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 

철학의 고전들은 대체로 비슷한 외양을 하고 있다(물론 예외는 많다). 긴 문장에, 긴 문단에, 두터운 페이지. 그리하여 철학의 고전들을 읽는 방법도 대체로 정립되어 있는 것 같다. 가능하면 아침 시간에 2시간 정도를 들여 매일 매일 읽으라. 그리고 반복적으로 읽으라. 칸트를 번역한 최재희 교수의 말에 따르면, 칸트는 10번 정도 읽어야 감이 온다는 것이다. 결국은 시간을 아낌없이 채워넣으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퍼스도 칸트를 그렇게 2년 동안 읽었고, 하이데거도 후설의 <논리 탐구>를 읽고 또 읽었다고 고백한다.


나도 그러한 조언을 따라 철학의 고전들을 읽는다. (요즘은 후설과 씨름하고 있다.) 처음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읽었는데 몸에 이상이 오는 것 같아서 5시로 늦췄다. 그리고 요즘은 서머타임에 적응하지 못하여 5시 30분으로 또 늦췄다. 


반복적으로 읽고, 또 많이 쓴다. 그러면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 이해라는 것이 어떤 심오한 통찰을 의미하는가?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원래 거기에 글자 그대로 적혀 있었던 것을, 이전에는 어떤 신비한 이유로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이제는, 거기 그렇게 적혀 있으니 적혀 있는 대로 읽는 것 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경험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책의 저자가 그 말을 특정하게 정의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저자는 일반적 의미의 경험이라는 말의 사용을 아예 피할 수는 없다. 저자는 혼용하여 쓸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자로서는 그 둘을 잘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구별을 못하면 경험이라는 단어를 품고 있는 문장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둘을 잘 구별할 수 있게된다고 해도 대수로운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칸트 책의 한 문장에 대해 삼 십분 동안 해설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철학적으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책을 꼼꼼히 읽다보면 오탈자를 많이 찾아내게 된다. --- 그런데 그것이 과연 대수인가? 그와 같다.   


2. 코로나 바이러스.

영국은 이제 하루 사망자가 600명에 육박하고 있다. 1000명을 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국가적 재난 사태에 정부를 비판하는데 신중하던 언론들도 이제는 폭발하고 만다.  


영국은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다. 다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 의료진에 대한 보호일 것인데, 보호 장비의 보급도 늦고, 의료진에 대한 코로나 검사도 지지부진하다. 장차 의료진에 대한 집단 감염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의료진이 여럿 사망한 상태이기도 하다. --- 준비는 전혀 안되어 있지만 어찌 어찌 운이 좋아서 최소한의 피해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으면 했지만 현실의 매서움 앞에 그런 희망은 너무도 갸냘픈 것임을 깨닫는 중이다. 


이제 영국에서도 마스크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하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일 사망자 1000명이 넘어서면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 옆 나라 프랑스는 중국에서 마스크 몇 억장을 수입하고, 프랑스 대통령이 직접 마스크 공장에 가서 마스크 생산량을 몇 배로 늘려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데 영국에서는 마스크가 효용이 있는지 어떤지 과학적 분석을 하고 앉아 있다. 오늘 마스크에 대해 보도한 비비씨 방송의 마무리 말은 이랬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마스크를 쓰려 한다면 의료진에 갈 마스크가 바낙나지 않을까요?" --- 이걸 왜 국민들에게 말하는지? 정부에 대고 해야 할 이야기 아닌가?  


이미 봉쇄가 내려진 상태이긴 하지만 운동, 산책 등을 이유로 한 외출은 허가된다. 우리도 매일 산책을 나간다.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잘 지킨다. 길을 가다 맞은편에 사람이 오면 최대한 길 한 쪽으로 비켜선다. 그런데 그런 거리두기가 마트 안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마트에서 장보는 일이 가장 위험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가능한 마트에 가지 않기로 하고 있다.   


3. 로저 워터스.

로저 워터스는 올해 미국, 캐나다, 멕시코를 돌며 30회 이상의 공연을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도 8월달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는 공연 티켓을 사놓은 상태였다. (공연 하나를 보려고 비행기 타고 뉴욕까지 날아간다는 것은 고전적으로 생각해서 미친 짓이지만, 아내와 나는 서로의 미친 짓을 막으려 하기 보다는 조장하는 스타일인지라 매번 미친 짓을 벌이고 만다...) 그런데 몇 칠 전에 코로나 사태 때문에 공연을 내년으로 연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양반이 70대 후반의 나이를 향해 가는지라(43년 생이더라) 내년 일은 내년 가봐야 알 것 같다. 


(얼마 전 멕시코의 유대인 단체가 로저 워터스 보이콧 운동을 벌였고, 미국 프로야구 협회에서는 로저 워터스의 반-유대주의 의혹에 따라 로저 워터스 공연 광고를 다 치워버렸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그런 식으로 스폰서가 여럿 취소되기도 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억압 정책을 비판하기만 해도 반-유대주의 의혹을 받는다. 그리고 반-유대주의라는 표딱지를 받는 것으로 공인(정치인, 예능인 등)의 경력이 끝날 수 있다. 나는 대학때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관련 강의를 들었었고 그 이후로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산 무화과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   


(몇 년 전에 나온 로저 워터스 신보의 마지막 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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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eoee 2020-04-1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weekly 님, 유럽에서도 그런 걸 강조하는 공부 문화가 있나요? 10번 읽기, 100번 읽기, 몇 년 붙들고 있기 등등... 타력을 강조하는 종교적 태도가 세속화된 건가, 싶기도 하고, 궁금하네요...!

weekly 2020-04-13 18:2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 제가 글을 좀 오해받게끔 쓴 것 같네요.:) 제가 알기로 서양에 그런 문화는 없구요. 근대 이전엔 서양에서도 인문학 = 주석학이었으니 확립된 고전을 거듭 읽는 것이 연구 활동의 거의 유일한 내용이었겠지만요... 제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퍼스(칸트), 하이데거(후설), 데리다(후설) 등에서처럼 고전에 대한 철두철미한 이해에 기반해서야 그만한 깊이의 후속 철학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논문들을 읽다보면, 이 저자는, 예컨대, 자신이 다루고 있는 후설의 그 저작을 거의 읽지 않았구나, 혹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제 나름으로 내린 결론이, 기본으로 돌아가자, 라는 것이었습니다.