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BBC를 시청할 수 있는 앱인 BBC iPlayer 영화 섹션에 한국 영화 세 편이 올라와 있다. (아마 한국에서 iPlayer를 이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악인전, 공작, 그리고 버닝. 이 섹션에 올라와 있는 외국어 영화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세 편이나 올라와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다.
악인전은 그렇고 그런 깡패 영화다. 마동석의 캐릭터 때문에 선택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동석은 기존의 동양계 남성 배우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배우이다. 서구권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공작은 매우 우아한 첩보물이다. "팅커, 테일러..." 같이, 총격씬이나 추격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타일의 첩보물. 르 카레 원작의 작품들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실화에 기반한 것이니 만큼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매우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보인다. 많은 한국의 작품들에는 서구권 작품들에서 찾기 힘든 매력이 있는데, 이 작품도 그렇다.
버닝.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보면서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렸다. 이방인은 형이상학적 소설이다. 그런 고로 주인공 뫼르소가 소설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인격적 전변을 겪는 것도, 납득은 안되지만 그냥 넘어가준다. 어차피 우화 아닌가, 하면서. 그러나 버닝에서의 종수의 인격적 전변은 그런 식으로 양해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이 작품의 핵심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벤이라는 인물의 성공적 형상화가 이 영화의 주제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감독이 만든 훌륭한 영화다.
악인전을 제하고 나 나름대로 평가해 보자면 역시나 한국의 작품들, 한국의 영화들의 장점은 리얼리즘에 있는 것 같다. 리얼리즘은 쉬운 쟝르이기도 하고 쉽지 않은 쟝르이기도 하다. 한국의 문화가 고도화될수록 리얼리즘에서 탈피하려는 유혹이 커질 것이다. 즉, 그러할수록 리얼리즘은 고수하기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여정일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한국은 일반 문화 대중과 문화 창작 집단 사이의 괴리가 크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이반이 필연적일 것 같지는 않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