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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모른다 - 여성.여성성.여성문학
김승희 지음 / 마음산책 / 2001년 8월
평점 :
서울 국제 도서전에 갔다가 할인 판매대에 있길래 들고 왔다
여성주의 시들을 골라 저자의 해설을 곁들였다 무엇보다 석영희 라는 시인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확실히 시는 여성적인 장르이고 소설은 남성적인것 같다 획일적 제단이 물론
성립되기 힘들겠지만
제목과 표지 디자인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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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모른다 김승희 2001 마음산책
국내 외 '여성주의 시'들과 저자의 해설을 덧붙여 엮은 시평론집
심판
석영희
어젯밤
흰 목도리를 두르고
죽으러 갔다
목을 길게 빼고 엎드리니
죄 같은 건 없어도
넌 그냥 죽는다고
누군가 선고하고 곧장
목덜미에 칼이 닿는다
하필이면 단도
재수 없이 무딘 칼
왜 무죄일까, 의심하며
절대 무죄가 아냐, 분노하며
어서 빨리 집행이 끝나기만
기다리는데
도무지
끝나지 않는다
목이 썰린다는 게 얼마나 불쾌한 일인지
똑똑히
알아두라는 듯
더럽게 안 드는 칼로
슬로비디오로
아직도 반쯤
썰린 목을 길게 빼고
피 한 방울 안 떨어진
흰 목도리만
여생(餘生)의 그 부우연 빛깔만
눈이 빠져라
내려다보며 한 순간
견디면 끝이지
어서 끝이 끝나기만
또 기다리는데
갑자기
집행이 중지된다
이런 법이 어딨어
목을 반만 달고 미친년처럼
따지지만
따져도 누구 하나
대꾸하지 않고
형장은 폐쇄된다
짤리다 만 목
흰 목도리로 감고
집으로 가니
죽다 살아와 반갑다고
개들은 월월 짖지만
오, 절대로
무죄가 아냐
미란에 대하여
석영희
네가 내게도 부질없는 날
검은 곰팡이 핀 방구석에 앉아
사막에서
비단빛 이제는 바랜 도시를 생각한다
한때 나의 이름이었던
옛도시 미란은 사라졌다고 한다
어느 날 드러난
죽은 이의 잘 마른 가죽 속에도
미란은 없다 고개 숙이고
못박힌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살아남기 위해 애쓰던 날들을 생각한다
너의 태어남이 한 도시의 몰락 이후였다는 이야기
호수는 여전히 모래 위를 떠돈다는 이야기
신기루 되어 다가와도
속지 말아라 빠른 어둠을 타고
귀없는 벌레들이 울기 시작한다
너와 나 사이에 커다란 사막은
그냥 있어도 괜찮을 것이다
건조한 마음의 일들을 멀리두고
해묵은 의문을 지우며
어제보다 더 너는 축축해진다
모래옷 한 겹 입고
사막에서 쓰러져 죽는 일
네게는 없을 것이다 오랜 배움에 의해
앉아서 지척을 볼 뿐
천리 밖의 일은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네게도 지겨운 날
썩어 문드러지던 이름
미란을 생각한다 오를수록 더 깊이 빠지던
개미지옥을 생각한다
그리운 물은 고여도
온몸으로 흐린다는 이야기 나의 죽음이
한 흐름의 소멸 이전이라는 이야기
모래바람 타고 실려와도
떠도는 이름일 뿐 미란은 없다
있다면 마음 안의 일이 아닐 것이다
검은 곰팡이 한 겹 두르고 안심하며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희망을 버리려 애쓴 오랜 날들 위의
비단빛 이제는 지워진 도시
너와 나 사이에 집으로 가는 길은
아주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승훈 의 석영희 시인에 대한 평
"신화나 원형에 기대어 위안조차 받을 수 없는 사람, 형벌을 받은 사람만이 시를 쓴다"
석영희
1957년 생
1991년 현대시사상 으로 등단
199? 자살
발표작 <심판> <미란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