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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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전적인 자유를 보증하는 철학이다. 각각의 인간은 자유의 존재이며 그러므로 개별적인 행동들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즉, 행동(인간의 유일한 존재 양식)을 통해서만 그 사람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꺼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만일 이렇다면 실존주의가 인간 고유의 숭고한 가치를 훼손한다거나, 인간을 공허와 무기력에 빠지게 한다는 등의 비판은 분명 촛점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비판들에 대한 반박을 기획하면서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으로 못 박은 것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첫째, 실존주의가 인간을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라고 주장함에도 우파(주로 종교계)에서는 실존주의가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는 철학이라고 비판한다. 사실 우파에서는 세계에는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가치도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런 점에서 우파는 반-휴머니즘 진영에 속한다.

 

둘째, 실존주의는 절대적으로 행동의 철학임에도 당시 프랑스의 공산당은 실존주의를 정적주의의 철학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철학인 유물론은 결정론을 함의한다. 결정론은 인간의 자유의 가능성(운동이란 이런 가능성을 전제한다)을 부정하거나 심하게 제한한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 공산당 역시 반-휴머니즘 진영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사르트르의 전문용어로 "자기 기만"에 빠져 있다. 사실 반박은 이 한 마디로 족하다.) 

 

대체로 이 정도의 내용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에 담겨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 책이 사르트르의 대중 강의를 필사해 옮긴 것이기 때문에 몇 가지 상황적 한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대중 강의이기 때문이겠지만 철학적으로 엄밀하지 않다. 예를 들어 시계 제작자와 시계의 관계를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그대로 옮겨도 될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 신의 존재 유무와 필연적 관계에 있을까? 등등.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신이 존재하는가 여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둘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사르트르의 유일한 윤리학 관련 저작이라는 것이다. "존재와 무" 마지막 문장에서 사르트르는 윤리학에 관한 저작을 내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이야기된 윤리적 논제들을 "존재와 무"에서 충분히 끌어올 수 있는 것이지만, 여전히 "존재론"에서 끌어온 것에 불과하다. 즉, 아직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만일 강의 후 토론에서 토론자가 "실존주의에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고 물었으면 사르트르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내가 보기에 이에 대한 대답은 "존재와 무"에서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도 찾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존재와 무"는 존재론에 관한 저작이다.)

 

셋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기술된 사상은, 당연히 대단히 피상적이다. 그런데 동시에 완결적이다. 책이 "완결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도 거기서 완결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자신의 사상을 이렇듯 피상적이면서 완결적으로 소개한 것은 분명 사르트르의 실수다. "존재와 무"에는 차원이 다른 깊이가 있는데 말이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몇몇 사람에게는 "존재와 무"에 대한 간판이 아니라 입구이기를 바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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