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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평점 :
오랜만에 이성복 시집을 펴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시가 아름다운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그의 언어에 있다. 그의 언어를 따르는 상상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전혀 연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언어들이 그의 시를 따르다 보면 긴밀한 심리적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과 그의 기억 속에 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자연적인 것들의 대응은 그의 시에서 긴장감과 속도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속도를 따르다 보면 모순된 인간 조건 속에서의 아픔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집 뒷면에 적힌 말은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의 시적 화두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아픔은 일상 속에서 무뎌지고 시인은 그 무뎌짐 속에 존재하는 망각의 징조를 통해 오히려 일상성을 뭉갠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여러 공간 속의 일상이 과격한 어조로 그려진다. 그와 같은 견디지 못할 일상 속에서 시인 자신조차 망각의 한 지점에 서있다는 것이 또한 그를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래서 그의 살아있음은 재생임과 동시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아픔이 된다(' 그해 가늘 나는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이와 같은 자기 부정과 긍정 사이에 이성복의 시는 힘겹게 버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이성복 시에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그의 가족 이야기이다. 여러 편의 시에서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주요 화두가 된다.('금촌 가는 길', '꽃 피는 아버지', '어떤 싸움의 기록', '家族風景' 등)
특히 '아버지'는 그의 시에서 쓰러지는 존재, 가장이지만 유약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인물이다.('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그밖에도 엄마나 누이, 형은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그 가족구조는 어딘가 어긋나있고 비틀려있으며 시인은 그와 같은 부패된 가족구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이성복 시는 '여기 있으면서 거기 가기', '여기 있으면서 거기 안 가기'라는 그의 시 구절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시는 이와 같은 상상력의 발걸음인 동시에 부정의 발걸음이다.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를 꿈꾸는 것과 동시에 그는 '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가기를 꿈꾼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 쓰기이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이와 같은 구절은 그의 시 쓰기가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그에게 시는 단 하나의 희망이요 살아있음의 경보이다. 아름다움을 꿈꿀 수 있는 자유이고 아픈 것들을 포용하려는 손짓이다. 그래서 이성복의 시는 아름답다. 그의 시는 추한 것들을 아름답게 덮어준다. 추한 것들, 아픈 것들이 꾸는 꿈을 이성복의 시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