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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ㅣ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평점 :
박성우가 2002년에 낸 《거미》를 올 1월에야 읽고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가 고른 시집. 요즘 계속 암호와 파편과 괴멸의 골짜기를 이루는 우리 현대시를 읽다가 박성우 차례가 오니 참 개운하다. 시를 읽는 즉시 시인이 하는 이야기를 즉각 이해할 수 있고, 그의 마음에 공감하거나,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고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시. 아니면 언어를 통해 그린 화폭이 큰 수채 풍경화 같은 작품들이 몇 달째 연이어 단어의 기호화와 전위의 기치를 올린 시를 읽느라 쌓인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준다. 확실하다, 그동안의 피곤은 기호와 전위 때문이었다.
평론가 하상일이 책 뒤편에 쓴 해설 “‘별 말 없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에서 첫 마디가 나를 더욱 즐겁게 해주었다.
“요즘 들어 시를 읽는 일이 여간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난한 독서의 과정을 거쳐 한 편의 평문이라도 써야 할 때면, 너무도 낯설고 기괴한 시의 언어와 구조 앞에서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109쪽)
아, 현대문학에 대해서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전문가인 평론가도 요즘 시를 읽는 일이 나처럼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는 걸 아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나 같은 무지렁이 독자가 요즘 시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이런 사소한 것에조차 기대 위안으로 삼고 싶어 한다면 이게 시인의 문제인가, 독자의 문제인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도시를 벗어난다. 많은 시가 시골, 염소를 먹이는 부안 감다리의 살구나무집이기도 하고, 정읍에 있는 닭 놔먹이는 집과 담 없이 이웃한 작은 집이기도 한데 시인의 늙은 모친이 지팡이 대신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곳, 그러니까 시인이 생명을 시작해 아홉 달 반 동안 입 대신 입노릇을 했던 배꼽과 소통하던 어머니, 궁극의 고향인 셈이다.
나는 이 시가 제일 좋았다.
옛일
한때 나는, 내가 살던 강마을 언덕에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개살구 익는 강가의 아침 안개와
미루나무가 쓸어내린 초저녁 풋별 냄새와
싸락눈이 싸락싸락 치는 차고 긴 밤,
넣은 봉투를 구할 재간이 없어 그만둔 적이 있다 (전문)
한때 살던 강마을 언덕, 이걸 그대로 읽을 수도 있고 그저 시인의 옛 시절로 생각해도 좋겠다. 그때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었단다. 김만옥이란 소설가가 쓴 책 《내 사촌 별정우체국장》이 순간 떠올랐다. 김만옥은 읽은지 하도 오래라 무슨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한다. 아, 가까운 곳에 책이 있다. 지금은 절판이니 구경이나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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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정우체국. 스카르메타가 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풍경을 떠올리면 딱이다. 요즘에야 현대판 음서니 뭐니 말이 많지만, 민간인이 시골에 작은 점방을 내고 우편업무를 했던 곳이다. 시인이 우체국을 내볼 생각이 간절했다고 하는데, 진짜 우체국 대신 사람들 사이 의사소통과 체온의 전달을 이야기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종지가 강가의 아침 안개, 초저녁 풋별 냄새, 싸락눈 치는 밤을 담을 수 없었다는, 시인으로서 크기가 작음을 수줍은 은유로 말한 것이리라.
지난 시집 《거미》에선 어머니가 미화원으로 일하는 대학의 대학원생이었다가, 이젠 사회인이 된 박성우. 그새 장가들어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살았던 모양이다. 근데 가끔 시골에서 어머니가 다니러 오시곤 했던 모양이지? 손등이 두꺼비 등처럼 울퉁불퉁했던 아버진 저번 시집에서 돌아가시고 이제 홀로 서울길을 들렀던 어머니가 집에 가시는 길에 아들이 건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어떤 통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정읍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에 오르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닮은 노인들 몇만 듬성듬성 앉아 있다 안전벨트 안허면 출발 안헐 팅게 알아서들 허쇼잉, 으름장 놓던 버스기사가 운전대 잡는다
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휴대전화 소리 들려온다 어 닛째냐 에미여 선풍기 밑에 오마넌 너놨응게 아술 때 쓰거라잉, 뭔 소가지를 내고 그냐, 나사 돈 쓸 데 있간디
버스는 시큰시큰 정읍으로 가고, 나는 겨울에도 선풍기 하나 치울 곳 없는 좁디좁은 단칸방으로 슬몃슬몃 들어가 본다 (전문)
참 어미 자식 간에 고단하게 산다. 그래도 그잖여? 보기 좋잖여? 박성우의 시들이 이래서 좋고 마음에 든다. 요즘 어느 시인이 있어 아직도 시를 이렇게 구닥다리로 쓴댜. 진짜로 ‘요즘 시’들 계속 읽다가 박성우의 시집을 여니까, 요즘 시들의 우울하고 도착적이고 낯설고 기괴하지만 세련된 시어들에 그새 익숙해졌는지, 이 어수룩하지만 정감 넘치는 시들이 글쎄 촌스럽게 읽히는 거 있잖은가. 아하, 이래서 시인들이 줄창 기괴한 기호학을 선호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도 아직은 박성우 같은 시인이, 아직이 뭐야, 아직이. 박성우 같은 시인은 앞으로도 비록 수가 적을지언정 반드시 존재할 것이고 존재해야 한다.
장가들어 아이 낳고 사는 시인. 그러나 자본은 시인의 가족들에게도 호의적이 아니라서 백일도 안된 어린 딸을 밥알처럼 떼어 처가로 보내고, “아내는 서울 금천구 은행나무골목에서 밥벌이를” 하고 가장인 시인은 “전라도 전주 경기전 뒷길에서 밥벌이”를 해 “한 주일 두 주일 만에 만나 뜨겁고 진 밥알처럼 엉겨붙어” 자는 세월을 지내야 한다. (<유량>) 그러니 가장이라 해도 집안 살림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이런 시가 나왔겠지.
맛있는 밥
밥벌이한답시고 달포 넘게 비운 집에 든다
아내는 딴소리 없이 아이한테 젖을 물린다
허기진 나는 양푼 가득 밥을 비벼 곱절의 밥을 비운다
젖을 다 먹인 아내가 아이를 안고 몸져눕듯 웃는다
우리 아가 똥기저귀통에 비벼먹으니까 더 맛있지?
아기도 소갈머리 없는 나도 잘 먹었다고 끄으으, 트림을 한다 (전문)
그래봤자 자기 딸 똥기저귀 담았던 그릇인데 거기다가 밥을 좀 비벼 먹은들 그게 뭐 대수랴. 알고 그런 것도 아닌데. 나 같아도 그냥 껄껄 웃고 말겠다. 시를 다 읽자마자 그림이 탁, 그려지잖은가. 젊은 부부의 저녁상과 이어질 느긋한 밤 시간이.
이번 시집에선 저 앞에 말했듯이 ‘언어를 통해 그린 화폭이 큰 수채 풍경화’가 좋았다. 마지막으로 그런 시 한 편 읽고 독후감을 마감하자.
산사(山寺)
배롱나무 그늘 늘어진 절간
요사 마루엔 노스님이 낮잠에 빠져 있다
흙벽에 삐딱하게 기댄 호미와 괭이는
흙범벅이 된 몸을 건성건성 말리고 있다
코빼기도 없는 고무신이 삐죽
흙 묻은 코빼기를 내미는 절간,
연잎에 엎드린 청개구리만
목탁을 두 개나 들고 예불을 드리고 있다
노스님 몫까지 하느라고
울음주머니 목탁을 불퉁불퉁 두드리고 있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