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있는데 내가 말끝마다 스피노자를 들먹이자 스피노자에 대한 책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했다. 내가 읽어본 스피노자 입문서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처음으로 소피노자라는 한 인간을 소개해 준 책을 그 친구에게 선물해 주기로 했다.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친구는 곧, 책을 선물한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반응으로 나를 흐뭇하게 했다. 편하게 누워서 윌 듀란트의 스피노자 장을 읽다가 곧 책상으로 옮겨 갔고 급기야는 연필을 쥐고 줄을 쳐 가면서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세잔을 언급했다. 그 친구는 세잔을 좋아한다. 세잔의 무엇을? 오, 이런 식의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친구는 내가 스스로 세잔의 그림을 찾아보고 세잔에 관한 책을 읽어 보기를 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어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잠시 내려 놓고 세잔의 도판이 가득한 책들을 살펴 보았다.

세잔의 일생에 대해 읽고 나자 내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프루스트였다. 둘 다 심약하고 여린 품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잔이 오전 10시면 해가 진다고 말했듯이 한낮의 시간이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간은 늦게 시작되었고 그 끝은 없었다. 프루스트도 세잔도 글을 쓰다 죽었고 그림을 그리다 죽었으니까. 그들의 세속적 삶은 문장들 사이, 터치들 사이에서 겨우 존재했다. 그들은 과학자처럼 세계를 관찰했고 종교인같은 한결같음으로 그것을 원고자 위에서, 캔버스 위에서 재창조했다. 프루스트는 밤새껏 작업하여 원고 여백과, 풀로 덧붙인 종이장을 추고로 가득 메운 것에 만족하며 아침에 잠이 들었다. 세잔은 끊임없이 작업했지만 작업 속도는 경이적으로 느렸다. 마지막 남은 터치 하나에 걸릴 시간을 어림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일 구름이 걷히면 적절한 색조를 얻을 수 있을지, 아니면 적절한 색조를 얻지 못하여 전체를 다시 칠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절대성이나 완벽성의 취향을 갖지 못한 사람은 보기에만 좋은 졸작에 만족하고 만다."(세잔)

내 앞쪽 벽에는 2 X 4 m 정도 크기의 유채화가 걸려 있다. 어제도 걸려 있었지만 오늘에야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저 그림에서 우선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원근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을 썼다. 가까운 쪽은 짙고 먼 쪽은 옅다. 왼쪽 상단의 거대한 수풀과 균형을 맞추고 공간감을 창출하기 위해 오른쪽 아래에 나무 하나를 그려  놓았다. 그런데 멀리 왼쪽 상단에 그려 있는 수풀 속의 나무와 크기가 같다. 순간, 저 화가분은 소심한 분일 게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크고, 과장되고 확고한 나무 하나를 원하고 있었나 보다. 왼쪽 상단의 녹음이 무척 짙다. 그 짙음을 오른쪽 아래에서 받아주고 있다. 그런데 왼쪽의 짙음들 사이로 흐르는 강은 어떠해야 할까? 짙게 해야 할까? 옅게 해야 할까? 화가는 옅음을 선택했다. 그런데 난 그 부분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다. 화가도 고민을 했을 것이고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필시 만족을 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출처: 내가 직접 찍음)

내가 알기로 세잔은 회화에 있어서의 어떤 선험적 구조를 극복하려 했던 사람인 것 같다. 예컨대 전통적인 원근의 표현. 시선을 한 촛점으로 유도하는 직선들이나 농담들. 그 이론들은 우리의 눈의 구조에서 연역된 것들이리라.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실 체험을 받쳐 주는 구조들은 아닐런지 모른다. 예컨대,우리는 원근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안다.


(출처: http://mtcha.com.ne.kr/korean-photo/sosun/photo8-gimhongdo%20jagpum.htm)

세잔이 선택한 것은 주로 색조와 구도였다. 세잔은 그것을 통해 인상주의풍 그림들의 표면성, 가벼움을 극복하고 깊이와 풍부함, 즉 강한 존재감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색조의 배열, 대비 그리고 그 밖의 기법들을 통해 화면 전체가 강력한 무게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평면적이지 않고 깊이를 가질 수 있을까? 이제 그것은 전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세잔의 감각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연구하고 실험하고 알아낸 것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감각.


(출처: http://cicnig.com/laughing-paul-cezanne-lesson-plans/)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어느 정도의 테크닉과 손재주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색조를 표현하고 인상들을 훌륭하게 조화시키는 일은 예술가만이 할 수 있다."(세잔)

세잔은 그에서 성공했을까? 그것은 세잔의 그림을 직접 보고서야 판단할 수 있는 일이리라.

그런데 세잔의 주관심이 색조와 색조들 사이의 대비나 구도가 되면서 그의 그림의 주인공은 '표현된 어떤 것'이 아니라 '표현' 자체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세잔의 인물화들의 일관되게 경직된 포즈들, 무표정한 표정들을 보면서 거기서 인간적인 어떤 것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리라. 그것들은 정물화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듣기로 세잔 앞에서 모델 노릇을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세잔의 작업 속도가 느린 탓도 있지만 세잔은 모델이 조금만 움직여도 투덜댔기 때문이라고).


(출처: http://www.wikipaintings.org/en/paul-cezanne/madame-cezanne-in-the-greenhouse)

말년의 대작들, 예컨대 목욕하는 사람들의 디테일이 생략된 나신들에서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기서 인간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리라. 그런데 내게는 그 군상들이 묘하게 보인다. 그 군상들이 세잔의, 때로는 천진스런 개성과 어긋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말년의 세잔이 목욕하는 사람들을 그리는데 열정을 쏟았는지 조금 의아스럽다. 일상적인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들에 비해 그것들은 다소 상징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잔의 그림 앞에 직접 서 보면 알 수 있을까?


(출처: http://www.steveartgallery.se/sweden/picture/image-27926.html)


(혹시나 해서 덧붙인다. 이 글은 미술 평론 비슷한 어떤 것이 절대 아니라 일기 비슷한 어떤 것이다. 세잔을 보면서 든 생각들을 간단히 스케치한 것일 뿐이다. 앞으로 계속 발전시켜 볼 여지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볍게 버려질 단상일 뿐인지 나도 전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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