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증인들 신자 두 분이 집에 왔다 갔다. 지난 주에 벨이 울리기에 나가봤더니 이 분들이 미소를 함빡 머금고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영국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사람을 대할 때 호의와 관심을 보이라는 것 뿐이다(물론, 영국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라면 "그런 거 관심없으니 가세요."라고 했을 걸 일단 그 분들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 생각을 말했다. "나는 신이나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하다.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신들에게는 시간 낭비일 수 있을 거다. 그래도 괜찮다면 시간을 잡아서 다시 한번 방문해 주어도 좋겠다." 그 분들은 좋다고 했다. 우리는 시간 약속을 잡고 통성명을 하고 헤어졌다.

그분들을 보내고 나서 탁자에 앉아 그분들이 건네 준 팜플렛을 대충 읽어 보았다. 익숙한 그림체. 한국에서 종종 보던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나는 이 종교에 아무런 반감이 없다. 내 기억에 이 종교의 신자들은 다 착했고 교리는 합리적이었고 태도는 일관적이었다. 예를 들면, 내가 알기로 여호와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거총을 거부한단다. 나는 이걸 이치에 맞는 일이라 여긴다.

그분들이 다시 방문했을때(어제) 나는 현관문 앞에서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켰다.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는 철학적인 것에 관심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될까봐 걱정이 된다. 그 분들은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안된다고 했다. 내가 집에 들어서서 맨발로 있자 그분들도 신발을 벗었다. 커피나 차, 물을 권했는데 내가 뭘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자기들은 괜찮다고 했다. 그분들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밥상이자 책상인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내가 입고 있던 티셔츠에는 하얀 치약 자국이 묻어 있다. 두 분 중 젊은 친구의 소매에는 약간 때가 타 있었다. 그 친구가 주로 말을 했다.

그 분들은 지구적 재앙에 대해 먼저 얘기했다. 성경의 예언,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 지금이 마지막 날의 근방이라는 것이다. 나는 계속 머리를 갸우뚱 했다. 그것은 인류가 여지껏 벌여 왔던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이다. 지진, 쓰나미 등의 자연 재해도 자연의 역사의 일부일 뿐이다. 고대에도 폼페이의 대재앙이 있었지 않았나? 당신이 지적해 준 성경의 예언들이 어떤 사건을 특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재앙들이 지속되는 것을 마지막 날의 전조로 본다면 인류는 언제나 마지막 날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마지막 날이 이런 것을 뜻하는가? 젊은 친구는 아니라고 했다. 그럼 어떤 특정한 시점을 말하는가? 젊은 친구는 10년 후라고 얘기했다. 나는 그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는 얘기인지 되묻지 않았다. 젊은 친구(스콧)가 너무 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고 대꾸했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스피노자의 "지성개선론" 서두에 나오는 질문과 같다. 스콧은 마태 복음 5장을 펴들고 읽어 주었다. 아름다운 귀절이었다. 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다"라고 무신론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해당 페이지를 노트해 놓았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얘기는 많이 순해졌다. 나는 많은 부분을 긍정하며 얘기를 들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다시 창세기로 갔다. 누가 이 세상에 죄를 도입하였는가, 라는 몇 천년 닳고 닳은 신학적 논쟁이 잠시 스쳐갔다. 세속의 정부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나는 마태 복음의 문장들에 표한 감탄의 댓가로 성경을 한 부 선물받았고(잠깐 기다리라더니 교회에 가서 가져다 주었다), 윤리(종교)와 정치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보인 이유로 "종교와 정치"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또 하나 받았다. 지금 내 책상 위에 숙제처럼 쌓여 있다. 나는 그것들을 읽겠노라고 약속했고 그분들은 다음 주에 다시 찾아 오겠노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한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을 서로에게 갖고 있다. 그것은 윤리적인 부분이다. 나는 이차대전때 영국과 독일의 종교 지도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아일랜드의 대기근 때 영국 정부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얘기하며 그분들과 완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리적인 부분은 건널 수 없는 다리다. 이 교리적인 부분이 핵심일까? 아마도 그분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극히 사소한 부분이다. 그분들과 나 사이의 교집합은 어떻게 그려질까?

그분들을 떠나 보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시 방문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내가 늘 염려하는 것은 내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적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등등. 나는 신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신은 실체가 아니다. 아니, 스피노자는 신을 실체라 하지 않았는가? 바보들이나 그렇게 믿어버린다. 이렇게 저렇게 벌이는 활동들을 통털어 수학이라 했더니 수학을 실체라고 믿어 버리는 사람은 도저히 구제불능이다. 그러한 활동들, 운동들을 일컬어 수학이라 한 것 뿐이고, 그러한 활동들, 운동들을 일컬어 신이라고 한 것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활동들, 운동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활동들, 운동들에 대해 얘기할 때 형용사를 동원한다. 다시 말해 신은 형용사다. 그리고 형용사는 언제나 구체적이다. 밥이 나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좋은 사고를 하게끔 해준다면 밥이 곧 신이다. 그 "밥"이 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밥이 한 계기를 이룬 어떤 긍정의 과정 전체를 일컬어 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더 좋은, 더 긍정적인"이란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사실과 가치를 함께 담아낸다. 이러한 장치없이 우리는 사고를 할 수 없고, 판단을 할 수 없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장치 위에서 우리는 인간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이러한 관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빌어온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념에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 나는 스스로 도전에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관념을 재고해 볼 필요성을 아직 느껴보지 못했다. 만약 재고하게 된다면, 그 또한 한 진전일 것이다. 즉, 그 또한 신일 것이다. 신은 언제나 관계를 묘사할 때 등장한다. 그러므로 신은 관계에 열려 있음, 그리하여 관계가 긍정적으로 이루어짐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것이 내가 영국에서 배운 유일한 것이다. 관계에 열려 있으라는 것, 즉 사람에게 호의와 관심을 보이라는 것. 그러므로 내가 영국에 온 첫날 만났던, 나의 책꾸러미를 보관해 두고 있었던 그 아가씨는 나에게 신이다. 나는 그분에게 정말 많은 것을 빚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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