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템즈 강변에 셰익스피어스 글로브라는 아담한 야외 극장이 있다. 셰익스피어 당대의 글로브 극장을 비슷하게 복원한 것으로 셰익스피어 관련 극을 주로 올린다. 처음 영국에 온 다음날, 비를 맞으며 이 극장을 찾아 걸어서 "앤 볼린"이라는 연극을 본 기억이 난다. 어제 저녁에 이 극장에 "맥베스"를 보러 갔었다. 셰익스피어도 읽고, BBC판 맥베스도 유튭으로 보고, 이제 연극 무대를 잔뜩 기대하고 간 것이었다. 처음부터 확연한 것은, 연극과 영화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연극은 무대가 있고 관객이 있다. 그것이 배우들의 연기에 다이나믹함을 부여한다. 이런 역동성을 영화로 그대로 옮기면 연기가 과장되거나 산만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셰익스피어 극을 영화로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잘 옮겨 놓은 영화들을 챙겨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손 웰즈라든지, 올리비에, 아키라 감독 등의 작품을 찾아 보고, 다시 보고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한참 몰두하여 극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쉬는 시간에 극장을 빠져 나와야 했다. 나중에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왜 갑자기 현기증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직전에 맥주 한 잔을 마셔서?)


연극이 시작되기 전 모습이다.


셰익스피어스 글로브 극장에 가는데 R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안부 메시지. 나는 그리 사교적인 사람이 아닌데다 학기 에세이와 학위 논문을 쓰는 두 달 동안 집에 거의 틀어 박혀 있었다. (학교가 있는 런던을 왕복하기에는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므로 안정적인 공부 환경으로 집을 선택한 것) 그 동안 R과도 거의 연락이 없었다. 현기증 때문에 극장을 빠져 나오는 도중에 보니 R의 문자가 하나 더 와 있었다. 그동안 기분 장애(mood disorder)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고... R은 내가 학교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다. 당연히, 나의 동행이 나를 비난했다... R의 집안은 큰 부자다. 이 말은 R이 재능과 열정을 갖고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R의 문제는 바로 이것, 열정을 쏟아부을 대상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R은 스스로를 "empty"하다고 느낀다. R은 화가가 되고 싶어하고, 내가 보기에 재능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재능에 있어서도 놀파구가 있어야 한다. R은 미술학교에 진학하고 싶어했고 나는 그와 동행하여 미술학교 입학 센타에 갔었다. 그때 나는 R에게 말했었다. 네 그림들은 좋다. 그것들은 순수한 재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네 그림들을 미술학장 앞에 내놓고 입학을 청원한다고 생각해 보라. 너가 미술학장이라면 네 그림을 뽑아줄까? 아닐 거다. 네 그림에는 아직 어떤 강력함, 열정, 모색, 방황, 실험, 에너지... 등등이 결여되어 있다. 우린 돌파구에 대해 이야기했었고, 나는 철학 공부에 힘들어 하는 그에게 (누군들 철학 공부를 수월해 할까?) 철학과를 자퇴하고 미술에 모든 것을 걸어보라고 했다. 열정은 그렇게 모든 것을 거는데서 나온다. 그리고 열정은 재능을 창조한다. 다음날 R은 앞으로 철학 공부 열심히 할 거라고 내게 말했고, 나는 웃었다. 삶은 쉽지가 않다... 극장을 나와 주말인냥 시끌벅적한 템즈 강변을 걸으면서 나는 세잔을 생각했다. 세잔의 재능은 처음부터 주목받은 것이 아니다. (피카소와 다르게.) 세잔의 인생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실험, 방황, 모색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이 그의 불안정, 소심함, 의지부족마저 설명해 준다. 그건 "아니다"라는 말 한 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롱 대상 작품 앞에서 "저건 아니야"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세잔을 상상해 보라. 그렇다면 세잔에게, 제대로 된 작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그게 아직 현존하고 있지 않다면 그걸 창조해야 할 책임이 세잔에게 부여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회화 세계고, 그것은 엄청난 프로젝트이다. 세잔이 이런 프로젝트 앞에서 쉽게 좌절하곤 했다면 나는 100% 세잔을 이해한다. 그의 무기력함, 조급증, 쉽게 포기하는 태도 등을 결코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R에게는 아직 이런 대범한 비젼이 없다. 내가 R에게 이런 비젼을 발견했다면 나는 그를 몰아부쳤을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란...) 나라는 인간은 R에게 미술을 취미로 삼고, 미술관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해봐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음주 월요일날 R을 보기로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많이 들으려 한다. 그는 할 말이 아주 많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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