, 시어머니와 최신유행 상품을 쇼핑하느라 거의 모든 시간을 소비하는 유한마담이다.
  결혼을 선언하려면 대로우가 프랑스로 가야 할 터인데, 애너는 계속 일정을 변경하다가 마치 마지못한 듯 5월의 어느 날을 지정했고, 이에 맞춰 대로우는 약 한 달의 휴가를 얻어 채링 크로스 역에서 도버해협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대사관의 사환 아이가 헐레벌떡 기차를 향해 뛰어오더니 대로우에게 전보가 도착했다고 전해주었다.
  “예기치 못한 장애 발생. 30일 이전에는 오지 말 것. 애너.”
  이 전문이 <암초>의 첫 문장이다.
  대로우 입장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황당했을까. 대사의 결재를 받아 휴가를 얻어, 기차도 이미 탔고, 모르긴 해도 배표도 예매했을 터인데 밑도 끝도 없이 언제까지는 오지 말라니. 거기다가 전에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음에도 선뜻 초청하지 않은 것도 께름칙한데 이런 전보를 받았으니 정말로 자신을 무시하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기차는 떠났다. 그리고 비 내리는 도버해협 역에 도착해 내렸다. 날씨까지 대로우 기분에 맞춰주느라고 구질구질 비 내리고 바람까지 분다. 이때 웬 아가씨 하나가 자기를 보더니 대로우 씨, 하고 이름을 대며 아는 척을 하는데 어째 지겹고 불편했던 느낌이 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요란하고 강압적인 성격으로 악명을 드높인 머릿 부인이 거느린 말 없는 권속 가운데 한 명, 책 읽어주는 여자 겸, 비서 역할을 하는 여성이었다. 소피 바이너.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후견인에 의하여 기숙학교에 다녔으나 후견인이 뇌일혈로 죽는 바람에 동전 한 푼 없이 빈털터리가 된 불행한 아가씨. 친구 가족의 유럽 여행에 묻어 파리에 도착했다가 바로 그 친구가 남자와 야반도주를 감행하는 바람에 파리에 홀로 떨어져, 파리의 가난한 미국 예술가 팔로우 부부에 의하여 구조를 받아 런던의 머릿 부인 집으로 들어갔다. 지옥 같은 머릿 부인 댁에서 무려 5년을 버티다가 바로 어제 여사와 대판 싸우고 한달치 임금도 받지 않은 채 그냥 뛰쳐나와 다시 팔로우 부부를 찾아가는 길이다.
  대로우 입장에서 어쨌든 받아놓은 휴가도 있으니 파리에 가긴 가야 하겠고, 이왕 가는 것, 소피 바이너 양과 함께 해협을 건너고 칼레에서 파리로 가는 열차에 탑승한다. 북역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도를 발휘해 팔로우 씨 댁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저런, 팔로우 씨 부부는 그동안 파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단다. 어쩔 수 없이 같은 호텔 옆 방에 방을 얻어주고, 철저하게 대로우 입장에서 보면, 시간도 보내고, 소피와 파리의 특별한 레스토랑에 가서 별식을 먹고, 관광하는 것도 즐겁고, 마치 소피를 위해 자신이 헌신하는 것 같은 착각도 매력적이고, 하여, 소피의 장래 희망이 연극배우인 것을 감안, 특히 연극 극장에 갔다가, 파리에도 자신을 알아볼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젊고 예쁜 아가씨와 동행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지, 그만 덜커덕, 애너 리스의 의붓아들이자 계획대로만 된다면 자신의 의붓아들이 될 오언 리스를 극장에서 마주치고 만다. 어떠셔? 이 작은 일이 뒤에 창대하지는 않을지언정 하여튼 뭔가 다른 사건으로 번지게 될 거 같지? 맞다. 하여튼 그건 그렇다 치고.
  소피는 난생처음 누군가 자신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돈과 시간을 투여하는 기분좋은 경험을 처음 당하고 있는 순간이다. 그러나 세 번째 날부터 하늘도 무심하시지, 벼락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외출하지 못한 채 호텔방에 박혀있어야 하는 대로우와 소피. 어떻겠나. 이게 1912년 작품.
  “이때 갑자기 바이너 양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고, 그녀의 얼굴이 여전히 바로 위에 있었다. 그렇다면 대로우도 얼굴을 들어 그녀에게 입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여 뜯지 않은 편지를 난롯불에 던져버렸다.”
  이 정도만 읽고도 독자는 알아서, “얘네들 했네, 했어.” 짐작해야 했던 시기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래서 이디스 워튼을 미국 소설문학의 대표선수라고 하는구나, 실감할 수 있는 탁월한 심리 묘사가 끝장을 본다. 어쩔 수 없는 태생적 부르주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솜씨다. 다섯 번째 읽는 이디스 워튼에서야 이이의 진가를 알아챈 거 같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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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12-13 08: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별점이 네 개인 건, 일단, 특정 정서에 대한 세대차이라고 해두자.

다락방 2021-12-13 09: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거 뭐죠. 완전 재밌겠는데요. 아 이래서 사람 일은 알 수가 없어요.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이디스 워튼의 이런 책이 번역 되어 있는것도 모르고 살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일전에 친구가 소개팅을 하고 그 남자랑 소개팅한 날 서로 느낌도 좋고 하여 사귀기로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두어번 더 만나고나서 주말에 친구는 여행을 갔어요. 원래 자신의 친구들과 계획되어 있던 여행이었던지라 막 사귀기로 한 남자에게 ‘다녀올게‘ 했는데, 그 주말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자 그 남자는 공원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미안하다고 연락을 해옵니다...

그 스토리가 생각나는 책이네요. 저도 읽어볼래요.

Falstaff 2021-12-13 10:20   좋아요 2 | URL
소개팅 얘기도 재미납니다. 누가 단편소설로 쓰면 썩 괜찮을 거 같은 걸요!
<암초>, 저는 심리 묘사를 중점으로 읽었습니다. 스토리는 읽으면서 저절로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굴러가더군요. 요새 독자들이 좀 까져가지고 말입죠. ㅋㅋㅋ

blanca 2021-12-13 0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이제 더 이상 읽을 에밀 졸라의 드라마가 없어 의기소침해있던 차에(꿈은 추천 안 하신다고 하니) Falstaff님만 믿고 이 책으로 가겠습니다.

Falstaff 2021-12-13 10:21   좋아요 2 | URL
졸라에 비하면 많이 심심합니다. 마음이 변하는 과정의 묘사가 탁월하더군요!

청아 2021-12-13 1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디스 워튼 언젠가 꼭 읽어봐야지 했었는데 저는 폴스타프님 덕분에 바로 핵심으로 들어가면 되겠네요😄

Falstaff 2021-12-13 10:22   좋아요 2 | URL
오, 처음 읽는 워튼으로는 재미 없을 이유가 많은 거 같은데요.
<이선 프롬>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아이고... 저도 워튼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서요. ^^;;;

유부만두 2021-12-13 1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디스 워튼은 “이선 프롬” 하나만 읽어봤어요. 세월의 무상함이랄까, 사람 속을 후벼파는 듯 아파서 더 읽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에잇, 모르겠다! 입니다.

Falstaff 2021-12-13 12:09   좋아요 3 | URL
ㅎㅎㅎ 어떤 작품은 답답해 속 뒤집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책 읽는 것이 다 복불복이지요. ^^;;

페넬로페 2021-12-13 11: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뒷이야기, 넘 재미있어요.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있는 저 입니다. ㅎㅎ
이디스 워튼이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 수상자라고 되어 있는데 어서 작품 하나정도는 읽어야겠어요^^

Falstaff 2021-12-13 12:11   좋아요 3 | URL
ㅎㅎㅎ 저도 워튼이 좀 분방하다는 얘긴 들었는데, 이 책 역자해설에 와우, 상대 이름까지 나오고, 다른 인간도 아니고 헨리 제임스가 소개했다는 것도 나오고, ㅋㅋㅋ 정말 재미나더군요. ^^

잠자냥 2021-12-13 11: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뭐야 이디스 워튼 이젠 손 안 갔는데....이거까진 읽어야겠네요. ㅎㅎㅎ

Falstaff 2021-12-13 12:13   좋아요 2 | URL
스토리는 저 위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읽으면서 저절로 예상 가능한 쪽으로 흘러갑니다.
크게 기대하지 마세요! 저도 전혀 기대하지 않고, 근데도 미쳤다고 새 책 사서 읽은 게 더 만족하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ㅎㅎㅎㅎ

새파랑 2021-12-13 1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디스 워튼 작품 다 좋았는데 이런 작품도 있었군요 ~ 최근에 을유에서도 책이 나왔던데 이책도 찾아 읽어봐야 겠어요. 폴스타프님이 진가를 알게된 작품이라고 하시니~!

Falstaff 2021-12-13 14:01   좋아요 2 | URL
오, 새파랑님이 워튼 좋아하시는군요. 그럼 틀림없이 매력적일 겁니다!!
망설이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