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모르탱에서 딸 다섯, 아들 다섯, 합이 십 남매 가운데 중간쯤 태어난 작가 알렝 레몽의 자전적, 회고 형식을 띈 짧은 소설이며 대강 150쪽 정도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과, 또 다른 자전적, 회고적 기록이며 역시 150쪽 가량의 또 다른 짧은 소설,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두 중편 소설을 묶은 책.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옛 속담이 딱 어울리는 집안이지만, 사실 실제로 십 남매를 둔 가족을 염두에 두면 집은 부유하지 않지만 아이들 다 똑똑한 편이고, 하나 빼고는 모두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 밥벌이 하고, 웬만한 아이들은 전부 우등으로 학교 등록금 면제받고, 아 정말 이 정도면 된 거 아냐? 레몽이 열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때부터 10년이 지나서 어머니까지 여윈 삶. 열 남매 가운데 오직 하나만 조울증이 심각해져 강에 빠져 죽는 비극을 당했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하나가 좀 아쉽지, 냉정하게 봐서 괜찮은 집구석이다. 보라, 1960년대까지 인류의 평균 수명이 얼마나 됐는지. 스물다섯 살에 천애고아가 됐다고 궁상을 떨 필요가 있을까?
천만의 말씀.
한반도의 남쪽에서만 약 4,500만 명이 산다. 이건 적어도 4,500만 권의 소설책 또는 소설을 쓸 수 있는 스토리가 걸어 다닌다는 뜻이며, 세계적으로는 무려 60억 권의 소설책을 쓸 수 있는 재료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각 개인이 자신들 마음속에 담아 평생을 짊어지고, 견뎌내고, 맛보고, 후회하고,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웃음 짓는, 오직 자기만의 경험과 추억과 그것들의 확대(또는 축소) 재생산한 현재의 감정이다.
1960년대 말의 어느 날, 정말 하루도 빼지 않고 통행금지 사이렌과 동시에 문간에 달린 벨이 울리던 한 가족이 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벨을 ‘요비링’이라 불렀는데 아무도 ‘요비링’의 어원을 알지 못했다. ‘씨유깽’은 ‘See you again'이란 건 1970년대나 돼야 알 수 있었지만 결국 ’요비링‘은 알지 못했다. 통금 사이렌과 거의 동시에 대문을 열면 어김없이 마당 안쪽으로 푹 쓰러지던 거구의 남자, 바로 내 아버지 ’이주사‘였던 거다. 형과 내가 180cm가 넘는 장신의 아버지를 억지로 끌고 현관으로 들어가면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정여사의 본격적인 따발총 잔소리가 시작됐다. 어찌 그리 하루도 빼지 않고 날마다, 날마다, 그리고 날마다. 형과 나는 우울하게 벽에 기대서서 퍼질러 자빠져계신 아버지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어느 자식새끼가 부모가 싸우는 걸 보고 행복해 숨이 넘어가겠는가. 드디어 긴 한숨을 쉬며 잔소리, 사실은 일찌감치 과부가 될까 두려워 술 좀 작작 마시라는 훈계이었겠지만 집안의 세 남자는 훈계의 말씀이 언제나 너무나도 귀가 따갑고 지겨웠던 건데, 귀 따갑고 지겨운 잔소리를 다 마치고 정여사가 팔짱을 풀고 방에 들어가기 위해 방문을 여는 순간, 형편없이 널부러져 있던 이주사께선 여지없이 거의 말똥말똥한 눈길을 한 채 고개를 번쩍 들고 아들들에게 말했다.
“네 어미 들어갔니?”
정말 날마다, 날마다. 이주사의 시체놀이에 이은 정여사의 울고불고 난리굿이 지겨워 미칠 것 같던 어느 겨울밤, 이주사께선 웬일인지 조금 꼬부라진 혀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진짜로 내가 내일도 술 마시고 오면 개다, 개. 사람이 아니고 개다, 개!”
다음날 뉘엿뉘엿 해가 지자, 어느 때보다 일찍 퇴근해 집에 도착한 정여사는 서둘러 저녁을 자시고 목욕재개하고, 세상에나, 짧은 세월 살면서 처음 봤는데, 화장대 앞에 앉아 색조 가득한 화장을 하는 게 아니냔 말이지. 밤이 깊어가고 외출할 일도 분명 없는데,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있겠느냐 이거다. 통통한 몸 여기저기에 화장수까지 뿌려가며 즐거워하던 모습을 근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시계바늘은 정여사의 바람과 달리 그냥 돌아가기만 했고, 9시가 넘더니, 10시, 지국총지국총어사와 흘러 흘러, 어느덧 11시가 넘어 조금만 지나면 내일이 도착할 시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라던, 세상 초유의 정여사 지시를 무시하고 뜬 눈으로 어떻게 사건이 진행될까를 주시하는 형제의 눈은 더욱 또랑또랑해져만 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드디어 요비링이 요란하게 울리고 우린 방문을 아주 조금 연 채, 부부가 일기 필마에 올라 장창을 옆구리에 끼는 모습을 우울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을 걸로 알았다.
“누구세요!”
현관문을 열고 대문을 향해 날카로운 메조소프라노의 목소리가 관통했다. 괜히 내 뒷덜미가 찔끔해질 정도의 싸늘한 기운을 누구나가 느낄 수 있었으리라. 대문 앞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당연하지. 문만 열었다 하면 마당 방향으로 철푸덕, 쓰러질 이주사임이 틀림없으니까.
“누구세요!”
정여사의 피치카토 샤우팅이 한 번 더 형제의 귀에 들렸다.
잠시 후, 대문 밖에서 이주사의 목소리가 분명한, 영장류의 목소리로 내는 의성어가 틀림없는,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멍멍멍, 멍, 멍”
이 이야기는 정여사가 웃음을 참지 못해 결국 해피 엔드로 막을 내린다. 아주 잠깐 해피 했지만.
그리고 불과 몇 년 후, 나는 다시는 이주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내 나이 만 열두 살이 되자마자. 어떠셔? 이런 에피소드에서 보듯이 익살맞은 육척장신의, 당시 변웅전 아나운서보다 잘 생긴 아버지, 곧이어 불어 닥친 풍비박산, 죽을똥살똥 난장판에다가 고생바가지, 국민훈장 동백장 서훈,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한 편의 소설 쓸 수 있겠지? 내 집안만 그런 거 아니다. 당신들도 이하동문인 거, 내가 안다.
내가 알고 있는 누구나에게도, 그가 만일 나와 마음속에 있는, 아니, 마음속에 든 응어리에 대해 이야기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에게 부모란 존재는 짐, 그리움(사실 나는 이주사, 정여사가 별로 그립지 않다), 쓸쓸함 비슷한 존재였다. 일반적인 얘긴 하지 말자. 당신이 받은 사랑, 누구나 받았고(물론 전혀 못 받았거나 아주 조금만 받은 사람도 있지만), 듣는 사람한테 별로 감동주지 못한다. 내가 냉정해서 그렇다고? 오케이. 상당부분 인정. 하지만 어쩌랴, 난 부모, 그것도 이미 돌아간 부모를 향한 사랑(진짜 헛된 사랑. 물론 전적으로 사적인 고백)과 그들로부터 받은 것들에 대한 그리움, 감동, 여전한(죽은 또는 늙은 부모의) 사랑, 안타까움 같은 것들에 대해 읽으면, 한 순간 마음이 찡하긴 하지만 곧바로 에이 썅, 하고 만다. “너만 그래?” 그런 건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건, 자신 가슴 속의 응어리를 잘 쓴 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이, 문학작품이 징글징글하고, 무섭고, 위대한 거다.
바로 그 글쓰기의 징글징글함, 무서움, 그리고 위대함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의 앞 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