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들으며 아이폰으로 아이리스 머독을 읽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허리에 무전기를 찬 남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알만 했다. 또 구간이 막힌 것이다. 플랫폼에는 사람들의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 노, 아이 노"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나도 그 행렬에 합류했다. 이 나라에 점점 시니컬해지는 나를 느낀다.

지상에는 사람들로 가득 하다. 언제나 그렇듯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보인다. 하느님을 부르짖으며("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무리지어 걷는 영국 아가씨들. 역설적이게도 이 친구들은 맘 먹고 차려 입을 때가 가장 우스꽝스럽다. 좁은 도로, 4, 5층 높이의 석조 건물들. 예전에 학원 강사가 런던의 첫인상을 묻기에 시골스럽다고 대답했었다. 그때 생각이 났다. 시골스러웠다.

학교까지 걸어서 갔기 때문에, 잠깐 목 좀 축이며 쉬려고 에스프레소 카페에 들렀다. 마침 R이 거기 있었다. 우리는 주로 우연히 만난다. 우리는 만나면 거의 철학 얘기만 한다. 그런데 오늘은 R이 "영국 오기 전에 뭐 했다고 했지?" 하며 사적인 것을 물어왔다. "용접사. 그러니까 공장 노동자." 그런데 우리 옆자리에 자그마한 동양 여자들 세 명이 앉았다. 곧 한국말로 "내일 교회..." 이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솔직히 나는 옆에 한국 사람이 있으면 불편하다. 나는 걷자고 말한다. 얼마쯤 걷고나서 나는 웃으며 말한다. "저 친구들 한국 친구들이야. 아마 저 친구들도 내가 한국 사람인 걸 알았을 거야. 내 엉망인 영어를 듣고 말이야." "네 영어는 훌륭해." "재앙이지." 

내 영어는 엉망이다. 나는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R은 슬쩍 슬쩍 내 영어를 교정해 준다. 예를 들어 내가 We have to express our thoughts "in our own term." 이러면, "The most difficult part for me is the phrase "in my own terms", 이런 식으로 슬그머니 내 말을 고쳐 준다. 물론, too much times... 등등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는 엉터리 영어는 나도 그도 어떻게 감당이 안될 때가 많다. 가끔은 바른 영어 감시 경찰이 있어 나를 잡아 가지 않을까 하는 싱거운 걱정이 들기도 한다.

R은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화가이기 때문에 경험론 전통의 영국 철학 풍토에 많이 힘들어 한다. 나는 그에게 자료를 읽고 정리하고 에세이를 쓰는 방법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하고 있다. 걸으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 어떤 사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요구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다소 기계적으로 접근하라. 파인만이라는 물리학자 알아? 내가 파인만 방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이 있다. 너의 사상을 초등학생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서술해 보라. 그러면 개념어 하나를 사용하는데도 매우 신중해 질 수 밖에 없다. 정당화할 수 없는 개념어 사용은 피하게 될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서술된 사상이 바로 너 자신의 언어로 표현된 사상이다. 나중에 철학 전공자와 토론하거나 에세이로 작성하여 제출할 때는 그 사상을 압축하고 추상화하여 서술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는 지루하니까... 그렇게 압축되고 추상화된 사상은 매우 파워풀하게 보일 것이다...

도서관 앞마당에서, 나는 벽에 기대 서 있었고 R은 담배를 펴고 있었다. R이 물었다. "대학원 프로그램 행복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싶어했으니까. 삶에서 철학은 내게 거의 전부니까..." 가끔 하나만 외곬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것 말고도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다. R이 나의 영어를 슬쩍 교정해 주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예술도!"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깬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예술도! 그리고 사람들..." 나는 손가락으로 R의 배를 찔렀다. "그리고 친구..." 

도서관에서 허기질 때까지 공부했다. 지하철 일부 구간이 막혔기 때문에 낮에 걸었던 거리만큼 걸어야 했다. 드디어 역구내로 접어들었다. 연결 통로에서 자그마한 여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마치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지나치고 있었다. 나도 그의 앞을 무심히 지나치고 있었다. 누군가의 주의를 끌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위로 하며 팔을 들어 올리게 되더라. "Louder! (If you've got a voice that needs to be heard!)"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다. 전혀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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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2-11-20 15:22   좋아요 0 | URL
영국, 런던 처음 왔을 때 여기가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지배하던 그 대영제국의 수도인가? 생각보다 많이 아담하군... 이런 생각을 했었죠:) 아, 워킹 홀리데이 영국에서도 가능하다는 기사를 본 적 있는 거 같네요. 기회가 있으면 잡으시는 것도~:)
늘 좋은 말씀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노이에자이트 2012-11-18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에 머독<철학자의 제자>를 구입했어요.그런데 머독 작품을 읽으셨군요.무슨 소설이었나요?

weekly 2012-11-20 15:29   좋아요 0 | URL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 아래서>라는 작품입니다. 영어 공부용으로 반복해서 읽고 있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철학자의 제자>를 헌책방에서 아름다운 가격으로 구입했는데, 아직 읽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물 아래서>의 가벼운 필치(?)와 유머를 좋아하는데, <철학자의 제자> 등 머독의 후속 작품들의 분위기는 어떨까 궁금하네요. 다 읽으시면 감상문 올리시겠지요? 꼭 찾아가서 읽어 볼께요~:)

노이에자이트 2012-11-21 08:18   좋아요 0 | URL
하하하...올려볼까요? 그물 아래서는 아직 국내에서 번역이 안 된 것 같아요.

weekly 2012-11-21 18:06   좋아요 0 | URL
"Under the net"은 국내에선 <그물을 헤치고>라는 제목으로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네요. 저도 한국 있을 때 이 번역본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술술 읽히는 잘된 번역이었던 것 같아요. 평소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철학자가 쓴 소설에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데, <그물을 헤치고>는 철학자가 썼을 법한 소설(예를 들면 사르트르의 <구토>)의 냄새를 거의 풍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님이 독후감 써서 올리시면 당근 찾아가서 읽어 볼께요~

노이에자이트 2012-11-22 10:27   좋아요 0 | URL
오...번역이 되었군요.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weekly 2012-11-23 19:39   좋아요 0 | URL
:) 좋은 하루 되시길~

2012-11-18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2-11-20 15: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 글을 재미있게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니 신기하기도 합니다. 뾰족하고, 혼자 생각에 꽉 막혀 사는 글들인지라...
다시 한번 감사드리구요, 늘 행복하시길 기원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