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럿셀의 판단 이론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을 단초로 "논고"를 이해하려 하고 있다. 럿셀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근본적 비판은 명제는 뜻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그 의미는 우리가 명제의 가부를 알기 전에 명제의 참, 거짓 가능성(이것이 명제의 뜻이다)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 명제의 그림 이론이다. 그리고 이 이론의 직접적인 귀결 중 하나는 그 참, 거짓의 "가능성"을 말할 수 없는 명제는 아무런 뜻도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논리의 명제들이 그렇다. 이 명제들은 언제나(!) 참이다. 그러므로 토톨로기로 취급된다...

그러면 판단 이론 자체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최종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비트겐쉬타인은 "논고"(5.542)에서 매우 명시적으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모호하다.

"It is clear, however, that A believes that p', 'A has the thought p', and 'A says p' are of the form '"p" says p': and this does not involve a correlation of a fact with an object, but rather the correlation of facts by means of the correlation of their objects."(5.542)

애초에 비트겐쉬타인은, 예를 들어 'A believes that p'를 인식 주체 A와 명제 p 사이의 이항 관계로 생각했다. 그러나 객체와 명제(혹은 사실) 사이의 관계란 개념을 불만족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이를 객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 혹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관계로 대치시키고자 했다. 결국 비트겐쉬타인은 인식 주체를 그 주체의 (말하자면) 심적 상태(사실)로 대체해 버린다. 그리하여 저 명제는 사실과 사실 사이의 관계(즉, 각 사실들의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로 대치된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를 주목한다. 하나는 이리하여 비트겐쉬타인에게 인식 주체란 개념이 파기되었다는 것이다. 5.542 다음 명제에서 비트겐쉬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is shows too that there is no such thing as the soul -the subject, etc.- as it is conceived in the superficial psychology of the present day."(5.5422)

나의 입장에서는 이 역시 럿셀리안 독트린에서의 이탈이다. 인식론적, 혹은 심리학적 주체 개념에서 탈피한 후 비트겐쉬타인은 형이상학적 주체 개념을 끌어들인다. 나는 이것을 스피노자의 영향으로 보았었다. 그러나 노트북을 읽고보니 쇼펜하우어의 영향인 듯 하다.-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이 형이상학적 주체는 세계를 한계 짓는다. 어떤 식으로? 세계를 언어적(논리적) 공간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예컨대, 눈은 우리의 기관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세계(감각 자료)와 만난다(유아론). 마찬가지로 언어는 형이상학적 주체의 기관이고 형이상학적 주체는 그것을 통해 그것의 세계와 만난다( 이 역시 유아론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것은 형이상학적 주체 안의 사실들이다. 말하자면 스피노자적 우주의 양태들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논고 서두 부분의 존재론이 펼쳐지는 공간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주체 안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These correlations are, as it were, the feelers of the picture's elements, with which the picture touches reality"(2.1515) 같은 문장들이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 측면은, 5.542이 선언적, 혹은 방법론적인 명제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5.542에서 비트겐쉬타인은 'A says p'를 '"p" says p'의 형태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명제가 언급되는 모든 맥락에서, 즉 바라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언급하는 그 모든 맥락에서 그것을 명제 자신이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겠다는 것이다. 논고 전체에서 명제는 그렇게 다루어 진다. 그리고 그렇게 다루는 이유는 명제를 말하고 판단하고 믿고 바라는 식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논고 전체를 이런 맥락에서 파악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전제에서 논고가 일관되게 이해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형이상학적 전제는 완전한 헛소리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런 헛소리를 기반으로 한 명제들이 일관되게 해석되고 유의미한 결론들을 산출할까? 잊지 말자, 우리의 모든 명제들, 사상들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이런 헛소리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만일 우리가 철학자라면 그것들이 전부 헛소리임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사다리임을 안다. "He must, so to speak, throw away the ladder after he has climed up it."(6.54)

이상이 논고에 대한 나의 이해 전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