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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살
이은준 지음 / 연극과인간 / 2020년 9월
평점 :
42세로 추정되는 극작가 이은준은 2001년에 국립극단 연수단원으로 있다가 극작과 연출을 하는 박근형을 만난다. 이은준이 생일이 빨라 학교를 일찍 들어갔는지 몰라도 대학 다닐 때부터 팬이었다는 박근형을 만난 2001년이면 스물두세 살 때였는데 대학을 졸업했었나? 하여튼 여기저기 자료를 다 뒤져보니까 79년 아니면 80년생이다. 물론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래 국립극단에서 박근형이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집>의 조연출로 시작해, 해보니까, 연출과 조연출이니 선후배이면서 스승-제자 사이로 뜻을 같이하게 되어 이들은 자연스럽게 2002년 “극단 골목길”을 창단하게 된다.
12년간 뜻을 같이했던 이은준은 2014년에 골목길에서 독립하여 새로이 “극단 파수꾼”을 만들어 지금까지 극단 대표로 있다. 이은준은 자신의 극단에서 예전 골목길에서 박근형이 그랬듯이 비교적 자유롭게 자기가 극작 <속살>을 쓰고 연출해 2015년 7월, 노을 소극장에서 공연, 호평을 받기에 이른다. 이은준이 본격적으로 연출에 뛰어든 것이 2004년 국립극단에서 <질마재 신화>, <페드라 사랑>이었다고 하니 지금은 경력 17년의 중견 연출자인 동시에 성공적인 극작가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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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준
이은준의 <속살>로 우리나라 현대(21세기) 희곡 단행본은 처음 읽는다. 물론 <희곡 우체통> 시리즈 가운데 한 권도 읽었지만 그건 모음집이지 단행본은 아니다. 이 ‘처음’이 갖는 의미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다들 이해하실 듯. 그리하여 이은준이라는 미모의 젊은 극작가의 이름은 상당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으리라 믿는다. 게다가 작품도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지.
남자 고등학교 시절 네잎클로버라는 이름의 작은 동아리를 만들어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었다. 사내들은 둘 이상만 모여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서열을 정하는 거라, 네잎클로버에도 당연히 1번이 있었으니 상필이다. 상필이는 이른바 의리의 사나이. 동아리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2번 정도 됐던 형기는 경찰서 형사로 있고, 영석이는 보험회사 외판원, 경식이는 식육식당, 정육점을 겸하는 식당의 사장이다. 경식이는 사람이 좀 무른지 두 해 정도 후배로 보이는 안경이를 다른 노동은 하지 않고 오직 홀 서빙으로 고용해 급여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남는 시간은 취직을 위해 공부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도록 해주었다.
그럼 상필이는 뭐하냐고? 현재는 실업자다. 형사 형기가 진급한 날, 그날 비가 무지하게 내렸는데, 진급을 축하하는 파티를 제대로 하고,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 해서 빗길을 뚫고 바다까지 차를 몰다가 달리다가 사고가 났는데, 동아리 1번이자 의리의 사나이답게 모든 죄를 자신이 뒤집어쓰고 구속, 형을 살아 전과자가 됐다. 출옥 후에 줄줄이 사고를 치며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현재도 집행유예가 떨어져 형의 집행을 유예받고 있다. 그동안 잠깐씩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재판 중에 해고 또는 사직을 했다고 보는 것이 정상일 듯.
그거 말고도 상필이는 예를 들어 대학에 입학은 했는데 등록금을 내지 못해 제적당할 위기에 처했던 형기한테 아무런 조건 없이 등록금을 마련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경식이는 스포일러의 위험 때문에 밝히지 못할 신세를 졌으며, 영석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네잎클로버의 막내 안경이도 마찬가지다.
희곡의 시작점이 상필이가 형 집행정지로 출소한지 6개월이 안 지났을 때인데 툭하면 사고를 치고, 친 사고를 스스로 봉합하지 못해 친구들이 십시일반 소위 ‘게임값’을 물어주어야 했다. 걷어차서 부서진 입간판을 형기가 자기 돈으로 고쳐주었던 일도 있고, 경식이 식육식당에서 고기 구워 먹던 재일교포 손님이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자 일방적으로 패버렸는데, 재일교포는 딱 앉은 자리에서 맞기만 해 구속당하기 일보직전이어서 다시 형사 형기가 개입해 적절한 선에서 합의금 지불을 약속하고 등등. 그렇다. 합의금을 약속하기만 했다.
그런데,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요즘 시절에 한 친구가 사고를 치면 나머지 친구들이 갹출해서 n분의 1, 사고 칠 때마다 보상 또는 합의를 해주어야 하나? 뭔가 좀 이상하다. 앞에서부터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살면서 친구들에게 돈 이야기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면 안 될 것 같은, 그거야말로 돈도 잃고 친구도 잃는 최적의 지름길이란 생각을 놓쳐본 적이 없다. 회사에서 희망퇴직 하라고 지랄할 때, 외국 법인 회장으로 있는 문영이한테 전화해서 취직자리 알아본 적은 있어도 말이지. 말 나온 김에, 문영이 그 새낀 힘만 셌지 친구 가운데 공부도 못했는데 지금은 제일 잘 나간다.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이 정도면 나도 인생을 좀 아는 수준이건만 상필이와 그의 친구들은 좋게 생각해도 크게 오버했다.
연극의 주 무대는 경식이가 운영하는 식육식당이다. 이 식육식당은 경식이 아버지 젊었을 때부터 운영하던 정육점의 버전 2쯤 되는데, 경식이 아버지가 정육점을 할 때는 이게 천한 직업이라 자기는 죽어도 식육식당을 안 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건만,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 결국 가업을 물려받은 거다. 그리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맛집으로 컸다.
식육식당, 또는 정육식당에서 피할 수 없이 봐야 하는 건, 생살이다. 이건 희곡의 제목 ‘속살’하고 같은 말. 나는 제목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어쩌면 당연하게 농밀한 사랑이 언뜻 생각나는 사람의 피부와 솜털로 덮인 속살을 생각했는데, 첫 장면, 다케시마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재일교포를 두드리는 순간, 아, 아니구나, 사랑을 나누는 농밀한 속살이 아니라, 피가 뚝뚝 흐르는 날것의 생살을 뜻하는 거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불길한 생각은 도무지 틀리는 법이 아니라서, 이제 상필과 그의 친구들이 드러낼 속살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일만 남았다. 사람이라는 포유류의 속성. 내가 받은 건 어느새 잊어버리고, 내가 준 것만 오래도록 머릿속에 박혀있는 현상의 잔인함. 그리하여 벌어지는 비극. 이 책 속에 담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