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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ㅣ 제안들 36
아글라야 페터라니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4월
평점 :
1962년에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곡예사 엄마와 광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글라야 페터라니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보면 대강 맞을 거 같다. 실제로 이 광대 가족은 아글라야가 어려서 부모, 언니, 이모와 함께 스위스에 망명해 서커스로 명성을 쌓았다고 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가족이 그러하듯이 이들 역시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친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으로 이름을 알리다가 엄마는 사고를 당해 공연하지 못하는 실업자가 되고, 아버지는 이혼과 함께 가족을 떠나버리고, 아글라야는 스위스에 정착해 처음으로 문자(독일어)를 배운다. 이후 연기학교에서 연기 수업을 해 배우와 작가 활동을 하다가 1999년 이 책을 출간하고는 2002년에 취리히 호수에서 자살해버린다. 책을 통해 더 알 수 있는 정보는, 이이가 어렸을 때 이복 언니와 함께 기숙학교에 다녔고, 언니를 이혼한 아버지가 데려간 후 조현병을 앓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다. 이런 정신 손상이 결국 스스로 생명을 마감하게 하지 않았나 싶은데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매우 특색 있는 작품이다. 분량은 2백 쪽이지만, 작가 본인이 원래부터 원고를 그렇게 쓴 거 같이 보이는데, 여백이 무척 많아 다 읽기까지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 짧은 작품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툭툭 던지는 듯한 묘사로 일관한다. 불친절한 섬세함.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던질 뿐,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별로 신경 쓴 것 같지 않다. 앞부분은 유년시절이고 점점 소녀 시절을 거쳐 사춘기까지 도달한다. 당연히 화자의 말과 사용하는 문장도 이에 따라 달라지고.
가난하고 자유도 없는 루마니아에서 서유럽으로 탈출해 언어는 있으되 문자를 모르는 문맹으로 살다가 겨우 독일어를 배워 이방의 문자로 글을 쓰는 행위는 벌써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을 통해 경험을 해보았다. 또 이방의 문자로 문학을 하는 사람이, 밀란 쿤데라, 알라 알와스나리, 아시아 제바르, 일제 강점기의 정지용 등 한두 명이 아니다. 이 책에서도 문자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거론하기는 하지만 주된 건 아니다.
책은 거의 전적으로 유년, 소녀, 사춘기 시절에 주인공의 시간을 점령해 이후의 삶에도 치명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상실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짐작은 했지만 폴렌타가 무엇인지 검색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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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물에 옥수숫가루 등의 곡물을 넣고 끓인 ‘죽’ 형태의 이탈리아 요리”
“전통적으로 도금하지 않은 구리냄비에 옥수숫가루와 물을 넣고 큰 나무주걱으로 계속 저으며 끓인다.”
* 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무서워서 옥수수자루에 숨어 있었다. 그 상태로 잠이 든다. 할머니가 와서 자루의 옥수수를 뜨거운 물 속에 넣는다. 아이에게 줄 폴렌타를 만들려고. 아이가 깨어났을 때 아이는 이미 푹 익어버렸다.
* 할머니는 죽을 끓이고 장작을 가지러 나가며 아이에게 잘 보고 있으라고, 숟가락으로 잘 저어야 한다고 한다. 할머니가 나가자 폴렌타가 아이에게 말한다. 나는 너무 외로워. 나랑 놀지 않을래? 그래서 아이는 냄비에 들어간다.
* 아이가 죽자 신은 폴렌타 속에서 아이를 끓인다. 신은 요리사이며 땅속에서 살고 죽은 자를 먹는다. 신의 커다란 이빨은 그 어떤 관도 씹어 부술 수 있다.
이것의 잔인한 버전도 있다.
* 아이는 닭고기 맛이 날까?
* 아이가 조각조각 썰리게 될까?
* 눈알이 터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유년의 시각으로는 별로 잔인하지 않을 수 있다. 동화 가운데 이보다 훨씬 잔혹한 것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섭씨 백 도가 넘는 죽, 읽는 사람마다 폴렌타를 달리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런 거 하지 말고 간결한 문장으로 쓰인 유년시절의 작가, 이이가 겪은 상실만 읽어도 충분하다.
다만 내 경우엔 취향이 맞지 않아 그리 인상 깊지 못했다. 글의 형식과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의식 코드가 나와 많이 달라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