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의 어두운 집속에서 항상 지혜의 해가 떠오르게 하라.
삿됨은 번뇌를 인연하여 오고
바름〔正〕이 오면 번뇌가 없어지나니
삿됨과 바름을 다 버리면
깨끗하여 남음 없음에 이르는도다.
보리는 본래 깨끗하나
마음 일으키는 것이 곧 망상이라
깨끗한 성품이 망념 가운데 있나니
오직 바르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를 없애는도다. - P209

형상이 있는 것에는 스스로 도가 있거늘
도를 떠나 따로 도를 찾는지라
도를 찾아도 도를 보지 못하나니
필경은 도리어 스스로 고뇌하는도다.
만약 애써 도를 찾고자 할진대는
행동의 바름이 곧 도이니
스스로에게 만약 바른 마음이 없으면
어둠 속을 감이라 도를 보지 못하느니라.
만약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어리석음을 보지 않나니
만약 세간의 잘못을 보면
자기의 잘못이라 도리어 허물이로다。
남의 잘못은 나의 죄과요
나의 잘못은 스스로 죄 있음이니
오직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번뇌를 쳐부수어 버리는도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하나니
저로 하여금 의심을 깨뜨리게 하지 말라.
이는 곧 보리가 나타남이로다. - P210

법은 원래 세간에 있어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는 세간을 벗어남이니
삿됨과 바름을 다 쳐 물리치면
보리의 성품이 완연하리로다。
이는 다만 단박 깨지는 가르침이며
또한 대승이라 이름하나니
미혹하면 수많은 세월을 지나나
깨치면 잠깐 사이로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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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나가게 하나 육진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는니라 - P180

부처는 자기의 성품이 지은 것이니,몸 밖에서 구하지 말라。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기의 성품이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 자비는 곧 관음이요 회사는 세지라고 부르며, 능히 깨끗함은 석가요 평등하고 곧음은 미륵이니라。인아상은 수미요 삿된 마음은 큰 바다이며 번뇌는 파랑이요 독한 마음은 악한 용이며 진로는 고기와 자라요 허망함은 곧 귀신이며 삼독은 곧 지옥이요 어리석음은 곧 짐승이며 십선은 천당이니라.
인아상이 없으면 수미산이 저절로 거꾸러지고 삿된 마음을 없애면바닷물이 마르며,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없어지고 독해(毒害)를 제거하면 고기와 용이 없어지느니라.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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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 비판 고전의세계 리커버
임마누엘 칸트 지음, 김상현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칸트라니. 얼마나 오래된 이름인가. 하지만 나는 자연 속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나는 꽃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지 궁금해서 다시 꺼내본 이름이다. 대학원 시절 '예술철학' 시간에 학기 내내 배운 같아 노트를 다시 펼쳐 보다 결국 그때 사둔 책을 읽기로 했다. 아마 그때도 칸트의 판단력 비판 1부를 번역해놓은 대신 '쉽게 읽는 칸트 판단력 비판'(디터 타이헤르트 , 조성식 번역, 이학사) 수업 도중 필요한 부분을 봤던 같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미의 분석론과 숭고의 분석론으로 나뉜다. 처음에는 용어가 까다로워(판단력, 비판, 합목적성, 취미 등의 용어 자체에 걸려) 읽기 버겁다고 느낄 있지만 읽다 보면 대단히 참신하고 재밌다. 바움가르텐 이후 미학론을 정립한 철학자로서 미학에도 이후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상상력과 지성(조화의 비율)의 유희가 미적 감정이라는 생기를 느끼도록 하고, 상상력과 이성(무한) 사이의 유희가 숭고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무관심한 만족(성질)이며 보편타당하며(분량) 합목적성의 형식(관계)으로 미에 대한 판단은 필연적(양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그때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려준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쾌적함(만족) 느끼는 이유는 상상력과 지성의 유희 때문에 생동감을 느끼는 거라는 설명이다.

 

숭고에 대한 고찰도 흥미로운데 우리가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감정을 분석하자면, 우리가 직관해도 크기를 파악할 없거나 위력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거대한 크기의 파도나 태풍 앞에서 처음에는 불쾌의 감정을 느끼지만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은 무한을 알고 있는 이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깨치며 더한 생동감을 느낀다고 한다.

 

예술이 어떤 법칙을 따르는 것으로 완성될 없다는 면에서 미는 규정될 있는 법칙 속에 있지 않으나 어떤 이상이 있고 천재는 이를 구현할 있다고 하는 논의도 와닿는다. 심지어 창작자로서도.

 

15년만에 칸트를 다시 펼쳐 건데, 그동안 잊었던 '무관심한 만족'이라는 등이 떠오르며, 말에 느꼈던 감동 같은 것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내가 자연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이나 특이한 기분의 정체가 무언지도 있었다. 내가 어떤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해 이렇게 답을 있는 책이 권이나 될까 생각해보니, 그래서 칸트는 인류 철학사에 남게 아닐까 싶었다. 누구를 참조하거나 하지 않고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런 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니…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상상력과 지성이 유희 중이며 안반데기에서는 작음을 느끼며 내가 작음을 있는 존재라실에서 느껴지, 고양되 감정에 빠져든다고 옆에 있지도 않으면서도 "그래, 맞아. 그렇지!"라고 알게 해준다. 파도를 보면 저 파도가 만들어지기 까지의 한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시간과 자연의 조화를 같이 느끼며 숭고라는 감정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결국 숭고의 감정이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하게 하는 아닐까 했는데 '쉽게 읽는 칸트 판단력 비판'에서 미와 숭고에 대한 분석 이후 부분에 절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해설을 보니 그런 논리적 전개가 이루어지는 하다.

 

예술철학 교재로 썼던 '쉽게 읽는 칸트 판단력 비판' 이번 기회에 모두 읽었는데, 어차피 원서를 읽는 아니라 번역서를 읽는 거라면 그냥 '판단력 비판' 읽는 편을 추천한다.


감관을 매개로 주어진 대상이 상상력을 활동시켜서 [감관에 주어지는] 다양한 것들을 종합하도록 하고 또 상상력이 지성을 활동시켜서 이 다양한 것들을 개념적으로 통일하도록 하는 경우, 항상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 P69

취미란 대상을 상상력의 자유로운 합법칙성과 연관하여 판정하는 능력이다. - P70

마음의 능력들이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들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리고 무규정적이면서도 합목적적으로 향유하는 것 - P75

규칙의 모든 강제로부터 벗어나야만 비로소 상상력의 구상에 있어서 취미가 최대한 완전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P76

상상력을 아무런 의도 없이 그리고 합목적적으로 유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새롭게 느껴지며, 우리가 그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싫증 나는 일이 없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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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현상의 직관이 무한성이라는 이념을 수반할 경우, 그렇게 현상하는 자연이 바로 숭고하다(고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 현상의 직관이 무한성이라는 이념을 수반하는 것은 대상의 크기를 평가함에 있어서 우리의 상상력의 최대의 노력을 해도 그 노력이 그 대상의 크기 평가에 적합하지 않을 때에만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의 수 개념은 전진(수열)을 통해 모든 척도를 주어진 어떠한 크기에도 적합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수학적 크기 평가에 있어서는 상상력은 어떠한 대상이라도 감당하여 그 대상의 크기 평가를 위한 충분한 척도를 제공할 수가 있다. 따라서 점진적인 포착을 하나의 전체 직관으로 파악하는 상상력의 능력을 뛰어넘어 포괄하려는 노력이 감지되는 것,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성의 작은 도움만으로도 크기 평가를 위해 유용한 근본 척도를 파악할 수 있고 또 그 척도를 크기 평가에 사용함에 있어서 무한히 진행할 수 있는 이 능력마저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지각되는 것, 바로 이런 것은 크기에 대한 감성적 평가에서만 발생함이 틀림없다. 이제 자연의 고유하고도 불변하는 근본 척도는 자연의 절대적 전체이고, 이 전체는 현상으로서의 자연에 있어서는 포괄된 무한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 척도는 자기모순적 개념(끝없는 진행의 절대적 총체적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이므로, 상상력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해도 포괄할 수 없는 자연물의 크기는 자연에 관한 개념을 (자연과 또 동시에 우리의 사유 능력을 근거 짓고 있는) 하나의 초감성적 기체로 유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기체는 감관의 모든 척도를 넘어서는 큰 것이며, 따라서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평가할 때의 우리 마음 상태가 숭고한 것으로 판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성적 판단력은 미를 판정할 경우 자유롭게 유희하는 상상력을 지성과 연관시켜 지성의 개념들 일반과 (그 개념을 규정하지 않고) 합치시키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어떤 사물을 숭고하다고 판정할 경우에는 상상력을 이성과 연관시켜 그 이념들과 (어떠한 이념인가는 규정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일치시킨다. 즉 일정한 (실천적) 이념들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야기될 마음의 상태에 적합하고 또 그런 이념과 조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산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숭고성은 오직 판단자의 마음속에서만 찾아지는 것일 뿐, 자연물의 판정이 그러한 마음 상태를 유발한다고 해서 자연물에서 찾아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얼음이 겹겹이 쌓인 거칠고 무질서하게 일그러진 산악이나 어둠 속에서 미친 듯 파도치는 바다와 같은 것들을 누가 숭고하다고 부르겠는가? 그러나 마음이 그러한 것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그 형식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상상력과 일체의 규정된 목적 없이 상상력과 결합하여 상상력을 단지 확장할 뿐인 이성에 자기를 내맡겼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상상력의 능력이 여전히 이성의 이념들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때 마음은 자신의 고유한 판정에 있어서 자신이 고양됨을 느끼게 된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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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들아´이 법문 중의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느니라。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淨妄)이 생기느니라。 - P134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니라。 - P136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라。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므로 선정이라고 이름하느니라。 - P137

위 없는 불도(佛道)를 맹세코 이룬다 함은 항상마음을 낮추는 행동으로 일체를 공경하며 미혹한 집착을 멀리 여의고,
깨달아 반야가 생겨 미망함을 없애는 것이다。곧 스스로 깨쳐 불도를 이루어 맹세코 바라는 힘(誓願力]을 행하는 것이니라。」 - P151

선지식들아、각각 스스로 관찰하여 그릇되게 마음을 쓰지 말라. 경의 말씀 가운데「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하였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자기의 성품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돌아갈 바가 없느니라。」 - P157

어떤 것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란 큰 것이다。마음의 한량이 넓고 커서 허공과 같으나 빈 마음으로 앉아 있지 말라。곧 무기공에 떨어지느니라。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대지산하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 P159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이것이 곧 큰 실행이니라。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 있는 이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또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크다고 하나、이도 또한 옳지 않으니라. 마음의 한량이 넓고 크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이 행을 닦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 P161

「어떤 것을 반야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이라고 하느니라.
한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 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라。반야는 형상이 없나니、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서「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라。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명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있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언덕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느니라。 - P162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곧 진여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느니라。」 - P166

비유컨대、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과 모든 유정·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그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바다에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것과 같나니、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 P169

사람 가운데는 어리석은 이도 있고 지혜로운 이도 있기 때문에、어리석으면 작은 사람이 되고 지혜로우면 큰사람이 되느니라。미혹한 사람은 지혜있는 이에게 묻고 지혜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어리석은 이로 하여금 깨쳐서 알아 마음이 열리게 한다。미혹한 사람이 만약 깨쳐서 마음이 열리면 큰 지혜 가진 사람과 더불어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그러므로 알라, 모든 만법이 다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그럼에도 어찌 자기의 마음을 좇아서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나타내지 못하는가?〈보살계경〉에 말씀하기를「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였다。마음을 알아 자성을 보면 스스로 부처의 도를 성취하나니、당장 활연히 깨쳐서 본래의 마음을 도로 찾느니라.」 - P174

만약 자기의 마음이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의 관조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라, 한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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