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should we do?
Who are we?
Why should we be?
What are beings?
Why does being happen?
Philosophising proceeds out of these questions upward into unity."
하이데거의 이른바 <블랙 노트북 1931-1938>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문구이다. 그 앞에 순간 멈추든지, 무심히 지나치든지 둘 중 하나다. 후자일 수 있다. 저런 것은 철학이 아니라 감상적인 넋두리야, 말하자면 철학의 타락이야, 이렇게 되뇌이면서.
그러나 순간 심각해지면서 바삐 흘러가는 사고가 멈출 수도 있다. 일종의 화두 앞에 선 것과 같이. 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혹은 철학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예컨대, 럿셀의 기술구 이론이나 인식론에 있어서의 게티어 문제, 혹은 콰인의 존재론적 커밋먼트에 대해 궁구하고 있었다고 해보자. 이런 류의 탐구는 안전하다. '철학적’ 문제들을 분석가능한 수준으로 환원한 뒤 그 환원의 영역 안에 머물수 있게 해준다. 문제를 순수하게 문제로만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테크니컬한 철학은 논리학이나 수학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안전하다. 그러나 안전함의 이면은 지루함, 권태일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철학인가? 과연? 그리하여 권태는 환원 이전을 꿈꾼다. 환원 이전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 있을까? 그것이 단지 넋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보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