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R을 만났다. 좋아 보였다. 영국에서 기분 장애 치료를 받다가 차도가 없어서 미국 존슨 홉킨스 병원에서 2주간 치료를 받고 4주 전에 퇴원했다고 한다. R은 그 치료를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R이 그동안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어 놓은 것.) 그것을 본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이런 것이었다: "이거 너가 그린 거 맞아?" 그림이 골격에 있어서나 컬러에 있어서나 훨씬 건실해졌다. 나는 "way better"라고 말했다. R은 곧 미술 학교에 등록할 예정이란다. 이제 철학은 부차적인 일이고, 미술이 그의 확고한 관심사가 되었다. 잘 되었다. 그 치료법(CBT)에 대해 얘기하며 공원을 빙빙 돌았다. 이야기는 곧 스피노자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이제 R은 철학에 대한 관심이 확실히 사그라들었다. 그는 에티카를 "not practical, not pragmatic"하다고 말했다. 물론,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스피노자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에티카를 읽을 필요조차도 없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지성이나 이성을 이용하여 더 나은 삶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를 지성론자, 합리론자, 이성주의자 등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다소 열띤 토론을 했다. R과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헌책방에 들렀다가 달라이 라마의 "The art of happiness"가 눈에 들어오길래 집어들었다. 3.99 파운드. 집에 오는 내내 읽으면서 웃었다. 우리가 공원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그 안에 잔뜩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구절을 인용해서 R에게 메일을 줘야지 했는데 아예 책 하나를 사주어야 할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컬리의 에티카 해설서를 읽었다. 컬리는 마음의 불멸성에 관한 스피노자의 이론을 에티카의 가장 어려운 대목으로 꼽고 있었다. 나는 나의 몸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첫째, 그러므로 나의 몸은 나에게 투명하지 않다. 둘째, 그러므로 나는 나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마치 제3자인냥, 객관적 관점에서 기술할 수 있다. 후자가 바로 철학의 가능성이다. 혹은 영원의 가능성이다. 


R과의 대화 한 대목을 떠올린다. 의사들이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고. 나는 젠 마스터의 가르침과 비슷한 거 같다고 말했었지. 나는 지금 미래의 어떤 계획에 집착하고 있다. 사실 그런 집착함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요는 그런 집착이 나를 비생산적으로 만들지 않도록 그걸 내가 관리할 수 있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매우 쉬운 일일 수 있다. 아침에 108번의 절을 한다고 해보자. 108이라는숫자를 집착이라 말해도 좋고,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어쨌거나 그 숫자가 없다면 촛점이 맞추어진 행위도 없다. 중요한 건 108이라는 숫자를 마음에 갖고 1, 2, 3... 에 동일한 흥분을 분배하며 행위 하나 하나를 쌓아나가서 108이라는 숫자에 이르는 것이다. 108번의 절은 매우 훌륭한 훈련이다. 삶에는 점프가 없다. 시다르타도 108배를 하기 위해서는 108번 절을 해야 했을 것이고, 셰익스피어도 햄릿을 쓰기 위해서는 한번에 한 단어씩 써나가야 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