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스 힐. 커다란 언덕이다. 초록으로 뒤덮인 비탈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휴식을 취하거나 포도주를 마시며 친구들과 즐거이 떠들거나 언덕을 오르내리며 연을 띄우느라 분주해 하기도 한다. 정상의 평평한 땅에는 간소한 전망대가 있다. 주변으로 4 시간 짜리 트래킹 코스가 이어져 있다. 

복스 힐은 원래 개인 땅이었다고 한다. 매물로 나오자 어떤 신사가 사들여서 국립 재단에 기증한 것이란다. 그 신사의 이름이 전망대에 새겨져 있다. 덕분에 이 좋은 자연을 모두가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복스 힐 정상에서 탁 트인 하늘과 땅을 바라보자니 이 신사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세잔이나 모네의 그림 앞에서 그 화가들에 찬탄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잔이나 모네의 그림은 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물론 한국 사람이고 내내 한국에서 살다가 작년 여름에 처음 외국에 나와 봤다. 한국에서 살 때도 한국은 종종 나에게 낯선 나라였다. 특히 한국의 효라는 관념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었다. 놀랍게도 한국 사람들은 효의 완성을, 중국의 옛 경전에서 가르친 바에 따라 입신양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념은 한국 사람들에게 완전히 체화되어 있다. 

복스 힐 정상에 서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일 한국 사람이 이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이 땅은 내가 조상에게 받아서 후손에게 넘겨주어야 할 우리 가문의 것이다.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런 고로 내가 이것을 함부로 팔거나 어떻게 할 수 없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 땅이 자기 가문의 것임을 공표하기 위해 햇살이 잘 드는 가장 좋은 자리의 비탈을 깍아 조상의 무덤을 모실 것이다.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강아지가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전봇대에 오줌을 누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역시 스피노자주의자이다.)

이 좋은 땅의 가장 좋은 자리에 인공과 독점의 흔적을 남기고 그 주변을 "접근금지"라는 표말이 달린 철책으로 둘러친다는 생각은 복스 힐 정상에서 할 수 있는 상상 중 최악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일종의 비극으로 여긴다. 물론 이러한 독점의 철책은 어느 문화에나 있다. 어떤 문화는 그 철책이 "나"로부터 열려 무차별적인 대중에게 완전히 개방되는 것을 성숙의 징표로 삼는다. 그리고 어떤 문화는 그 철책이 "나"로부터 열려 가족의 영역까지 확장되는 것을 성숙의 징표로 삼는다. 한국은 물론 후자에 속한다. 한국 사람에게 전자는 미성숙을 의미한다. 나는 한국 사람들의 이러한 성향을 인정한다. 그것은 생존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반면 그것은 생활에 무력하다. 그리고 운동이란 생존에서 생활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운동이 삶을 정의한다고 믿는다. 물론 마르크스에게서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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