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에 부딪혔다.
"Everyone can clearly see this if only he attends to the following point, that if God had wished to make infinite our faculty of understanding, he would not have needed to give us a more extensive faculty of willing than that which we already possess in order to enable us to assent to all that we understand."(IP15S)
"바보가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이 우리에게 무한한 이성 능력을 주길 원했었다면 인간이 현재 갖고 있는 무한한 의지는 아예 처음부터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1. 지금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오류 이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2. 데카르트의 오류 이론. 오류는 인간의 이성은 유한한데 의지(선택, 판단)는 무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주장.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이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은 이렇다. 그러므로 이성이 무한하다면 (무한한) 의지는 불필요한 것 아닌가! 조금만 더 나가자자. 그렇다면 무한한 이성을 갖고 있는 신에 있어 의지란 무의미하거나 (수사로 멋지게 표현하자면) 이성과 동일한 것 아닐까!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이론이 유령처럼 바로 옆에 서 있다.
조금 아래를 보자.
"when we perceive a thing clearly and distinctly, we cannot refrain from assenting to it, that necessary assent depends not on the weakness but simply on the freedom and prefection of the will."
"사물을 명석 판명하게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참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허약함 때문이 아니라 자유와, 의지의 완전성 때문인 것이다."
더 이상의 해설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자유 이론이 거의 모습을 드러낸 채 숨어 있다.
보다시피 스피노자의 이론은 강력하고 무자비하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에서 개진된 이론은 데카르트의 것이라고 연막을 쳤지지만 송곳같은 스피노자의 이론을 꼭꼭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스피노자의 이론은 진리인가? 우리는 여기서 주저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주저함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지성은 유한한데 의지는 무한하다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실증하고 있는 것 아닐까? 스피노자의 답변은 이렇다. 한 이론을 배제하는 다른 이론들이 우리 안에 있고 그것들 사이의 힘이 팽팽하기 때문이라는 것. 즉, 한 관념의 진리성이란 그 관념의 힘의 크기를 말해 주는 것일 테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들의 함의는 너무도 풍부하다. 그리고 그렇게 헤매다 보면 결국 "에티카"로 수렴하게 된다. 나도 "에티카"로 돌아갔고 지금 제2부를 읽고 있다. 당분간 스피노자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기보다는 스피노자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한국어판 미출간 저작을 중심으로 스피노자를 번역하겠다는 나의 계획이 진전이 없는 것에 대한 변명을 이 참에 쓱 끼워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