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남부에 한인들이 몰려 사는 뉴몰든이 있다. 몇 칠 전 뉴몰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으며 한인 신문을 보았다. 최고은이라는 이름의 생소한 가수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6월 말에 영국에서 열리는 글래드스톤베리 축제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이 축제에는 잠비나이 등도 초대받았다고 했다. 나는 둘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집에 와서 바로 유튜브를 찾아 보았다.
최고은. 기타 하나 들고 노래하는 싱어 송 라이터였다. 앨라니스 모리셋이나 돌로레스 오리어던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창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면적인 성찰을 담은 멜로디와 가사들. 나는 놀랐다. 요즘 시대에 이런 노래를 하는 가수가 있다니. 나는 최고은을 20대 초중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놀랐던 것 같다. 사실 최고은은 31살이라고.
최고은에 대한 기사를 웹에서 찾아 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판소리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영어로 노래하는 것에 더 편해 한단다. 이상한 이야기긴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로 노래하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질 만한 주제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내가 처음 최고은의 노래를 들었을 때 느꼈던, 시대착오적이라 여겨질 정도의 이질감이 지금의 한국과 최고은 사이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되니까.
나는 최고은을 보면서 전라도 출신의 여성 작가들, 신경숙, 한강 등에게서 느끼게 되는 그런 분위기를 떠올렸다.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말하자면 촌스러움,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내면성, 자폐적이라 생각될 정도의 내면성, 그리고 그에서 획득한 깊이, 마지막으로 그 깊이와 보편성 사이에서의 갈등과 긴장. 아마 그는 자신의 감성만으로 노래할 것이고 청자 중 일부는 그 긴장과 갈등 속에서 그 노래를 들을 것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런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가는 정말 희귀하다는 것이다.
잠비나이. 유튜브에서 그들의 음악을 처음 듣는 순간 나는 너무나 놀랐고 흥분했고, 솔직히 눈물이 날 뻔 했다. 거문고로 리프를 치고 해금으로 퍼스트 기타를 한다는 아이디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잠비나이는 바로 이런 변태같은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있었는데, 그 음악은 실험적인 프로젝트 수준이 아니라, 드럼, 베이스, 기타로 오랫동안 정형화된 밴드 구성 이상으로 든든한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리듬 파트에 실린 해금이나 피리는 분명 전통적인 주법에서 크게 이탈한 것 같지 않은데도 현대적으로 들렸고, 때로는 어느 기타나 전자 사운드보다 더 파괴적인 소리를, 때로는 어느 보컬리스트보다 더 깊은 감성의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잠비나이 멤버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리라. 그들의 음악에는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전혀 없다.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니 뭔가 주저함이나 석연치 않음이 있을 만도 한데, 잠비나이는 확고함, 단호함으로 그런 허약함을 일소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시원하고 재미있고 힘이 있다. 긴 곡들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전혀 느끼지 않게 한다. 잠비나이의 음악은 마치 백발로 태어난 노자처럼 완성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것들이 너무나 놀라웠다. 그들은 아직 어린데 말이다.
한국의 곳곳에서 젊은 세대들이 끊임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도 기뻤다. 그래서 글래드스톤베리 축제에 가려고 티켓을 알아봤다. 그런데 이미 매진. 아마도 1년 전에 미리 예약을 했어야 하나 보다. 어쨌든 이 팀들이 유럽에 자주 온다니, 네덜란드만 되어도 가서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얘기. 현대의 한국에 보편성의 획득이라는 과제는 상당히 시급하다. 예를 들면 나는 엊그제 채리티 샵에서 산 달라이 라마의 책을 읽었다. 달라이 라마는 불교 문화의 지역적 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 "중국 불교, 일본 불교, 태국 불교..." 등을 언급해 나갔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국 불교는? 하며 섭섭해 할 것이다. 내가 접해 본, 서양 사람이 쓴 불교에 관한 책에는, 한국 불교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불교를 전달해 준 다리로만 의의가 있다든지,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에 어떠한 창의적인 부가도 한 것이 없다든지 하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년을 훨씬 넘는 동안 불교에 대한 아무런 창의적인 기여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제 그것은 현대의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에 어떻게 보편성을 제공해 주느냐 하는 문제로 전환된다.
내 방 책장에는 한국에서 가져 온 한국의 예술에 관련한 책들이 몇 있다. 그런데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다. 대체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우리 것은 이름다운 것이야"라는 관점에서 쓴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내가 여기 영국 친구들에게 한국의 미에 관한 책들을 소개해 주고 싶어한다고 하자. 과연 한국에서 온 책들이 도움이 될까? 별로. 그 책들은 주로 신토불이적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쓰여진 책은 한국 사람 자신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잠시 잠비나이의 이야기를 더 해보면. 잠비나니의 곡에서 들리는, 베이스 기타 역할을 하는 소리에 대해 생각해 보자. 베이스 기타 소리를 내는 것 같은데 너무 두텁지 않아 온 곡을 안개로 휘씌우지 않고, 그래서 곡의 날렵함을 유지하게 해주고, 또 드럼 스틱 소리같은 것이 기가 막힌 조화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내고 있는데, 이런 소리들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내는 것일까? 답은 우연히도 거문고라는 것이다. 이 기술은 보편적인 언어로 되어 있는데, 그 구현은 우연히도 거문고로 되어 있다. 우리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방식은 항상 이와 같다. 물론, 음악 분야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좀 더 쉬울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 한국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려면 역사적으로든 현대적인 평가에 있어서든 최소한 중국과 일본에 대한 참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명시적 언급으로든 배경으로든 말이다. 이 경우에는 그 참조들이 우리가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다리, 플랫폼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게으름은 이 작업이 요구하는 어마어마한 노고때문이라는 변명에 고개가 살짝 끄덕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점, 태도일 수도 있다. 보편적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려는 관점, 태도. 자신을 측정가능한 대상으로 내놓는 용기. 분명한 것은 이런 관점, 태도, 용기를 가졌었더라면 숭례문 복원 공사가 실패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이 한국의 현재 전반을 특징 짓듯이, 나는 숭례문 복원 공사의 실패가 한국의 고유 문화에 대한 현재 양상을 특징짓는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는 세계를 향해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방법론으로 택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잠비나이가 보여준 신념이 이런 것일 게다. 자신이 고유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 그것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는 확신. 이런 것이 변화를 추동하는 에너지일 것이다. 나로서는 잠비나이와 같은 패기의 밴드를 발견한 것이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승리하는 것보다 더 기쁠 것 같다. 자신의 독자성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 그것을 확고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 이런 것들이야 말로 현대 한국에, 특히 기성세대에게 절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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