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있는 테이트 브리튼이라는 갤러리에서 열린 Artist & Empire전을 보았다.

 

대영제국 당대의 작품들을 주로 기획 전시한 것이었다. 한때 전세계의 1/4을 지배했던 과거에 대한 자부심과 향수, 애국주의, 다양한 문화들과의 혼성 양상 등을 엿볼 수 있었다.

 

전시관들을 둘러보면서 식민 시대에 대한 현대적 시각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 현대적 시각이라는 것은 맨 마지막 방의 한 두 작품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제국 시대의 영광을 인도 출신의 작가가 비꼬는 작품 다음은... 출구였다. 어랏, 이렇게 끝나버리네!

 

자신의 아픈 상처, 아픈 기억은 돌아보기가 힘든 것이다. 양해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 성숙한 모습을 기대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런던에 나가서 한국 총선 투표를 했다. 언제나와 같이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다 젊은 사람들. 지난 대선 때 런던 재외 투표소에서 젊은 사람들만 잔뜩 보고 나서 영국 재외자 투표는 민주당이 더 많은 득표를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새누리당이 더 많은 표를 얻었던 것 같다. 또다시 환상에서 깨어난 느낌이 들었었다.

 

이번 총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나는 전혀 모른다. 나의 바램은 야당이 개헌 저지선만 지켜줬으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야당이란 물론 민주당과 정의당 등을 지칭하는 것이다. 안철수의 당은 언제든 여당과 합당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예전에는 여당과 야당이 정국을 잘 운영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선거 양상이 달라졌던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선거는 일관되게 여당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식으로만 진행되기 시작한 것 같다.

 

내 기억에 그것은 민간인 사찰 사태 직후부터였던 것 같다. 그 전에는 어느 당이 대통령 탄핵 몰이에 나서면 유권자들은 그 반대편에 힘을 몰아주었다. 노무현 정권이 시끄럽고 무능력했다고 판단하면 정권을 반대 측에 넘겨 주었다. 사실 이런 것이 선거 아닌가? 그러나, 내 기억에 여당이 민간인 사찰 사태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이긴 후부터 여당은 어떠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계속 이겼던 것 같다.

 

아마 그 중간에 한국 사회에서 뭔가 중요한 변동이 있었을 것이다. 야당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민간인 사찰건이든 세월호건이든, 이른바 선진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연히 정권 교체급 파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단지 사실일 뿐이고,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존과는 다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주니 반민주니 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치쌍이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했을 때, 내 생각에는 민주당이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컨대, 대북 정책에서 진보적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많은 유권자들이 민주당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유권자들에게 북한 문제란 무엇보다도 안보와 연관 관계를 갖는다. 아무리 경제, 외교적인 안보라는 좀 더 합리적인 개념을 들어 설득하려 하여도 유권자들은 요지부동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잠시 내려 놓는 것도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북 문제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상대적 진보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민주당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말처럼 쉬운 것일 수 없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어렵고 그 그림을 실행하는 것도 어렵다. 인정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장기적으로 우향우 하여 좀 더 보수적인 당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으로는 민주당이 양당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당이 아니라 양당 구조에서 보수당으로서 새누리당을 대체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새누리당을 대체하는 보수 정당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전혀 민주당에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새누리당같은 정당은 근본이 없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근본 없는 정당이라는 점 때문에 새누리당은 최초로 여성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었고, 최초로 필리핀계 여성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었고, 세계 어느 나라 보수 정당과 달리 이민 문제에 매우 유연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웃긴 일이지만 그렇다.]

 

그래서 민주당이 당대표로 김종인을 받아들이고 이념적 탈색을 모색하는 가운데 경제 이슈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내 관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김종인이 정창래 등 강경파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거시적인 관찰로 그렇다는 거고, 자세한 사항은 정치 기사 헤드라인 정도만 스쳐보는 나로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김종인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이번 총선과 다음 대선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누가 가능성을 부정할 수 있을까? 한국의 야당은 이미 10년에 걸쳐 국정을 운영해 본 정당이다. 충분한 대안 세력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아깝게 지느냐, 간신히 이기느냐는 것 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외연 확장 밖에는 길이 없다. 나로서는 이번 민주당이 민주당이 취할 수 밖에 없는 길을 취했다고 본다. 물론, 과거 여당 선대 위원장을 맡았던 장외 인물을 끌어다 당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할 권능 등 전권을 맡긴다는 것은 정말이지 정당 정치에서 있을 수 없는 웃긴 일이다. 그러나, 또 그만큼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이념적 차이는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민주당이 선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민주당은 지역 기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론을 살피며 국정 운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바로 그것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통제 가능한 정권이 한국에 들어선다면, 한국은 한국의 경제적 수준에 맞추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좀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오세훈이나 반기문이 다음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런 진보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건 정치 세력에게 가장 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역시나 정권 교체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권 교체가 중요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억의집 2016-04-0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완전 포기 상태, 일단 노인인구가 너무 많아서.... 투표 인구가 삼천만이라는데, 그 중 구백만이 넘는 표가 노인이라 하더라구요. 65세 노인인구표가 거의 천만표에 육박해서 게임 끝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제 주변 노인네들 다 개누리 뽑겠다고 해서.... 일단 저는 위클리님이 말한대로 개헌유지선때문에 이번엔 비례도 민주당에 올인합니다. 여느때는 녹색당에 투표했는데, 그나마 개헌저지하려면 녹색당에 투표하는 건 무리더라구요. 지금 야당분열로 여당이 휩쓸 것 같습니다.

weekly 2016-04-04 16:2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많이 안좋은 상태인가 보네요...-.- 전 그냥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개헌저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데요... 전 이번에도 지역/비례로 나누어 투표를 했습니다.
 

어제 이스터 썬데이 때 갑자기 우박이 폭우처럼 떨어졌다. 자동차 경보기가 여기 저기서 울려댔다. 이번처럼 무자비하게 우박이 떨어져 내리는 건 처음 본다. 조깅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제대로 피할 수 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연극이 시작하기 전 무대 전경. 백발이 많이 보이는 것은 영국 관객의 많은 수가 노년이기 때문이다.)

 

마 레이니즈 블랙 보톰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마 레이니는 블루스의 어머니라 불리는 인물로 실존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마 레이니의 녹음 세션 날 반나절을 그린 작품이라기에 반은 뮤지컬일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흑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었다. 이번 연극의 작가 어거스트 윌슨이 퓨리처 상을 두 번이나 탄 대가라는 것도,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져 보고서야 알았다.

 

연극은 마 레이니의 세션에 모인 흑인 연주자들의 옥씬각씬이 대부분의 장면을 차지한다. 이날 이들에게 있었던 일을 신문 기사식으로 처리한다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새로 산 신발을 밟았다는 이유로 흑인들끼리 다투다가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물론 세상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진실은 저 짤막한 문장 너머에 있다.

 

연극이 끝나고 나오는데, 혼자 오신 어느 흑인 할머니, 친구들과 같이 온 어느 백인 할머니가 눈시울을 훔치시더라. 나도 가슴이 먹먹해 졌다.

 

사실 흑인 문제, 혹은 중동 문제, 이슬람 문제...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백인 문제, 혹은 유럽(미국을 포함하여)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월드북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소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읽어 본 철학책 중 가장 어려운 책인 것 같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참으로 감탄할 만한 책이다. 이 점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나는 항상 난해함을 의심한다. 이 난해함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하고. <존재와 무>의 난해함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존재와 무>의 기본 아이디어가 비교적 단순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언어를 회피한다. 이 점에서 나는 사르트르의 기교적인 언어 사용을 이해해 주고 싶다. <존재와 무>를 난해하게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과는 달리 사르트르의 언어 때문이 아니라 그 사상의 심원함, 그리고 문제를 백과사전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야 할 필요성 때문인 것 같다. 사실상 <존재와 무>는 전통 철학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철학 백과사전이다.(물론, <존재와 무>의 사상을 꼭 지금의 형태로 기술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은 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저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저자에게 문체를 바꾸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

<존재와 무>는 유럽 내전 직후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한 실존주의 운동의 기본 저작쯤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내 생각에 당시 사람들이 <존재와 무>를 읽고 제대로 소화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존재와 무>가 실존주의라 칭해지는 유행과 사상적으로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예컨대, <존재와 무>의 자유나 책임은 실존주의적 입장에서의, 심지어는 사르트르의 입을 통해 전파된, 그 자유와 책임이라는 개념과 같은 평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존재와 무>는 존재론을 다루는 저작인 것이다.

<존재와 무>는 휴머니즘적인 전통에 속하는 저작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존재와 무>를 가장 안전하게 규정하는 방법인 것 같다. 이때 휴머니즘은 물론 실증주의나 자연주의적 태도에 반하는 개념이다. 즉,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에 고유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키에르케고르나 후설, 하이데거가 모두 같은 범주에 들어온다. 사실 인간 존재, 혹은 인간 현상에 대한 가지성은 철학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현대에도 <존재와 무>가 의의를 갖는다면 그것은 <존재와 무>가 인간 존재의 가지성 문제를 의식적으로 주제화한 드문 저작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생각에 <존재와 무>는 아직 충분히 탐구 되지 않은(!) 광맥이다. (그것이 진정 광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탐사되지 않았다는 것은, 나는 거의 확신한다.)

아마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 이후에 철학 저술을 멈추었다면 <존재와 무>는 한계를 갖는 저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예컨대, <존재와 무>의 현상학적 존재론에서는 무의식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러나 후기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써냈기 때문에, <존재와 무>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면, 전혀 다른 책이 되었다. 말하자면 <존재와 무>의 존재론은 정적 모델만을 다룬 것이고, <비판>을 통해 그 정적 모델이 변증법 안에서 총체화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르트르는 무의식의 문제를 다룰 수 있고, <존재와 무> 안에는 이러한 확장에 저항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사르트르가 처음부터 이런 총체적 기획 안에서 <존재와 무>를 저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르트르의 유일한 기획은, 구체적인 것(요컨대 구체적 체험)을 구체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획은 건전하다. 만일 그것에서 어떤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초기 기획의 건전성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존재와 무>의 한국어 표준판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다. 현재 유일하게 유통되고 있는 것은 동서문화사판인데, 내 생각에 꽤 좋은 번역인 것 같다. 물론 아쉬운 점도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영역판처럼 대놓고 오역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체제가 좀 허술해 보여도 엄청난 공력을 들여 번역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긴 이 정도로 두텁고 밀도 높은 책을 번역해 내는 분에게는 무조건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영어판 역자도 그만 미워하기로 했다. 새로운 영역판이 준비 중에 있다는 소식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