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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정유정도 검색을 해보니 1966년생으로 2007년, 마흔두 살에 등단했다. 그러니 입심 하나는 특별할 수밖에. 특이한 이력이 있다. 기독간호대학을 졸업해 간호사 경력이 있을 뿐, 문학창작 관련해 특별한 수업을 받지 않았다. 광주 전남을 연고지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와 기아 타이거즈의 열혈 팬이란다. 행운이 아니라 노력이겠지만 글을 써서 응모하면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5천만 원, <내 심장을 쏴라>로 1억 원의 상금을 채집한다. 요새 기타소득세가 얼만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으로 1%, 주민세 0.1%, 합해서 1.1%. 그걸 제외하고 몽땅, 그러니까 1억 4,835만 원을 현금으로 받는 기염을 토한다. 세율은 정확하지 않다. 창피하지만 나도 한때, 199x년에 받아본 적 있는데 얼마였나 하면 98만 9천 원. 와, 그새 인플레라니(농담이다).
정유정의 작품을 소개한 걸 보니까,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은 영화로 만들어 평단의 혹평을 받은 바 있고, <종의 기원>은 시나리오 작업 이후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단다. 내가 정유정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이 읽어보지 않았지만, 광고가 쏟아진 덕에 <종의 기원>이란 책 제목이 머리에 박혀서였구나. 하여튼 영화로 만든 두 편 가운데 하나만 대박을 쳤어도 정유정은 노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관객 수에 따른 러닝 인센티브로 계약하는 것이 보통이니까 말이지. 이제 겨우 단 한 작품을 읽고 정유정이 어떻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정유정을 더 읽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그냥 한마디 하면 잘 쓰는 대중소설가랄까. 아아, 잠깐. 난 대중소설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단지 나하고 맞지 않아서 안 읽겠다는 것뿐이다. 돈 벌 수 있는 대중소설과 배고픈 순소설 가운데 나한테 하나만 골라 “쓰라고” 하면 당연히 돈 왕창 벌 수 있는 대중소설을 선택할 테니까.
처음 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최서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최서원←최순실←최필녀. 하필이면 국정농단 사건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 탄핵에 불씨를 붙인 인물과 동명이인일 건 뭐람. 하긴 내가 읽은 책이 초판 45쇄, 윽, 4쇄도 아니고, 5쇄도 아니고 45쇄? 영화는 혹평을 받았을지언정 인세 하나만 가지고도 대박이 났겠다 싶은데, 초판이 2011년. 최순실 등장 전이니 같은 이름은 팔자 탓이다. 하여튼 화자 최서원은 7년 전인 2004년 9월 12일 새벽, 나이 열두 살 때, 꼭대기에 오르면 저 멀리 득량만의 바다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전라남도 가상의 지역인 세령호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모두 정리되고, 파란 셔츠를 입은 형사의 손을 뿌리치는 순간, 일제히 카메라 섬광을 뿜으며 사진을 찍히는 장면을 회상하고 있다. 빛의 바다에 홀로 섬이 된 상태, 열두 살의 서원이 아저씨라고 불렀지만 아무 혈연이 없는 안승환이 다가와 서원의 손에 자신의 휴대전화를 쥐어주고는 어쩔 수 없이 이별하고 만다. 안승환은 이후 책이 끝날 때까지 서원의 수호천사로 등장하는 선역. 전문 스킨 스쿠버로, 아버지와 삼 형제 모두 속칭 ‘악어’라고 불리는 잠수 일을 했는데 주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시신을 건져주고 그걸로 먹고 살았다.
최서원의 아버지 최현수. 미치광이 살인마로 알려진 흉악범. 베트남에 파병되어 팔 하나를 잃은 구척 거구의 최상사가 낳은 2남 1녀의 장남. 어려서부터 술만 마셨다 하면 솥뚜껑만 한 손으로 처자식 두드려 패는 걸 취미로 삼은 개귀신 집구석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동생들의 기대, 희망이라는 큰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수수밭 한가운데 파놓은 우물에 빠져 죽고 몇 년 후부터 심각한 신경성 질환을 앓아야 했는데, 이 질환은 우월한 신체조건으로 열두 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야구선수로는 치명적 종말을 맞게 만든다. 초장에 소개가 되니 스포일러는 분명 아닐 터. 최현수는 열두 살짜리 여자아이의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여자아이의 아버지를 몽치로 때려죽인 다음, 자신의 아내마저 같은 무기로 때려죽인 것도 모자라 강에 던져 버리고, 또다시 댐의 수문을 개방해 경찰 넷과 한 마을주민의 절반을 수장시켜버린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작가 정유정이 해태/기아 타이거즈의 열혈 팬이란 건 위에서 얘기했다. 그것과 별개로 책을 읽으면 작가가 야구를 매우 좋아한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을 정돈데, 조금도 비슷하지 않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작가보다 한 살 아래로, 예전의 엘리트 코스, 고등학교야구 최고 선수→대학야구 최고 선수→프로야구의 단계를 밟아 한 시절을 풍미했으나 은퇴 후 네 모녀를 살해하고 자살해버린 옛 해태 타이거즈 선수 출신 이ㅇ성을 떠올렸다. 범죄 이야기라서 그랬던 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는 없다. 이 책에 거의 전문적인 수준으로 나오는 것이 야구 말고 스킨 스쿠버도 있다. 잠수에 관해서는 119구조대 잠수 교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후기에 적혀 있다. 그래 전문성을 확보하게 됐지만, 야구는 누구의 조언도 필요하지 않았던 수준인데, 아뿔싸, 최현수의 포지션이, 포수다. 그리고 왼손잡이다.
백 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왼손 포수는 백업 자리에도 있어본 적이 없다. 왼손 포수는 좌타석 타자가 타석에 서 있으면 2루 주자가 3루로 도루할 때 3루로 송구하는데 타자 때문에 애를 먹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야수가 비상시국에 잠깐 포수 자리를 대역하는 거 말고 진짜 왼손잡이 포수는 한 명도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왜 자꾸 이 이야기를 들먹이냐 하면, 최현수의 신경성 질환이 왼손을 전혀 쓰지 못하고 그저 덜렁거리기만 하는 부착물 수준으로 기능을 떨어뜨리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게 자신의 외팔이 아버지 최상사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손상이 아니라,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극한의 폭력성과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왼팔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상당한 메타포로 읽을 수 있는데, 왼팔 대신 오른팔 잡이로 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왜 그랬을까. 혹시 작가도 이런 것을 알고 일부러 왼손 포수를 설정했을지도 모른다. 왼손 포수용 글러브. 즉 오른손에 끼는 포수 글러브를 기억하시나? 셀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한 방 탁 터뜨리는 소도구로 출현한다. 거의 쓰이지 않는 물건. 그러나 어찌 될지 모르니 구비 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에라,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야구 은퇴 후 생활력 강하고 악착같은 아내, 엄처시하에서 거의 루저 수준으로 되는대로 사는 최현수는 현재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 중에 식수원이기도 한 세령호의 보안팀장으로 자진해 발령이 난다. 그래 이틀 전에 살 집을 먼저 봐두려고 서울에서 출발했다가, 선수 생활을 했던 광주에서 옛 동료가 운영하는 소주방을 들러 소주 몇 병을 마시고 한밤에 엄청난 거구가 경차 마티즈를 타고 과속을 하해 세령호에 도착했고, 짙고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흰 실크 블라우스를 원피스처럼 입은 열두 살 소녀 오세령을 치고 만다. 벌벌 떨리는 몸으로 세령을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나고, 중상을 입은 세령이 “아버지”라고 신음하자 조용히 시키기 위해 왼손으로 입을 막는 과정에서, 워낙 힘이 장사인 최현수는 살해의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세령의 목을 부러뜨려 죽여 버리고 만다. 그 후 현수는 음주운전, 면허정지, 일산의 아파트 구입, 아내, 아들 최서원 등이 머릿속을 휙휙 날아다니는 와중에 자신의 알량한 삶을 통째로 버릴 수 없다는 자각이 세령을 호수 속에 빠뜨려버리게 만든다. 이후 그를 닥치는 끔찍한 신경증.
반면 세령호 인근의 막강한 지주의 아들인 치과의사 오영제.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기질을 동시에 지닌 미치광이 성향의 머리 좋고 돈 많은 인물. 오영제는 최현수가 딸 세령을 죽인 것을 알아냈으면서 경찰에 제보를 하는 대신 사적인 복수로 결말을 보고자 한다.
정말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서스펜스와 스릴과 폭력이 넘친다. 대개 폭력과 범죄 스토리엔 에로틱한 장면이 장식처럼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데 아쉽게도 야한 장면은 나오지 않으니 애초에 기대하지 마시라. 나처럼 김칫국 들이켜고 이 쑤시고 싶지 않으면. 게다가 거참, 왜 이리 묘사가 사나운지. 사나운 걸 초월해서 끔찍하고 잔인하다. 꿈속에 나올까 겁날 정도. 굳이 적나라하게 쓰지 않아도 독자들은 충분하게 알아차릴 텐데 작가는 친절하게도, 열두 살 먹은 오세령의 버릇을 ‘교정’하겠다는 교육적 목적으로 아버지 오영제가 무남독녀 외동딸을 지도했던 결과, 코뼈가 부러졌고, 입술이 터졌으며, 앞니, 그것도 영구치 몇 개가 와장창 뽑혀버린 것이니, 아무리 치과의사 아빠라서 그까짓 뽑힌 앞니보다 훨씬 어여쁜 임플란트를 해 넣어줄 수 있다고 해도 피로 칠갑을 한 열두 살 소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고 싶겠느냐 이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읽었다. 나쁜 책이란 얘기가 아니고, 나하고는 진짜 맞지 않는 책이라서. 아 씨. 아직도 찾아보면 드물지만 좋은 아버지들도 아주 가끔은 있는데 요즘 작가들이 선택하는 아버지들은 어째 주변에 널리고 널린 개 썅노무새끼들인지 말이야. 만날 그런 악질 꼰대들만 수집해서 편하게 글 쓸 생각하지 말고, 극도의 소수라서 글쓰기 힘들고 주인공으로 삼기 어렵고 독자들에게 공감을 받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인 그냥 조금은 선량한 아버지들을 골라 용맹정진해 볼 것을 주문하면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