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월드북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소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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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어 본 철학책 중 가장 어려운 책인 것 같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참으로 감탄할 만한 책이다. 이 점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나는 항상 난해함을 의심한다. 이 난해함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하고. <존재와 무>의 난해함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존재와 무>의 기본 아이디어가 비교적 단순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언어를 회피한다. 이 점에서 나는 사르트르의 기교적인 언어 사용을 이해해 주고 싶다. <존재와 무>를 난해하게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과는 달리 사르트르의 언어 때문이 아니라 그 사상의 심원함, 그리고 문제를 백과사전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야 할 필요성 때문인 것 같다. 사실상 <존재와 무>는 전통 철학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철학 백과사전이다.(물론, <존재와 무>의 사상을 꼭 지금의 형태로 기술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은 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저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저자에게 문체를 바꾸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

<존재와 무>는 유럽 내전 직후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한 실존주의 운동의 기본 저작쯤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내 생각에 당시 사람들이 <존재와 무>를 읽고 제대로 소화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존재와 무>가 실존주의라 칭해지는 유행과 사상적으로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예컨대, <존재와 무>의 자유나 책임은 실존주의적 입장에서의, 심지어는 사르트르의 입을 통해 전파된, 그 자유와 책임이라는 개념과 같은 평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존재와 무>는 존재론을 다루는 저작인 것이다.

<존재와 무>는 휴머니즘적인 전통에 속하는 저작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존재와 무>를 가장 안전하게 규정하는 방법인 것 같다. 이때 휴머니즘은 물론 실증주의나 자연주의적 태도에 반하는 개념이다. 즉,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에 고유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키에르케고르나 후설, 하이데거가 모두 같은 범주에 들어온다. 사실 인간 존재, 혹은 인간 현상에 대한 가지성은 철학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현대에도 <존재와 무>가 의의를 갖는다면 그것은 <존재와 무>가 인간 존재의 가지성 문제를 의식적으로 주제화한 드문 저작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생각에 <존재와 무>는 아직 충분히 탐구 되지 않은(!) 광맥이다. (그것이 진정 광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탐사되지 않았다는 것은, 나는 거의 확신한다.)

아마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 이후에 철학 저술을 멈추었다면 <존재와 무>는 한계를 갖는 저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예컨대, <존재와 무>의 현상학적 존재론에서는 무의식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러나 후기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써냈기 때문에, <존재와 무>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면, 전혀 다른 책이 되었다. 말하자면 <존재와 무>의 존재론은 정적 모델만을 다룬 것이고, <비판>을 통해 그 정적 모델이 변증법 안에서 총체화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르트르는 무의식의 문제를 다룰 수 있고, <존재와 무> 안에는 이러한 확장에 저항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사르트르가 처음부터 이런 총체적 기획 안에서 <존재와 무>를 저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르트르의 유일한 기획은, 구체적인 것(요컨대 구체적 체험)을 구체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획은 건전하다. 만일 그것에서 어떤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초기 기획의 건전성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존재와 무>의 한국어 표준판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다. 현재 유일하게 유통되고 있는 것은 동서문화사판인데, 내 생각에 꽤 좋은 번역인 것 같다. 물론 아쉬운 점도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영역판처럼 대놓고 오역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체제가 좀 허술해 보여도 엄청난 공력을 들여 번역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긴 이 정도로 두텁고 밀도 높은 책을 번역해 내는 분에게는 무조건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영어판 역자도 그만 미워하기로 했다. 새로운 영역판이 준비 중에 있다는 소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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